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삼봉

 

안광획

 

사진: 윤원형과 정난정의 무덤. 경기도 파주시 당하동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

 

인종(仁宗, 재위 1544~1545)이 죽고 명종(明宗, 재위 1545~1567)이 왕이 되자,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尹元衡)이 득세하니 천하가 윤원형의 것이었다.  윤원형은 인종의 외삼촌 윤임(尹任)의 무리를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그 ‘공’으로 영의정까지 뛰어오른 윤원형은 살생을 마음대로 했고 치부욕에 환장이 되어 벼슬팔기를 업으로 삼았다.

 

사진: 누에고치

 

어느 날이었다. 한낮이 훨씬 기울어 저녁이 될까말까 하였는데 저 멀리 개성(開城)에서 어떤 사람 하나가 고치 5백 근을 뇌물로 섬겨 바쳤다.

  ‘뭐뭐? 고치 5백 근에 참봉벼슬을? 흥!’

잠시 쓴웃음을 짓던 윤원형은 스적스적 고치더미로 다가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였다.

  “아니?! 나리, 거기서 뭘 하시오?”

  “응? 응, 아무 것도 아니웨다. 고치가 쓸만 한가 해서…”

정림대감의 물음에 얼굴이 활딱 붉어진 윤원형은 기겁을 하듯 화다닥 놀라며 아닌보살(아닌 척)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달인가 한 번은 어떤 무사를 북도권관(北道權管)으로 임명해 주었더니 그가 임지에 가서 화살통(箭筒)을 예물로 보내온 적이 있었다.

 

사진: 조선시대 화살통 유물.

 

  “활을 배우지 않은 내가 화살통은 어따 쓰라는 거야!”

화가 난 윤원형은 화살통을 한구석에 내던졌다. 그런데, 그 후에 파면당한 그 무사가 와서 “나리, 앞서 제가 보낸 화살통을 보셨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응? 웬 화살통말이냐?”

윤원형이 의아해하며 도로 가져다 통 안을 쑤셨더니 값진 보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엉? 이게 뭐냐?!”

윤원형은 너무 기뻐 무사를 다시 먹을알있는* 큰 고을원으로 보내 주었다.

 

   * 먹을알있는: 큰 힘 들이지 않고 소득을 벌어들일 수 있는.

 

사진: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등장하는 윤원형(이덕화 분) 과 정난정(강수연 분). ⓒSBS

 

그때 일을 생각하던 윤원형은 혹시나 하여 고치더미를 슬그머니 헤집어 보던 중이었다. 그러나 고치더미에는 별다른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 입이 쓰거워난(써진) 윤원형은 곧 집으로 돌아와 애첩인 정난정(鄭蘭貞)과 의논하였다. 당시 원형의 정사(政事)는 그의 애첩 난정이 맡았다. 난정은 본시 노비 출신의 여자였는데, 원형의 눈에 들어 첩으로 들어와 본처를 밀어내고 지금은 버젓이 본처 행세를 하였다.

“예? 고치 5백 근에 참봉벼슬을요? 흥!”

돈과 재물이라면 원형을 찜쪄먹을 난정이가 그의 말에 낯이 새파래서 쏘았다.

“허, 그러게 말이다. 아무리 참봉벼슬이 낮기로서니 고치 5백 근이라니. 음음, 안 되고 말고.”

원형이 잠시 입이 쓰거워 쩝쩝 다시며 앉아 있느라니, 난정이 술상을 차려왔다. 찧거니 쫗거니 하며 한참 취흥에 들떠있는데, 난정이 살짝 원형의 무릎 위에 앉았다.

“아이 여보, 그렇지만 그것도 괜찮은가 봐요. 그까짓 참봉 하나 못 주겠어요? 호호!”

아마 그 사이 속구구(타산)을 해 본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한번 줘볼까?”

  “예, 그렇게 하지요!”

 

 

어느새 하하, 깔깔하며 웃던 난정이가 술에 잔뜩 취한 원형을 무릎 위에 뉘이고 곧 붓을 잡았다. 치마폭이 열두 폭이라 난정이가 붓을 잡고 뇌물을 하나하나 적느라면 원형이 이름과 요구하는 벼슬을 부르고, 또 난정이가 그것을 받아 적어 문서가 되면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원형과 남매 사이)과 명종왕을 거쳐 임명장이 되어 떨어지는 것이었다.

  “자, 어서 부르세요!”

  “응? 음음, 부르지… 껄!”

난정이가 고치 5백 근을 쓰고 다시 붓을 들었으나 난정이의 치마폭에 코가 잡힌 원형은 술에 잔뜩 취해 눈을 거슴츠레 뜨고 침을 흘리며 난정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아유, 답답해라. 고치, 고치말이예요!”

난정이는 화가 나서 원형의 그 치근거리는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그러자 “헤헤.” 하며 게걸침을 흘리던 원형이 “음, 그래? 그래. 고치, 고치, 흠, 참봉…” 하는 것이었다.

  “예? 고치참봉?!”

난정이는 그대로 문서에 ‘고치, 참봉’이라고 올렸다.

그러니 다음날 아침 ‘고치’리는 사람 앞으로 ‘참봉’ 직첩이 나왔다. 하여 조정에서는 ‘고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았으나 도무지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 이틀, 이렇게 며칠째 수소문하던 중 어느 먼 산골의 가난한 선비 하나가 이름이 ‘고치(高緻)’라는 것이 알려졌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그에게 ‘참봉’이라는 직첩을 주게 되었고 시골선비는 뜻밖에도 윤원형의 첩 정난정의 열두 폭 치맛바람에 횡재를 하여 참봉벼슬을 받게 되었다.

참으로 냉수에 이 부러질 일이었다.

 

 

그때부터 서울 장안에는 윤원형을 가리켜 ‘고치참봉’이라고 하였고, 이는 또한 윤원형의 별명이자 세도 양반 재상들의 전횡으로 혼란된 조선봉건왕조의 부패정사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었다.

 

원문:  강경순, 「고치참봉」,『야담집 돈항아리』, 평양출판사,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