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과 귀주(구주) 대첩 

안광획

(그림: 강감찬 삽화)


(사진: 강감찬이 태어난 장소로 알려진 서울 관악구 소재 낙성대)

강감찬(姜邯, 948~1031년)의 처음 이름은 은천(殷川)이며 금주(衿州)* 사람이다.

* 오늘날 서울특별시 금천구~관악구 일대. 관악구에 그가 태어난 낙성대(落星垈)가 있다.

그의 아버지 궁진(弓珍)은 태조를 도와 건국에 공을 세웠으므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되었다.

강감찬의 출생과 관련하여 이런 이야기가 전해온다. 외국의 어느 한 사신이 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올 무렵에 큰 별이 어떤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어 찾아본즉, 마침 그 집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었다. 이 말을 듣고 사신이 마음속으로 신기하게 여기고 그 아이를 데려다가 양육했는데 그가 바로 강감찬이였다고 한다. 강감찬이 재상이 된 후에 송나라 사신이 그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아래 자리로 물러나서 절하며 “문곡성(文曲星)*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더니 여기 와서 있구나.” 라고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 문곡성: 북두칠성의 네 번째 별인 메그레즈(Megrez)를 전통 천문학에서 이르는 말. 학문과 출세를 상징한다고 한다.

강감찬은 작고 용모도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신통한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강감찬은 성종 때에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벼슬이 여러 번 올라 예부시랑(禮部侍郎), 국자제주(國子祭酒),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중추사(中樞使),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강감찬은 1010년과 1018년 거란의 2차, 3차 침입 때 거란의 수십만 침략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수호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애국 명장이다.

강감찬이 상대로 한 적은 강한 기동력을 가진 기병이였다. 적들은 빠른 기동력을 이용하여 속전속결을 노렸다. 때문에 타격력이 강하였다. 이러한 적과의 싸움에서는 예봉(銳鋒, 기선)을 꺾어놓음으로써 적들이 의거하는 수단을 무력하게 만들어 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1010년과 1018년 두 차례의 반거란전쟁은 예봉을 꺾어 적의 기병을 소멸한 강감찬의 신묘한 전법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1010년 11월 16일 거란 임금 성종은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던 끝에 직접 40만의 침략군을 끌고 고려로 쳐들어왔다.

고려군은 적들의 침략 기도에 대처하여 적의 압록강 도하장을 틀어쥐고 배후를 위협하면서 통주(通州, 평북 선천군) 계선에서 결정적 타격을 주어 청천강 이북 지대에서 최종적으로 소멸하기로 계획하였다.

첫 전투는 고려의 관문 요새인 흥화진(興化鎭, 평북 의주군)에서 벌어졌다. 흥화진 방어자들은 도순검사 양규(楊規)의 지휘 밑에 용감히 싸워 성을 지켜냈다. 적들은 할 수 없이 성을 견제하여 퇴로를 보장할 목적으로 린주(麟州, 평북 의주군) 남쪽 무로대(의주군 남부)에 20만의 병력을 떨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계속 남하하는 적의 예봉을 꺾어놓기 위하여 고려군 총 지휘자 강조(康兆)는 창칼을 꽂아 만든 검차(劍車)라는 장애물을 일선에 배치해 놓았다. 그런데 강조는 첫 승리에 만족하여 전투지휘를 태공(怠攻, 소홀히 하다)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다.

적들은 통주 계선 방어진을 돌파하고 계속 남하하였다. 일부 대신들 속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강감찬만은 투항을 반대하였다.

“오늘의 사변을 발생시킨 죄는 강조에게 있으니 걱정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힘에 부친 전쟁이니 마땅히 적의 예봉을 피하였다가 천천히 회복할 방도를 강구합시다.”

이렇게 자기의 입장을 밝힌 강감찬은 왕에게 계책을 제기하였다. 우선 적들이 노리는 것은 임금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아내자는 것이므로 국왕과 고려 정부는 일시 피난하며 그 시간을 얻기 위하여 거짓으로 항복을 제의한다, 한편 청야전술로 적들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음으로써 적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게 한다, 요긴한 길목들을 막고 험한 지형에 의거하여 보루를 더 높이 쌓아 굳게 지킴으로써 적들의 예봉을 꺾고 퇴각하기를 기다려 추격전을 조직하여 섬멸한다. 강감찬의 제의는 국왕의 승인을 받았다.

