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10훈요에 반영된 왕건의 정치사상

 

 

우리나라 중세역사를 보면 비록 착취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 봉건군주이기는 하지만 나라와 민족의 발전에 일정하게 긍정적인 역할을 한 왕들도 있었다. 고려의 건국 시조 왕건(877-943)도 그 대표적인 인물들중 한 사람이었다. 고려라는 국호에서도 잘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며 우리나라 역사상 첫 통일국가였다.

 

고구려가 막강한 국력에 의거하여 광활한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고 근 천년동안 동방의 강국으로 그 위용을 떨쳤다면 고려는 고구려의 뒤를 이어 겨레와 국토를 통일하고 강력한 국력, 발전된 경제와 문화로 근 500년간의 조선중세사를 자랑스럽게 장식하였다.

 

918년에 건국을 선포한 고려국가가 18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국토통일의 위업을 이룩하고 우리나라 력사에서 첫 통일국가로 이름을 떨치게 된 데는 건국시조 왕건의 역할과 주요하게 관련되어있다. 당시 사회의 진보와 민족사발전에 남긴 왕건의 업적은 그의 정치사상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 고려의 건국시조 왕건의 정치사상은 그가 남긴 10훈요에서 찾아볼 수 있다.

 

10훈요는 왕건이 임종 직전에 왕통을 이어갈 그 후손들에게 교훈으로 삼도록 하기위해 남긴 훈시였다. 왕건의 10훈요에는 고려봉건왕조와 국가를 유지 강화하기 위한 정치강령과 방도에 관한 문제들이 집중적으로 반영되어있다. 왕건은 10훈요에서 종교신앙, 왕통계승, 국가관리, 수탈제도, 인재등용, 신분제도, 군사, 대외정책 등 장차 고려봉건국가의 안전한 발전을 도모하는 데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원칙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10훈요에 반영된 왕건의 사회정치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먼저 불교와 지리도참설을 고려봉건국가의 통치사상으로 내세운 것이다. 왕건을 비롯한 고려봉건통치배들은 불교와 지리도참설을 사상적 통치수단으로 삼았다. 그들이 불교와 지리도참설을 사상적 통치수단으로 삼은 것은 새로 수립된 고려 봉건국가의 안정을 보장하는 데서 불교를 이용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본데서와 북방을 개척하는 데서 서경(평양)의 위치를 중시한 것과 중요하게 관련돼있다.

 

사실 새로 수립된 고려봉건국가에는 여러 정치세력들이 존재하였으며 또 고려 역시 봉건사회로서 계급적 대립과 투쟁이 사회관계의 기본으로 되어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왕건을 비롯한 통치배들은 인민들의 투쟁의식을 억제하는 데서 현실 세계를 떠나 정신적 안정으로 낙을 구할 것을 설교하는 불교교리를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불교를 통치사상으로 내세우고 그를 적극 장려하였으며 불교행사를 빈번히 벌였다.

 

대표적인 불교행사로서는 연등과 팔관회였다. 왕건은 10훈요에서 연등행사는 부처를 위한 것이고 팔관회는 오악, 명산, 대천, 룡신을 위한 것이므로 후세에 간신의 제의에 따라 이 행사를 더하거나 덜거나 금지하지 말 것이라는것 그리고 국기일이나 피하고는 임금과 신하들이 같이 즐기는 행사로서 계속할 것을 강조하였다.

 

지리도참설은 지리적 요인에 따라 나라나 개인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미신신비설이며 그 원리적 기초는 신비화된 음양5행설이다. 당시 왕건은 서경을 중심으로 북방개척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개경토호들의 반발에 부닥칠 수 있었다. 왕건은 이것을 해결할 목적으로 당시 미신신비설이 널리 퍼져있던 조건에서 지리도참설을 이용하였다.

 

10훈요에 반영된 왕건의 사회정치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으로 국가의 통치방법에 대한 견해이다.

 

당시의 국가통치방법에서 중요한 것은 국왕선정문제이다.

 

봉건사회에서는 적자, 적손 특히 맏아들이 국가나 가정의 대를 잇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왕건은 국왕선정은 나라를 다스려야 할 국주를 선정하는 일이므로 재능과 능력을 기준으로 해야 하며 맏이가 똑똑치 못하면 둘째나 여러 아들들 중에서 신하들이 추대하는 자로서 정해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이와 함께 왕건은 국왕이 통치자로서 지켜야 할 입장을 밝혔다.

