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은 없었다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새로 쓰는 고조선 역사](9) 기자동래설은 허구적 상상의 산물

 

기자동래설이란 고대 중국 주나라 초기인 BC 1122년에 은나라 왕족 출신인 ‘기자’라는 인물이 주나라 무왕의 책봉을 받고 우리나라에 와서 나라를 세우고 조선을 문명개화하였다는 설이다. 사대주의에 물젖은 고려와 조선시대 지배층들은 기자동래설을 사실이라 믿고, 기자숭배 사상을 퍼뜨렸다. 과연 기자가 우리나라에 와서 중화문물을 전달했고, 그 결과 우리나라가 문명개화했는가? 기자동래설이 특히 문제로 되는 것은 최근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기자동래설을 근거로 고조선의 역사를 중국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동래설의 연원

 

기자동래설이 처음 나온 것은 기원전 3세기말~기원전 2세기 초 중국의 역사책인 <상서대전>이다. 이 책에서는 “무왕이 은나라를 이기자…. 기자가 갇힌 것을 풀어주었는데, 기자는 주나라가 석방해 준 것에 대해 참을 수 없다 하여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를 듣고 그 기회에 조선(후)로 그를 봉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그 후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에는 기자이야기가 없고, 송미자 세가에 “은나라 주(왕)가 음란한 짓을 하니 기자가 충고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그래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짓 미친 채 하고 종이 되었다. … 무왕이 은나라를 이긴 다음 기자를 방문했다. … 이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기자는 그의 신하로 되지 않았다”고 쓰여 있다. 이렇게 해서 기자동래설이 중국 땅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한나라의 역사학자인 반고(班固, AD 32~92))의 <한서>에서는 이를 더욱 윤색해 기자가 조선에 가서 ‘예의와 농사짓기, 누에치기, 천짜기를 가르쳐 주었다’고 까지 하였다. 후대에 올수록 중국의 역대 사가들은 기자동래설을 더욱 요란하게 각색했는데, 1607년에 중국 명나라 왕기가 편찬한 <삼재도회>에서는 기자가 수천명의 기술자들을 데리고 조선에 가서 조선을 문명한 나라로 만들어 주었다는 말까지 더 꾸며내어 써놓았으며, <위략> <삼국지>에서는 후조선 말기의 왕들을 기자의 후손이라고까지 했다.  

 

중화사상에 빠져있던 우리나라 역대 유학자들도 중국에서 어진 사람으로 유명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전조선(단군조선)을 뒤이은 후조선을 세우고 우리나라를 문명하게 해주었다고 믿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조차 했다. 사대주의 역사학자인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기자가 조선후로 책봉 받았다’고 했고,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도 단군조선 뒤에 기자가 와서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한편 고려왕실에서는 숙종7년(1102년)에 그의 무덤을 찾아내고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1325년 충숙왕 12년에는 기자사당을 세워 때때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 후 이조시기에 이르러 유교가 더욱 성행하면서 유학자들 속에서 기자 숭배사상이 더욱 고조됐다. 그들은 ‘기자지’ ‘기자실기’ ‘ 기전고’ 등 이른바 기자의 사적에 관련된 책들을 편찬했으며, ‘진단통기’와 같은 데서는 ‘기자’가 태어난 해, 조선에 온 해, 왕으로 있은 해수, 나이까지 상세히 꾸며대기까지 했다. 

 

중국 역사에서 기자란 어떤 인물이었는가?

 

중국 역사에서 기자는 은나라의 왕족으로 은나라 마지막 왕인 폭군 주왕의 친척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은나라 태사라는 관직에 있었는데, 은나라 주왕이 폭정을 행하는 것을 보고 간하다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 갇힌 기자는 거짓으로 미친 척 했는데, 이를 보고 주왕은 그를 노비로 삼았다. 1122년 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기자를 석방하고, 그를 신하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기자는 이를 거부하고 은둔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 기원전 1119년 주 무왕이 그를 초빙해 천도를 묻자 홍범구주(중국 상고(上古)시대에 하(夏)나라의 우(禹)왕이 요순(堯舜) 이래의 사상을 집대성(集大成)한 천지의 대법(大法)으로 알려진 정치 도덕의 기본적 아홉 법칙을 말한다.- 편집자 주. 위키백과)를 전해줬다고도 알려져 있다.