고려 정부의 거짓 강화 제안에 접한 거란군은 어리둥절해져 주춤거렸다. 이미 적지 않은 손실을 당하였던지라 거의 모든 장수 속에서는 그에 만족하여 퇴군하자는 제의까지 나왔다.

이때 통주에서 고려군 주력을 격파하는데 ‘큰 기여’를 한 야률오질만(耶律烏叱萬?)은 “고려왕이 한번 싸움에 패하여 강화를 요구하니 이것은 계교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였다가 그들의 간계에 빠질 것이 두려우니 그 세력이 힘이 다하기를 기다려 굴복시켜 받아들이는 것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힘으로 굴복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적들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고려 정부는 개경을 떠나 일단 광주로 피난하였다.

거란 침략군은 1011년 1월 1일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을 점령하여 대묘, 궁궐, 민가들을 모조리 소각하며 약탈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적들은 고려군의 청야전술에 걸려들어 굶주림에 시달리고 추위에 허덕이게 되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고려군이 적들에게 타격을 주었다. 한편 적의 병영에 사신으로 간 하공진(河拱辰) 일행은 임금이 간 곳을 묻는 거란 추격부대에 강남으로 갔는데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 강남은 대단히 먼 곳이라 몇만 리나 되는지 모르겠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적들은 고려왕의 행적을 찾을 길 없는 데다가 피해 상황은 더욱 커져 할 수 없이 추격을 단념하고 돌아섰다.

개경에 침입하였던 적들은 11일 만에 총퇴각을 개시하였다. 적들이 패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정에 대하여 적측 기록(󰡔요사󰡕)에서는 “왕순(王詢, 고려 현종)은 과연 달아나고 청야전술로 얻는 것이 없는 데다가 그 군사들이 요지를 막고 험한데 의거하고 보루를 지키니 공격하였으나 항복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라고 전하고 있다.

고려의 군민들은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강력한 타격을 주었다. 고려군은 구주, 무로대, 리수, 여리참, 애전 등 싸움들에서 적 수만 명을 섬멸하였다. 거란군은 고려군의 여러 장수들의 강한 반격에 봉착하고 또 말과 낙타는 피로하고 병들었으며 군복과 병기를 다 잃어버렸으므로 압록강을 건너 퇴각하게 되었다. 이때 고려군은 적이 강을 반쯤 건널 때 후군을 맹렬히 추격하여 수많은 적을 물속에 처넣었다.

이처럼 강감찬이 내놓은 정확한 전술은 전쟁의 최후승리를 이룩하는 데서 결정적 작용을 하였다.

만일 비겁하고 무능한 대신들의 주장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투항하였다면 나라의 자주권을 고수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역사에 영원한 수치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당시 형편에서 강감찬이 내놓은 방책은 전쟁을 고려의 승리로 결속지을 수 있게 하였다.

강감찬은 1018년 거란의 제3차 침략을 물리치는 싸움도 직접 책임지고 승리로 이끌었다.

거란장수 소배압(蕭排押, 자 한은)이 10만의 정예기병을 끌고 고려를 침략한다는 소식을 접한 고려 정부는 1018년 12월에 급히 방어대책을 강구하였다. 이미 거란의 침략 위협에 대처하여 10월에 서북면(西北面, 평안도 일대)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파견되어 가 있던 평장사(平章事)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副元帥)로 하여 방어군이 편성되었다. 그들이 거느린 고려 방어군의 수는 20만 8,300명이었다.

강감찬은 영주(寧州, 평남 안주시)에 지휘부를 두고 관문 요새인 흥화진에까지 방어진을 폈다. 강감찬의 계획은 적의 정예기병의 예봉을 애초에 꺾어놓는 것이었다.

강감찬은 지세를 살펴보고 나서 흥화진 창고에 있는 소가죽을 있는 대로 다 가져오게 하여 긴 밧줄로 연결시켰다. 그리고 삼교천(三橋川) 상류의 한복판에 말뚝을 박고 그에 의지해 꿰맨 소가죽으로 물이 흐르지 못하게 막아놓았다.

‘소가죽 제방’에 의하여 물이 불어나기 시작했고 소가죽 제방 위에는 큰 저수지가 생겨났다.

한편 강을 따라 골짜기와 나무숲에 1만 2,000명의 기병을 매복시켰다.

1018년 12월 10일 드디어 거란장수 소배압의 지휘 하에 10만 명의 거란기병이 흥화진을 공격하여 왔다.