 

그는 국왕은 반드시 신하와 민중의 신망을 얻어야 하며 그러자면 충고하는 간언을 따르고 남을 해치는 참언을 멀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세와 부역, 수탈을 최대한 가볍고 적게 하며 국왕자신이 농사가 힘들고 고됨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그는 후하게 표창하는 곳에 좋은 장수가 있고 인덕을 베푸는 곳에 어진 백성이 있으며 상벌을 정확히 해야 음양이 순해진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왕건은 관리임명에서 차현(공주 서북 57리의 차령)이남과 공주밖의 지방출신들의 정계진출을 경계하라고 강조하였다. 이 말을 달리 해석하면 지난날의 후백제출신들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왕건은 후백제가 고려의 통합정책에 끝까지 저항하였고 고려가 무력으로 정복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반고려감정이 강할 수 있으므로 그들이 왕실귀족과 결혼하여 국권을 쥐게 되면 변란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관노비와 사원노비, 진역의 잡척과 같은 천인들이 권세가들에게 붙어 속량되거나 왕실에 접근하여 교활한 수법으로 권세를 쓰고 정치를 문란시킬 수 있으므로 그들이 양민이라 해도 등용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이것은 후백제 출신의 정계진출을 억제하며 천인신분제도를 어길수 없는 것으로 고착시키려는 고려통치배들의 정권독점과 지배욕, 착취계급적 입장을 반영한것이였다. 이외에도 왕건은 국가가 정한 녹봉제도를 위반하고 공로없는 자, 척실 또는 종신이라 하여 명목이 없이 지나친 녹을 주면 국가질서를 문란시키고 인민들의 불만을 야기시키므로 경계할 것을 강조하였다.

 

왕건은 군사력 강화에 주의를 돌릴 데 대하여 강조하였다. 그는 집권자는 마땅히 강포한 나라들과 이웃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의 안전문제를 망각해서는 안되므로 군사들을 보호하고 무거운 부담을 덜어주어야 하며 매년 가을에 검열을 하여 특별히 용맹한 자들에게는 벼슬을 올려주어 군력을 강화하여야 한다고 유언하였다.

 

10훈요에 반영된 왕건의 사회정치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으로 사대주의를 반대하고 민족문화와 민속의 고유성을 견지할 데 대한 견해이다. 왕건은 고려에서 인접국가의 문물제도를 존중하지만 땅이 다르고 사람의 성격도 다르기 때문에 꼭같이 하지 말 데 대해 언급하였다. 이것은 타국의 문물제도를 그대로 본받으려는 사대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이며 자기 민족의 특성을 살릴 것을 시사한 것이다.

 

10훈요는 본질에 있어서 근로인민대중에 대한 계급적 지배와 착취를 강화하고 봉건적 신분등급제도를 안전하게 그리고 장구히 유지하도록 하려는 고려봉건통치배들의 계급적 요구와 의사를 반영한 것이었다그러나 10훈요에 반영된 왕건의 정치사상은 당시의 역사적 조건에서는 일정하게 진보적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실례로 왕건은 10훈요에서 선행통치배들의 인민대중에 대한 지나치게 가혹한 수탈과 형벌정치를 경계하고 부역과 조세를 경감하며 민생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정치에서 백성의 신망을 얻는 것을 근본으로 내세우는 등 인정(어진 정치)의 실시를 표방하였으며 그를 위한 일련의 방안들도 제기하였다. 이것은 당시에 있어서 제한적으로나마 인민대중의 생활상 요구에 부합되는 진보적인 견해였다.

 

고려의 건국시조 왕건이 제창하고 유언으로 남긴 인정의 정치이념은 그후 널리 계승되여 우리 나라 중세시기의 기본정치이념으로 되었으며 이후 정치사상사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0훈요에서 크게 주목되는것은 천년강국이였던 고구려를 본보기로 하여 나라를 강국으로 만들려는 왕건의 정치이상이 반영돼있는 것이다. 고구려 유민 출신인 왕건은 일찌기 고구려를 계승할 의지를 품고 건국후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하였으며 고구려의 삼국통일 정책을 계승하여 국토의 통일을 실현하였다. 그리고 10훈요에서 고구려를 본보기로 하여 나라를 강국으로 만들려는 자기의 정치적 의도와 구상을 피력하였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만대왕업의 기지로 삼을 데 대한 것이라든가 다른 나라의 문물제도를 기계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자기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살려나갈 것을 강조한 것, 국방을 강화할데 대한 견해, 동족의 나라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국으로 간주한 것 등은 고구려를 계승하여 나라를 강국으로 만들려는 왕건의 정치이상으로부터 제기된 것이었다. 왕건의 이러한 정치이상은 당시에 있어서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 역사와 전통을 귀중히 여기고 빛내이려는 애국적 지향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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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의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