사도세자 뒤주 피살 사건의 진상규명 <사도세자의 고백>
추천 [서평] 이덕일 저 <사도세자의 고백 : 24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을 읽고
2004. 03., 399쪽, 휴머니스트
조선왕조 500년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사도세자가 역모를 꾀한 ‘정신병자’이고 그의 아버지이자 조선 21대 임금 영조(재위 1724~1776)는 이상성격자라는 게 한국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기존의 ‘상식’이었다. 그리고 그런 상식의 출처는 거의 대부분 사도세자의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에 의해서였다. “세자의 부인이 직접 쓴 피어린 기록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한중록>은 그렇게 진실이 되어 갔다.”
이 책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기존의 상식, 즉 ‘정신병자’라는 통념을 깨며 사도세자가 북벌을 꿈꾸었던 무인군주이며 그가 뒤주에 갇혀 죽게 된 진짜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었음을 복원해낸 새로운 형식의 역사서이다.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사도세자 뒤주 피살 사건’에 대한 ‘과거사 진상규명’인 셈이다.
조선 왕조사의 가장 처참한 장면으로 기록된 사도세자 뒤주 피살사건, 과연 세자가 뒤주에 갇힌 이유가 정말 정신병 때문이었을까?
저자 이덕일은 <영조실록>과 <정조실록> 등 한국인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고문(사료)에서 영조 시대의 정치상황 및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하여 <한중록>과 비교한 후 사도세자의 시대를 새롭게 <사도세자의 고백>에 담았고, 고리타분하고 딱딱한 학술용어가 아닌 ‘대중적인 글쓰기’를 통해 독자들이 접하기 쉽게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된 시기는 1999년이었다. 발간 이후 서점가에 ‘역사책 읽기’ 돌풍을 몰고 왔고, 수만 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전국의 도서관에서는 필수 도서목록이 되었고 정부와 학계의 표창을 받았으며, ‘이덕일 역사서’ 책 읽기 열풍이 일어났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라는 점과 기존의 국사책과 역사해석에 대한 반감, 그리고 저자 특유의 ‘대중적 글쓰기’가 독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낸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덕일은 사서(史書, 정조실록)의 갈피에서 찾아낸 이 한마디로 조선 22대 임금 정조와 사도세자를 재해석하는 길을 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의문을 추적하는 저자는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의심하는 데서부터 진실에 접근한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저술한 것은 남편의 비통한 죽음에 오열하는 20대 청상과부 때가 아니라 권력의 단맛 쓴맛을 다 보고, 자신이 속한 집안이 정조 때에 몰락한 이후 정조 사후 순조 때에 이르러 자신에게 악처 혐의가 가중되기 시작한 70대 노정객 때였다는 것이 기본적인 혐의였다.
결국 사료와 고증을 통해 파헤친 사건의 실체는 통념을 뒤집는다.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소론에 동정적이었던 사도세자는 당시 집권 정치세력이었던 노론의 ‘소론 사냥’에 반대했고 노론의 눈 밖에 났다. 노론은 세자를 압박했고 세자는 노론에 대항하기 위해 더욱더 소론과 가까워졌다. 급기야 노론에 속한 장인(홍봉한)이 사전에 잘 짜여진 각복에 따라 야밤에 경복궁에 들어온 듣보잡 나경언의 고변, 즉 ‘사도세자와 소론의 영수 조재호가 손잡고 정변을 꾀한다’를 검증도 없이 그대로 영조에게 들고가 고발한다. 영조는 분노했고 홍봉한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남편의 비극을 곁에서 지켜본 아내의 한맺힌 기록이라는 <한중록>은 사실 아버지(홍봉한)를 따라 소론을 때려잡고 가문의 영광을 유지하려는 혜경궁 홍씨의 노회한 정치적 의도를 숨기려는 사기술일 뿐이라는 것이다.
영조는 왜 4대에 걸쳐 유일한 종통(삼종혈맥)이었던 자신의 친아들 사도세자를 죽일 수밖에 그것도 조선왕조사에 전무후무한 ‘뒤주’에 가두어 죽여버렸을까?
