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심 속의 명처방

안광획

(사진: 옻나무 밭과 옻칠공예)

고구려의 만년군(萬年郡)*은 이웃 고을들과 더불어 나라의 옻나무 산지로 소문난 고장이었다.

* 만년군: 오늘날 평안북도 구성시 부근에 위치한 고을.

이 고을의 옻나무 진을 전업으로 뽑아내는 부곡에는 뚝쇠라는 별명을 가진 장년의 사나이가 있었다. 말이 별로 없고 성미도 아주 뚝한(무뚝뚝한) 그는 ‘뚝쇠’라는 별명을 그닥 싫어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여인들까지도 그를 가리켜 뚝쇠라고 내놓고(대놓고) 불렀다. 누구보다도 옻나무 밭을 잘 가꾸어서 질좋은 옻나무 진을 많이 거두는 그는 자기 일에 대한 긍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 세상에 옻나무 진이란 칠감이 없었다면 인간 생활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가구들이 얼마나 꼴불견이겠는가? 위로는 나랏님의 용상(龍床)으로부터 아래로는 여염집(閭閻, 일반 백성들의 집)의 밥상에 이르기까지 거울마냥 알른알른 얼굴이 비치는 옻칠을 하였기에 온갖 기물이 멋스럽고 또 오래오래 쓰이는 것이니 그 칠감을 얻어내는 일이야말로 천하지 않은 큰일이라고 내놓고 말할 수 있으렷다.

그런 마음을 간직했기에 그는 한없이 애착심이 우러나 누가 보건 말건, 알아주건 말건 옻나무밭을 직심스레(올곧게) 가꾸는 것이었다. 허나, 날이 감에 따라 한 가지 근심거리가 그를 괴롭혔다. 그것은 옻나무 때문에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었다.

옻나무 진을 거두는 일을 생업으로 하는 이 부곡에는 도처에 옻나무여서 그로 인한 피해가 적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옻나무밭을 가까이만 하여도 저절로 옻독이 오르고 옻나무 진을 거둘 때 조금만 실수해도 옻나무 진이 살가죽에 묻어 살이 부르터 오르면서 가려운 고생을 겪어야 했다. 그 때문에 이웃마을에 사는 친척들까지 이곳을 찾기 꺼려했다. 누구나 일단 옻독을 입으면 그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

옻독의 피해를 많이 입은 뚝쇠는 그 고생이 얼마나 심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얼굴이 온통 헐은 데 투성이가 되어 남을 대하기 민망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방이 가려워지고 그렇다고 긁으면 곪아 터지면서 자꾸만 퍼져나가니 세상에 이보다 더 심한 괴로움은 없는 것 같았다.

뚝쇠는 집사람들 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옻독의 피해를 당할 때면 그게 마치 자기의 고통처럼 여겨져 견디기 어려웠다.

어이하여 옻독의 피해를 미리 막는 명약은 없는지…

옻독을 다스리는 처방이라야 고작 닭고기 국물을 병든 살갗에 바르고 닭고기국을 먹는 것뿐인데, 닭이 어디에 흔해서 그냥 잡아 쓸 수 있단 말인가. 옻독의 피해를 막지는 못해도 줄이는 길은 옻나무 진을 받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어도 다른 사람들은 옻나무를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면 될 것이다. 뚝쇠는 즉시 자기네 옻나무밭을 돌아가며 가시울바자(가시 울타리)를 쳐 놓ᄋᆞᆻ다. 그렇게 했더니 마음이나마 한결 가벼웠다.

딴 고장들에서는 씨뿌림철이나 가을걷이 때가 가장 바쁘지만 여기 부곡에서는 여름철이 고양이 손발이라도 빌려 쓸 때였다. 해마나 여름이 오면 남정네들은 이른 새벽부터 옻나무밭에 들어가 다 자란 옻나무들의 밑동에 흠집을 내고 그 아래 항아리를 고여놓아 옻나무 진을 받아야 했다.

옻진을 받을 때 옻독을 막으려고 동백기름을 얼굴이며 손에 바른다지만 그렇다고 무사한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동백기름을 발랐지만 옻독이 심하게 퍼졌다. 값비싼 동백기름을 쓰지 않고서도 옻독을 막는 비방은 없겠는지… 이런 생각이 뚝쇠의 머리에서는 어느 한시도 떠날 줄 몰랐다.


(사진: 고구려 고분벽화의 소 그림들. 왼쪽: 덕흥리 고분의 소 그림, 오른쪽: 오회분 5호묘의 소의 머리를 한 농사의 신)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날도 옻나무밭에서 옻나무 진을 받으려던 뚝쇠는 와시락대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길을 들었다. 중소보다는 크고 엄지소보다는 작은 수소를 엇부룩이라고 하는데, 그놈은 옻나무 줄기에 등을 비벼대면서 용을 쓰는 것이었다.

“아이쿠, 저런 변 봤나.”

뚝쇠는 소리도 치고 흙덩이를 던져서야 겨우 그놈을 옻나무밭에서 쫓아낼 수 있었다. 엇부룩이를 끌어냈지만 옻독이 골칫거리였다. 소한테까지 잡아 먹일 닭이 있으리 만무했다.

근심 속에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데 하루가 지나고 여러 날이 흘렀지만 엇부룩이는 멀쩡했다. 엇부룩이의 등가죽에 옻나무 진이 진하게 묻었던데, 옻독을 타지 않다니…? 그렇다면 소란 짐승은 사람과 달리 옻독을 타지 않는 게 아닐까? 그렇겠다고 생각하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의문이 갈마들었다(떠올랐다). 소가 옻독을 타지 않으면, 그놈의 오줌이나 똥을 옻나무 진이 맥을 추지 못하게 하는 약으로 쓸 수는 없을까? 소똥이나 소 오줌을 약으로 쓴다는 것은 좀 불쾌한 일이지만 그게 진짜 옻독을 푼다면 꺼릴 바가 없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골몰하다 보니, 뚝쇠는 동백기름을 손에 바르는 것을 까맣게 잊고 옻나무 진을 받는 일을 하였다. 옻나무 진이 손에 묻어서야 그는 자기의 실수를 알아차리고 몸서리를 쳤다. “아이쿠, 지독한 고생을 또 겪게 되었구나.” 하고 한탄을 터치던(한탄을 하던) 뚝쇠는 문득 소똥이 생각났다.

“그렇지, 죽을 수가 닥치면 살 수가 생긴다는데 어디 소똥을 발라 봐야지.”

뚝쇠는 방금 싼 소똥을 찾아들었다. 여러 번이나 소똥으로 옻나무 진이 묻은 손을 문지르고서야 물로 깨끗이 씻었다. 옻나무 진이 묻었다는 생각 때문에서인지 손등이 좀 근질거렸지만 하루가 지났어도 아무런 탈이 없었다.

“아, 소똥이 옻독을 푸는 약이 옳긴 옳은가보다.”

며칠 후 공교롭게도 마을에 놀러 온 이웃마을의 아이가 옻나무 가지를 잘라 팽이채를 만들고 있었다. 뚝쇠는 즉시 그 아이의 손도 소똥으로 문질러 주었다. 했더니 그 아이도 아무런 탈이 없었다.

소똥이 옻나무 진의 독을 막는 명약임을 확신한 뚝쇠는 그 비방을 온 부곡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리하여 옻나무로 인한 피해가 훨씬 줄어들었고 그 비방은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원문: 전철호・리선복 외, 󰡔야담집 돈항아리󰡕, 평양출판사,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