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을 세운 건국시조는 단군이다

 

  • 기자명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새로 쓰는 고조선 역사](7) 단군 신화의 현대적 해석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계급국가 고조선을 세운 건국시조는 단군이다. 단군이란 존칭은 그 생존시기로부터 멀리 떨어진 후세에 우리 선조들이 한자를 쓰기 시작하면서 민족의 원시조를 가리키던 고유 우리말을 이두식으로 표시한 것이다. 따라서 檀君(단군)의 한자말 뜻으로 단군의 의미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잘못이다. 단군에서 단은 음을 취하고 군은 뜻을 취해 단군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단군이란 원래 우리말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을까?

단군의 명칭과 관련해 주목을 끄는 것은 <응제시주>에 인용된 <고기>에서 <환웅천왕>이라는 문구 뒤에 “桓(환)을 혹은 壇(단)이라고도 한다”고 한 주석기사이다. 이것은 환웅을 단웅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인데 실제로 환웅 뿐 아니라 환인도 단인으로 단군왕검은 환검으로 쓴 예가 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 볼 때 환과 단은 원래 같은 고유의 우리말을 한자로 옮길 때 서로 다른 한자를 쓴 것일 뿐이다. 여기에서 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말 ‘환하다’의 말 뿌리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단’과 ‘환’은 모두 밝다는 뜻을 담고 있는 우리 고유말을 이두식으로 표현한 것이며, 단군은 밝은(족) 임금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단군은 밝음을 뜻하는 우리말을 종족명으로 쓴 종족에서 추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것은 중국의 고대 역사서들에서 고조선 사람들을 가리킬 때 ‘부루’ ‘불’ ‘발’ ‘박’라고 칭했던 데서 잘 나타나고, 또 <관자>에서는 고조선을 가리킬 때 ‘발조선’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밝은 족의 나라 조선을 가리킨 것이다. 즉 고대 중국 사람들이 맥족 예족이라는 명칭을 쓰기 이전시기에 고조선 사람들을 가리킬 때 부루(박, 발, 불)를 썼는데, 이것들은 모두 밝음을 의미하는 말로서 단군의 단과 같은 뜻을 가졌다. 결론적으로 단군이라는 명칭은 밝은족 임금 또는 박달(배달)족 임금의 뜻을 갖고 있는 말이다. 여기에서 박달(배달)은 고대 고조선 말 부루다라/바라다라(여기에서 부루, 바라는 밝음, 불(태양)을 가리키는 말이며, 다라는 후세에 달로 발전했으며 뜻은 산을 가리키는 말이다)가 받침을 쓰거나 겹모음을 쓰던 시기에 와서 박달 또는 배달로 표현되었다.

이처럼 단군은 태양(밝음)을 숭배하는 종족명과 연관되어 밝은족 임금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단군조선의 건국자인 고조선의 첫 임금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출발했다. 그러나 현재 단군은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단군은 우선 고조선의 창건자, 즉 단군조선 첫번째 임금의 이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된다. 우리가 단군이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단군조선의 건국시조를 지칭한다. 하지만 단군은 이 뜻 외에도 우리나라 고대국가시대에 임금(왕)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도 사용되었다. 왕이라는 명칭이 우리나라에서 쓰인 것은 기원전 3~4세기경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왕이란 존재(권력자)가 없었는가? 그렇지 않다. 왕은 단군조선 건국 시기 이후에 줄곧 있었지만 왕이라는 명칭으로 호칭된 것이 아니라 단군이라는 명칭으로 호칭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군이라는 명칭은 왕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이기도 하다.

 