저자는 영조(연잉군)가 전임 경종 때 노론 세력과 함께 왕위찬탈을 꾀했던 역모사건(임인옥사 壬寅獄事 )의 ‘수괴’였으며, 동시에 ‘경종 독살 의혹 사건’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는 점을 지목한다. 이점이 재위 내내 영조에게는 일종의 ‘아킬레스 건’이었는 것이다.(영조는 재위시 임인옥사로 사형된 노론 4대신을 복권시키고, 당시 사건/판결기록인 임인옥안 壬寅獄案을 불살라버렸음)
노론의 지지를 업고 등극한 영조는 자신이 연루된 ‘역모 사건’과 ‘경종 독살 사건’으로 흉흉했던 사대부들과 백성들의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소론 온건파를 포용하는 탕평책을 썼고, 그가 쓴 탕평책은 재위 초반의 위기를 넘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원리원칙과 대의명분을 내세운 소론의 강경파들이 영조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나주 벽서(대자보) 사건`을 일으킨데다 집권 노론은 ‘대자보 사건’을 기회로 자신들과 한 배를 탈 수밖에 없는 영조를 등에 엎고 정치 보복과 일당 독재의 탐욕을 부렸다. 소론 온건파들마저 한꺼번에 목숨을 잃거나 귀양을 가고 노론만의 세상이 온다.
이때 소론에 동정적이었던 세자는 노론의 ‘소론 사냥’에 반대했고 영조와 노론의 눈 밖에 났다. 영조와 노론은 세자를 압박했고 세자는 노론에 대항하기 위해 더욱 더 소론과 가까워졌다. 결국 세자 제거의 총대를 멘 것은 당대의 노론 핵심이었던 세자의 장인과 처외삼촌이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채 죽어가는 8일 동안, 집권당인 노론과 사도세자의 외척, 그리고 부인(혜경궁 홍씨) 누구도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구명을 위해 애쓰지 않았다. 당시 혜경궁 홍씨 역시 사도세자의 고립과 탄압, 그리고 억울한 죽음 과정에서 사도세자 편에 선 것이 아니라 영조와 노론(집권당이자 아버지였던 홍봉한)에 서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철저히 방관했다. 오직 세손(정조)만이 “아버지를 살려달라”며 대성통곡을 했을 따름이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세자비였던 혜경궁 홍씨마저 아버지를 변명하고 남편을 정신병자로 기술한 <한중록>을 남겼다. 정치적 반대파인 사위나 남편이 왕이 되는 것보다는 미리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고, 그러한 사실을 꼭꼭 덮어두는 것이 가문의 백년대계를 위함이라는 비정한 결단이 있었던 것일까? 독자의 입장에선 섣불리 예단할 일이 아니겠으나, 저자의 시각은 바로 그러하다.
또한 저자는 <한중록>의 기록처럼 사도세자가 정신병에 든 후계자가 아니라 어쩌면 성군의 자질을 지녔을지도 모를 사도세자의 모습에 대한 기록을 복구해 낸다.
“마구간을 뛰쳐나가 콩밭을 상하게 한 군마의 주인 위사(衛士)를 처벌하고 밭주인에게 후히 보상하도록 명령한 인물. 백성을 고통에 빠뜨리는 부역을 감해주라고 명령한 인물. 또한 온양 읍내의 부로들과 이름 없는 선비들을 불러 도타운 말로 학문에 힘쓸 것을 권한 인물” 바로 <영조실록>에서 전하는 사도세자의 모습이다.
즉, 사도세자는 미치지 않았으며, 당대의 집권 여당이던 노론이 소론 지지자이던 사도세자의 즉위를 두려워해 그에게 ‘역모(반란음모)죄’를 뒤집어 씌워 제거했다는 것이 ‘사도세자 뒤주 피살 사건’에 대해 저자가 재조사한 결론인 셈이다.
출판사는 이 책을 시대는 물론 인물 깊숙이 들어간 ‘전혀 새로운 본격 역사 교양서’라고 평가한다. 과거를 대하는 눈, 사료를 추적하는 발, 빨려들게 하는 손, 소설적 상상력과 다른 역사적 상상력을 펼치는 뇌, 조선왕조사의 가장 처참한 비극을 바르게 복원하려는 뛰는 심장이 온전하게 만난 결과라는 것이다.
“이 책으로 인해 인문교양서의 70%를 차지하는 우리의 역사서들이 사실의 건조한 나열과 에피소드의 반복이라는 1초의 흥미를 훌쩍 넘어서게 되었다. 1997년 7월 초판 1쇄가 나온 이후 현재까지 17쇄를 찍어낸 베스트셀러로 휴머니스트에서 내용과 외형을 보안하여 개정판을 펴낸다.”