소배압이라는 자는 993년 거란군의 제1차 침략전쟁 당시 침략군 대장이었던 소손녕의 형이었다. 소배압은 1010년 거란군의 제2차 침략 때에 북부재상으로서 임금 성종을 따라 고려를 침략하였었다. 개경을 점령하고 크게 약탈하도록 한 자가 바로 이자였다. 제법 지략이 많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다고 자부하던 이자는 자기의 적수가 어떤 사람들인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놈들은 2차 침입 때 당한 수치를 어떻게 하나 만회하고 기어코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어리석은 망상을 하고 있었다. 전번 침입 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흥화진에서의 싸움을 피하고 곧바로 고려수도를 향하여 진격할 예정이었다. 거란군은 흥화진에 이르자 일시에 성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삼교천을 건너 앞으로 진격하여 나아갔다. 전투를 회피하려는 적들에게 전투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는 것도 중요한 전법에 속한다.

삼교천 하류는 거란 군사들의 외침 소리, 말 울음소리로 들끓었다. 강감찬은 적의 군사가 강 한복판에 들어섰을 때 일제히 소가죽 제방을 터뜨리게 하였다. 저수지처럼 고여있던 큰물이 일시에 밀려 내려오자 키를 넘는 물사태가 강 한복판에 들어섰던 거란 군사들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겨우 죽음을 면한 적들이 기슭에 올라 대오도 정비하기 전에 매복했던 1만 2,000명의 고려 기병이 놈들을 덮쳤다. 일제히 활을 쏜 다음 맹렬한 기세로 접근한 고려 기병의 칼날이 번뜩이는 곳마다 거란 기병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목이 뚝뚝 떨어졌다.

거란기병은 혼비백산하여 병장기들을 버린 채 도망치기에 급급하였다.

첫 전투에서의 승리는 거란기병의 예봉을 꺾어놓고 고려군이 싸움의 주도권을 쥐게 하는데 큰 작용을 하였다.

적장 소배압은 첫 전투에서 고려군의 수공전과 매복 공격에 걸려 패하자 자기들의 전통적인 전투 방법인 벌판에서의 결전을 회피하고 속전속결을 꾀하면서 평북 태천군-평북 녕변군-평남 개천 등 서북면 산간지대를 통과하여 곧바로 개경을 향해 쳐들어갔다.

돌변한 정세 하에서 강감찬은 곧 그에 맞는 전술을 세웠다. 그는 부원수 강민첨으로 하여금 1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다가 기회를 보아 적의 뒤를 엄습하도록 하였다.

보통 진격하는 군대의 후위는 전위보다 약한 것이 특징이다. 앞에 전투력이 강한 부대를 배치하여야 적의 저항을 분쇄하고 진격의 속도를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퇴각하는 군대의 후위에는 전위보다 강한 부대를 배치하는데 그래야 적의 추격을 막고 퇴각을 성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감찬은 이러한 점을 노리고 추격을 조직하였는데 그의 예측은 그대로 들어가 맞았다. 부원수 강민첨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적군을 추격하다가 자주 내구산(來口山, 평남 평성시)에서 적군의 뒤를 습격하여 수많은 적병을 살상하였다. 시랑 조원(趙元)이 거느리는 고려군도 평양을 에돌아 강동을 거쳐 개경에 가려는 거란 침략자들을 마탄(馬灘, 평양시 승호구역 봉도리)에서 맞받아 싸워 1만 명이나 살상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연속되는 타격에 소배압은 몹시 초조해졌다.

최후의 한판에 운명을 걸고 밑천을 깡그리 내대듯이 소배압은 황북 상원군, 황북 수안군을 거쳐 개경을 향하여 진격하는 최후의 발악을 감행하였다. 이때 적들의 기도를 미리 간파하고 세운 시기적절한 대책에 의하여 개경의 방비는 철통같이 강화되었다. 강감찬은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으로 하여금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행군하여 개경에 들어가 지키도록 하였으며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도 3,000여 명의 정병을 개경에 보냈다. 그리고 철저한 청야수성전술을 써서 개경 주위의 100리 안팎의 주민들을 성안에 옮기고 한 알의 낟알도 남겨두지 않게 하였으며 우물을 모조리 메워버렸다.

물 한 방울, 낟알 한 알, 말꼴 한 단 얻을 수 없게 된 적들은 극도로 피로하였으며 적장 소배압은 그만 공포에 떨었다. 소배압은 마지막 시도로 300명의 척후병을 금교역(개성시 개풍구역)에 파견하였으나 고려군의 야습을 받아 전멸되었다. 그 이상 더 견딜 수 없게 된 거란침략군은 마침내 총퇴각을 개시하였다.