단군신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단군신화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에 관한 것이다. 신화의 주인공인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로서 높이 추앙받고 있다. 신화란 원래 당시의 현실 속에서 고대인들이 경험한 것을 토대로 신비적 요소가 덧붙여져 만들어진 사회적 의식형태의 하나이다. 신화가 형성된 과정을 대체로 살펴보면 처음에는 간단한 형태로 만들어지지만 후대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일부의 내용이 덧붙여지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면서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대체로 신화가 만들어진 시대는 당대이다. 고구려의 건국 설화가 만들어진 것은 고구려 시대였다는 것은 광개토태왕릉비문을 통해 밝혀졌다. 대부분 나라들의 건국신화는 건국시조의 위대성과 건국의 정당성을 고취하기 위해 당대 사람들에 의해 역사적 사실에 신비적인 요소를 덧붙여 만들어진다. 게다가 수천 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전해져 오는 과정에서 후세 사람들의 취미와 감정, 이해관계에 맞게 윤색 변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기 때문에 건국신화를 해석할 때 신비적 요소, 윤색 첨가된 측면만을 보고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허구적이며 종교적 미신적인 것으로만 치부해 버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반대로 건국 신화 전체를 마치 모두 사실인 양 받아들여, 신비적 요소나 윤색 첨가된 것들을 모두 사실이라고 내세우는 것도 역시 경계해야 한다. 신화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신화에서 신비적 요소, 윤색 첨가된 요소들과 역사적 사실들을 잘 가려내고, 신화 속에 담겨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경우 신화 속에서 매우 풍부한 역사적 사실들을 찾아낼 수 있으며, 사료가 부족한 고대 사회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깊게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일부 유학자들은 단군을 고려 때 중들이 만들어 낸 신화적 인물이라고 하였고(<동사강목> 단군외기), 일본의 역사가들은 13세기 몽골의 침입을 받게 된 고려 사람들이 자기 나라가 몽골보다 비할 바 없이 이른 태고옛적부터 강대하고 문명한 나라로 되어 있었다고 함으로서 민족의식 민족적 존엄을 고취하려고 만들어낸 설화적 인물이라고 보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일연의 <삼국유사> 편찬시기가 대몽항쟁기였다는 점,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인은 산스크리트어의 ‘제환인타라(提桓因陀羅:천제(天帝))’에서 차용한 말로 4세기 이후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나 나타날 수 있는 용어라는 점, 풍백 우사 운사 등도 도교적인 용어로서 고조선 시대의 신화에 들어갈 수 없는 용어라는 점이 주된 논거였다. 그들은 단군이란 선인왕검 또는 구려 평양선인으로 전해오던 평양지방의 수호신을 조선의 개국시조로 만든 것이라느니, 평양의 지방신과 묘향산의 산신을 결부시켜 만들어 낸 것이라느니 하면서 고려 중엽이전에는 단군이라는 칭호가 근본적으로 없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단군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단군조선을 평양주변지역에 존재했던 하나의 지방 소국으로 협소화시키려는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단군신화는 대몽항쟁기 이후가 아니라 단군조선 시기부터 우리 민족의 건국 신화로 창조되었고, 단군은 민족의 원시조로서 숭배되었다. 단군조선은 평양지방에 국한된 지방 소국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와 만주 연해주를 포괄하는 커다란 나라였다. 이는 단군조선의 영역을 가리키는 표지 유물인 비파형동검과 고인돌의 분포 영역을 통해 입증된다. 그리고 <제왕운기>에서 시라(신라), 고례(고구려), 남 북옥저(함경도와 연해주지역), 동 북부여, 예, 맥이 다 단군의 통치지역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후한서>예전에서 예, 구려, 옥저가 다 조선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단군조선이 민족의 원시조로서 단군조선 시기부터 숭배 받았다는 것은 주몽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주몽과 송양과의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그 설화에서 송양이 ‘나는 선인의 후손’이라고 내세운다. 이는 당시 단군이 선인으로 전 민족적 추앙을 받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다. 또한 고구려가 4~5세기경 단군릉을 고구려 무덤양식으로 개축한 것은 고구려에서도 단군이 전민족의 시조로서 숭앙되고 있었다는 확고한 물질적 자료로 된다. 이뿐 아니라 5세기경 고구려 무덤벽화인 각저총의 씨름벽화에는 단군신화를 모티브로 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씨름벽화를 보면 네 마리 새가 앉아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곰과 호랑이가 서로 등을 지고 앉아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여기에서 전통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새는 하늘과 인간세계를 연결하는 하늘의 전령사인데, 이런 새가 여러 마리 앉아 있는 큰 나무는 단군신화의 신단수이다. 신단수, 곰과 호랑이는 분명 단군신화를 그림으로 형상화해 놓은 것으로 고구려 시대에도 단군신화가 민간전승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단군신화를 형상화 해놓은 각저총 씨름 벽화

 

또한 발해시기에는 발해왕조 주도로 단군 봉장기년이라는 역사서를 간행했는데, 이는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높이 숭배하고 있었다는 구체적 사례이다. 고려 초에도 고려 왕조는 단군 사당을 지어놓고 제사를 지냈다. 이는 구월산의 단군사당이 처음 있었다는 사황봉아래에서 고구려 시기의 붉은 기와가 나왔고, 두 번째 사당자리가 있었다는 패엽사 앞의 단군대 근처에서 고려 초기에 해당하는 발해양식의 기와 막새가 나온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또 <성종실록>(권 15)3년 (1427년) 2월 계유일 조의 황해도 관찰사 이예의 보고 가운데 세 번 째 사당인 삼성당 아래 100여보 되는 곳에 있었던 기유룡단에서의 제사 의식 절차에 대해 1006년 (고려 목종 9년)에 작성한 문화현 소장의 문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사실을 봐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단군에 대한 제사를 고구려 시대에도 지냈고 이어서 고려 초기시대에도 지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단군은 단군조선이후 모든 왕조에서 민족의 시조로서 숭앙되었으며, 단군신화는 민족의 개국신화로서 단군조선 시기부터 전해져 온 것이다.

▲ 구월산 삼성사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신화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의 아들 환웅이 있어 자주 천하에 뜻을 두면서 인간세상을 몹시 바라고 있었는데, 환인은 이를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을 보니 인간에게 커다란 이익을 줄 것 같아 천부인 세 개를 주어서 내려보내 다스리게 했다.