출판사는 이 책을, 90년대 후반부터 ‘대중 역사서 기술의 전범’으로 꼽혀온 역사가 이덕일이, <누가 왕을 죽였는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와 함께 ‘인조반정 후 기존의 노론위주의 조선후기사 서술을 지적하며 쓴 3부작’ 중의 한권’이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책이 출간된 13년이 지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국내 주류사학계의 대부들이 <사도세자의 고백>과 저자 이덕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 정병설 등 친일파 사학자 이병도의 직계 후배 학자들이 <사도세자의 고백>을 비롯하여 새로운 역사 해석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이다. 조선사 전공이 아닌 역사학자가 1차 사료를 제대로 해석하지 않고 ‘정치적 타살’이라는 논리도 논거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노론 망국론’이라는 편견으로 사도세자에 대한 독자들의 측은함과 노론에 대한 반감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결론은 <한중록>만이 ‘공인’된 역사 기록이라는 것이다.(아래 링크 참조)
[우리 시대의 명강의_정병설] 02. 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 비판 : 네이버 카페 cafe.naver.com/mhdn/21775
‘13년 스테디셀러’에 포문 역사적 진실 공방 불붙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458508.html
대표적인 비판자인 정병설의 주장은 “치열한 권력투쟁은 노론과 소론 사이가 아니라 같은 노론인 정순왕후 친정(공홍파)과 혜경궁 친정(부홍파) 사이에 있었다는 점, <한중록>이 친정이 몰락하고 위기에 몰린 상황이 아니라 몰락한 친정에 서광이 비칠 때 쓰여졌다”과 “궁궐과 한 울타리 안에 있는 종묘를 가리키는 태묘(太墓)를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으로 본 점, 치열한 다툼을 벌인 정순왕후 세력과 혜경궁 친정의 관계를 ‘서로 협력했다’고 해석한 점 등을 대표적인 ‘오독’의 사례”라는 것이다.
이덕일이 경복궁 내 종묘를 태묘(건원릉)으로 오독한 것은 사소한 실수일 수 있지만, 사도세자가 수 차례 영조를 따라 명릉이나 종묘 등 선조 임금들의 묘에 참배하러 갔음을 통해 혜경궁 홍씨가 주장하는 ‘어려서부터 부자간의 갈등이 존재했다’는 것을 반박하기 위함이었다는 이덕일의 논리에 대해 정병설은 언급하지 않는다.
정병설의 주장이 조금 웃긴 것은 영조 재위시 ‘치열한 권력투쟁’의 결과 고문받다 죽거나 사약을 받거나 귀양을 간 사람들은 공흥파나 부흥파가 아니라 소론이었다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1755년 발생한 ‘나주 벽서 사건’으로 윤지, 이하징, 윤상백, 박찬신, 윤광철, 조동성 등 수십 명이 사형당했고, 이미 죽었던 소론의 대신들에게 역모죄를 판결했다. 나주 벽서 사건이 발생한 후 영조는 노론의 정치공세 확대를 허락해 많은 소론 대신과 사대부들을 제거한 것이다. 영조의 탕평책은 말뿐이었다는 이덕일의 주장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정병설은 영조 재위 기간 중에 공흥파와 부흥파가 권력다툼을 벌인 것은 남인과 소론이 거의 궤멸된 ‘나주 벽서 사건’과 1762년 ‘나도언의 고변’ 이후였음을 감추고 있다. 더군다나 두 세력은 소론에 대한 정치보복과 학살 과정에서 그리고 사도세자가 조작사건에 휘말리고 뒤주에 갇혀 죽는 동안 일심동체로 움직였다는 것은 <영조실록>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정병설 등 주류사학계 인사들은 한국사학계의 풍부한 논쟁과 그를 통한 사학계의 대중화 및 발전에 전혀 관심이 없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책의 전체적인 논지와 사료에 대한 해석, ‘사도세자 뒤주 피살 사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얼마든지 토대로 삼을 수 있음에도 한 마디로 평가절하하고 낙인찍는 것을 보면. 240년 전 사건에 대해 재조명하면서 정치적 가해자를 비판하는 데에 발끈하는 것은 단순히 ‘사도세자 뒤주 피살 사건’에 대한 새로운 분석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정병설 등의 비판에 대해 저자는 “지엽말단적인 부분만 문제 삼아 막무가내로 ‘학자가 아니다’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정 교수가 언급하지 않은 부분에 더 많은 근거가 있다”, “홍봉한 등 혜경궁 일가가 정조 즉위 뒤 몰락하는 사실 등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는 근거가 된다”라며 반박한 바 있다.