적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개경 방어를 지원하던 병마판관 김종현의 부대는 곧 추격으로 넘어가 적들에게 쉴 짬을 주지 않고 놈들의 행군서열을 위협하면서 뒤꼬리를 바싹 물었다. 퇴각하는 거란군에 대한 첫 타격전은 연주(連州, 평남 개천)와 위주(渭州, 평북 녕변)사이에서 벌어졌다. 적들이 쫓겨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던 강감찬은 1월 23일 침략군을 불의에 기습하여 500여 명을 순식간에 소멸하였다.

강감찬은 방어군 주력을 구주(=귀주, 龜州, 평북 구성군) 계선에 집결시키고 철통같은 포위진을 쳤다. 적들은 고려군의 주력과 전투한 적이 아직 없었으므로 일정한 역량은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패하여 사기가 없어지고 고려군의 청야전술에 걸려들어 전투력이 심히 떨어진 상태였다.


(그림: 조선화 󰡔귀주(구주)대첩󰡕 상상도)

1019년 2월 1일 구주 벌판에서 거란침략군을 물리치는 대포위전이 벌어졌다. 싸움은 처음부터 치열하였다. 적들은 어떻게 하나 포위를 뚫으려고 그중 전투력이 강한 부대를 북쪽에 집중하였다. 막바지에 이른 적들도 기를 쓰며 출로를 열려고 하였다.

이때 김종현의 부대가 도착하여 합세하였다. 게다가 갑자기 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와 고려군의 사기는 더욱 고조되었. 고려군이 이 기세를 타서 맹렬히 공격하자 된타격을 받은 거란군은 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강감찬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들을 추격하게 하였다.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는 길 위에 적들의 시체가 널렸으며 생포한 인원과 노획한 말, 낙타, 갑옷과 투구, 병기 등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풍부한 지략과 용맹을 뽐내던 소배압은 갑옷을 벗어 던지고 엎드려 기어 달아났다.

적병으로서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옛 기록(󰡔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 의하면 “거란군은 지금까지 이렇게 비참한 패배를 당해 본 사례가 없었다.” 고 한다.

거란 왕은 이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소배압을 책망하였다.

“네가 적을 얕잡아보고 경솔하게 깊이 들어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낯으로 나를 대하려는가? 내 너의 얼굴 가죽을 벗긴 후에 죽이겠노라.”

소배압은 패전책임을 지고 파멸되었다.

70살의 백전노장 강감찬은 승전고를 울리며 개선하였다.

고려 임금 현종은 너무 기뻐 영파역(迎坡驛)에까지 마중 나가 개선 대오를 맞이하였다.

강감찬은 임금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우대’를 받았다. 그는 사망하기 전까지 여러 차례 높은 관작과 공신 칭호를 받으며 임금들의 총애를 독차지하였다.

그는 총애가 커지고 관작이 높아갈수록 더욱 자신을 다잡고 나랏일에 힘썼다. 그는 평상시에는 해지고 때 묻은 의복을 입고 있어서 누구나 그를 보통 사람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일단 엄숙한 태도로 조정에 나아가서 국사를 처리하며 국책을 결정하는 마당에서는 당당한 국가의 중신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당시에 풍년이 계속되고 백성들이 생활에 안착하여 나라가 평온한 것을 사람들은 강감찬의 공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강감찬은 벼슬을 내놓고 들어와서도 나라 방비를 근심하면서 수도에 성곽이 없으니 큰 외성을 축조하자고 건의하였다. 임금은 그 건의를 접수하여 왕가도(王可道)로 하여금 축조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벼슬을 내놓고 성 남쪽의 별장에서 살면서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을 저술하였다.

체모로 보면 자그마하고 볼품이 없었으나 나라와 겨레를 위해 후세에 길이 남을 큰 공적을 쌓은 강감찬, 강대한 적 기병의 전략전술적 특성과 약점을 옳게 파악한 데 기초하여 수공과 매복 습격, 추격, 청야전술 등 적의 예봉을 꺾어 격파하는 전략 전술로 두 차례의 전쟁을 승리로 결속 짓게 함으로써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지켜낸 그의 공적은 민족사에 자랑스럽게 새겨져 있다.

원문: 림호성, 「작고도 큰 사람 강감찬」, 󰡔단군민족의 명인들󰡕 1, 단군민족통일협의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