① 웅이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바로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이다) 신단수 아래로 내려오니 이를 신시라 이르고 그를 환웅천왕이라고 일렀다. 풍백 우사 운사를 데리고 곡식과 생명, 병과 형벌, 선과 악을 맡아 인간살이의 360가지의 일을 주관하면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

② 때마침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한 굴에 같이 살면서 신인 웅에게 사람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늘 빌었다. 이 때 신이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걸 먹고 백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쉽사리 사람의 모양으로 될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곰은 그걸 얻어먹고 스무하루 동안 참아 곰은 여인의 몸으로 되었으나 범은 참지 못해 사람의 몸으로 되지 못했다. 곰 여인은 혼인할 자리가 없었으므로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애기를 배게 해달라고 빌었다. 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해 그와 혼인해 애기를 배게 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게 바로 단군왕검이다.

③ 당나라 요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이 되는 경인(당나라 요임금이 왕위에 오른 첫 해가 무진인즉 50년은 정사요 경인은 아니라. 확실한 여부가 의심스럽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하고 조선이라 칭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였는데 그곳을 또한 궁홀산(궁을 달리는 방이라고도 쓴다)이라고도 하고 금마달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1500년 동안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왕위에 오른 기묘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는데 나이는 1908살이었다고 한다. (괄호안의 것은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의 주석이다)

 

단군신화에 반영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들

단군신화 중에 환인의 아들 환웅을 인간 세상에 내려 보냈다는 내용의 것은 후세사람들에 의해 덧붙여진 것일 것이며, 마지막 부분 역시 후세에 첨가하거나 기존 신화내용에 끼어 넣은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신화가 창조되던 시기의 원형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신화원형은 구성상 ① 환웅신화 ② 단군의 출생신화 ③ 단군의 건국기사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환웅신화 부분을 보자. 이 부분 중에 덧붙여지거나 윤색한 부분을 빼고 나면,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기 이전 사회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단군이 건국하기 이전 사회는 원시군사민주주의 단계의 종족 연합에 기초한 군장사회이다. 아직까지 국가기구를 세우지는 못했지만, 원시적인 정치조직을 꾸리고, 원시 민주주의 방식으로 사회를 관리하던 사회상황을 비교적 잘 묘사하고 있다. 환웅은 태양신을 믿던 종족의 추장을 형상한 것이고, 그가 무리 3,000을 거느렸다는 것은 공동체 추장으로서 많은 수의 공동체 성원을 통솔하고 있었음으로 표현한 것이며, 그가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리었다는 것은 그가 태양신의 의사를 대변한 존재임을 말한 것이다. 신화에 나오는 풍백 우사 운사는 환웅이 거느린 씨족적 귀족들을 자연신으로 형상한 것이며, 그가 곡식 생명 병 형벌 선악 등 360가지 일을 주관하면서 세상을 다스렸다는 것은 공동체 추장으로서 공동체의 모든 일을 주관했음을 표현한 것이다. 당시 원시사회 말기 계급이 막 형성되면서 종족들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이 펼쳐지던 시기의 사회상황과 정치조직의 형태를 비교적 잘 표현하고 있다.

다음으로 단군 탄생신화를 살펴보자. 먼저 곰과 범이 한 굴에서 살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것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일부에서는 곰족과 범족이 있었는데, 곰족은 환웅의 태양족과 결합하고, 범족은 배제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한 굴에 살았다’는 의미를 놓치게 된다. ‘한 굴에 살았다’는 것은 하나의 종족을 이루고 살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곰만 사람으로 되었다’는 것은 이 종족에서 곰씨족이 지배적 지위에 있었음을 신화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또한 곰 여인이 환웅과 혼인하였다는 것은 곰씨족의 추장이 태양신을 숭배한 종족의 추장과 혼인한 사실을 그린 것이며, 또한 이 두 종족이 종족 연합을 형성했던 역사적 사실을 형상한 것이다.

끝으로 단군의 건국기사를 살펴보자. 단군의 건국기사는 사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단군이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사실대로 담아놓았다. 다만 건국연대를 요임금 시기로 해 놓은 것은 우리 선조들이 단군의 건국연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었던 조건에서 구전으로 전하는 연대를 중국역사에서 요임금 시기에 비교해서 우리 역사의 유구성을 내세우려고 한 것이다.

단군신화에 담겨있는 역사적 사실을 종합하면, 환웅시대는 농업중심사회, 종족연합사회, 원시 군사민주주의 단계의 군장사회였으며, 여기에서 사회성원들 사이에서 계급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 공동체 추장을 비롯한 씨족적 귀족들과 일반 공동체 성원으로 구분되어 있었다는 것,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에 대한 계급적 지배가 실현되던 원시말기사회라는 것을 잘 그려놓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회상황에서 단군이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통치를 했다는 것을 표현해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