-인상 깊은 문장-
“경종은 재위 4년 8월에 접어들면서 병세가 심각해져 거의 식사도 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이 때 대비 김씨와 연잉군(영조)은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올렸다. 경종은 이 게장 덕택에 평소보다 수라를 많이 든 후 감을 먹었다. 그런데 <경종실록>에 기록된 대로, 게장과 생감은 의가에서 매우 꺼리는 상극의 음식이었다. 게장과 생감을 올린 후 닷새 후 어의들의 결사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삼차를 경종에게 올렸다. 인삼차를 마시고 얼마 안 있어 경종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바로 이것이 왕세제 연잉군이 즉위한 후에도 두고두고 그를 괴롭히는 경종 독살설의 한 빌미가 된다.”(82쪽)
“사도세자가 역모를 꾀했다고 고변한 나경언은 노론 윤급의 종으로 알려져 있으나, <영조실록>에 액정 별감 나상언의 형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중인일 가능성이 높다. 액정 별감이란 액정서에 소속된 관직으로 주로 중인들이 맡는 하위 관직이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임금이나 세자가 행차할 때 어가 옆에서 시위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경언은 윤급의 노비이기보다는 중인들이 맡았던 청지기였을 것이다. <영조실록>은 나경언에 대해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꾀어냈다. 가산이 탕진되어 자립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경언이 고변하던 1762년 5월 22일 <영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나경언에 헝조에 고하고, 곧바로 형조 참의 이해중(홍봉한의 손아래 처남이자 혜경궁 홍씨의 외삼촌)이 영의정 홍봉한에게 보고한다. 홍봉한은 곧바로 영조에게 아뢰라고 말하고 이해중이 세 차례 청한 후 영조가 맞이 했다. 영조는 고변서를 보자 곧바로 직접 국문하겠다고 명령한 후 고변서를 불태웠다.
양반도 아닌 일개 서민이 고변이라는 어마어마한 일을 했을 경우, 그것도 대리청정하는 세자와 관련된 고변을 했을 경우에는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 후 근거가 나왔을 때 임금에게 보고하는 것이 정상적인 일처리다. 조선의 국법은 남을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고발했다가 무고로 밝혀지면 고발한 사람을 대신 사형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조 참의 이해중은 이 사건을 자신의 직속 상관인 형조 참판이나 형조 판서에게 보고하지 않고 매형인 영의정 홍봉한을 먼저 찾았다. 홍봉한 또한 진위 파악 대신 빨리 영조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분명히 사건에 어떤 교감이 있었던 것이다.”(267~277쪽)
“나경언은 자신이 세자를 고변한 이상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경언은 드디어 자신이 세자를 모함했다고 자백했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극형에 처하자고 요청했다. 이에 영조는 나경언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했다.”(288쪽)
“세자는 나경언이 고변한 후 아흐레째 매일 새벽 동궁의 관원들과 함께 시민당 뜰에 나와 거적을 깔고 앉아 영조의 명을 기다렸다. 영조가 세자의 문안을 받지 않으니 계속 시민당 뜰에 나와 대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293쪽)
“나경언이 고변하던 날, 나경언의 고변을 사주한 홍계희와 더불어 영조는 군사를 동원해 궁성을 호위하고 세자궁으로 통하는 문을 막았다. 또한 이틀 후에는 3군문 대장 구선행 등을 볼러 창덕궁 입직 군사(세자 호위권)의 1/3을 감하라고 명했다. 즉, 영조는 세자가 동원할 우려가 있는 군사를 미리 감한 것이다. 이는 영조가 세자 문제를 혜경궁의 주장처럼 ‘정신병’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치’의 차원에서 보았음을 뜻한다. 즉, 영조에게 세자는 개인적 비행을 저지르는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당파와 대립해 자기 당파를 형성한 ‘정적’이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결국 영조가 ‘부당,자당’ 운운하며 ‘조정 신하가 모두 역적’이라는 말까지 했던 것은, 세자를 지지하는 자당과 연관된 정치 세력을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위험한 세력으로 보고 있었음을 뜻한다.”(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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