 

중국의 역사책에 기자가 처음 등장한 것은 처음 기자동래설이 적혀있는 <상서대전>이 아니다. 그 이전에 서술된 중국 책들에서도 기자이야기가 종종 나왔다. 하지만 <상서대전> 이전 중국 역사책들에서 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기자동래설이 처음 나온 <상서대전>이란 진나라 ~ 전한 초의 학자인 복승(伏勝,복생)이 <상서>에 주석과 본문을 추가한 유교 경전이다. 그런데 복승의 <상서대전>의 저본인 <상서>에서는 기자동래설은 일언반구도 언급돼 있지 않았다. <상서>는 우(虞)・하(夏)・상(商)・주(周) 시대의 중국 고대정치사를 공자가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편찬한 중국 최초의 역사서이다. 기자는 상말주초(商末周初)의 인물이므로 <기자>와 <기자조선>이 역사상 실재했다면, 이 중요한 정치적 사건은 당연히 공자의 <상서>에 반드시 수록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예상대로 공자의 <상서>에는 기자에 관한 기사가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자동래설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대신 주 무왕 13년에 주 무왕이 기자를 방문해 정치를 질문하자, 기자가 홍범구주를 상세히 강론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가 주 무왕 13년에 기자를 방문했다면, 주 무왕 원년에 기자를 조선후로 봉했다는 기자동래설은 성립될 수 없다. 

 

<논어> 미자 편에는 “은나라 주왕의 정신이 혼미해지고 포악무도해지자 미자는 그를 떠나버렸고, 기자는 그의 노예가 되었으며, 비간은 간언하다 죽임을 당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은나라에 세 사람의 인자가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또한 <죽서기년> 4권 ‘주기 무왕’조에는 ‘무왕 16년 기자가 조정에 들었다’는 기록이 적혀 있어, 주왕실과 내왕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시> 외전 3권 무 왕조에는 기자가 서주 영역 내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상서대전> 이전의 중국 역사책들에서는 기자동래설이 전혀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주왕실과 지속적으로 내왕이 있었던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리고 <관자>에서는 기원전 7세기 고조선을 가리켜 ‘발조선’이라고 명명했다. 만약 기자동래설이 사실이고 당시 고조선이 기자조선이었다면 ‘발조선’이라고 말하지 않고 ‘기자조선’이라고 했을 것이다. 

 

진(晉)나라의 두예(杜預 222년~284년)는 <사기집해> 송세가의 주석에서 “기자의 무덤이 양국 몽현에 있다(梁國蒙縣 有箕子塚)”고 밝혔는데, 양국 몽현은 오늘날 하남성 상구현에  있다. 청나라의 고증학자인 정은택 역시 <전국책> 지명고에서 기자는 양국 몽현에 봉을 받았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기자의 봉지에 관한 자료는 <좌전>(左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좌전> 희공 15년전에 나온 바에 따르면 기자는 당숙의 봉국이 장래 강대해질 것을 예견했다고 하는데, 만약 기자가 조선에 갔다면 당숙의 봉국(진秦)의 장래에 대해 예측하여 말하기 어렵다. 또한 춘추 좌씨전에 기(箕)에 관한 기록들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중국 내에서 봉지를 받은 것으로 나와 있다. 중국 측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기자라는 명칭이 기국(箕國)에서 유래된 것이며, 따라서 그 기자는 조선을 봉지로 받은 것이 아니라 양국 몽현을 봉지로 받았다가 나중에 산서경지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다. 

 

기자동래설의 허구성

 

기자동래설은 그 어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봉건시대  중국 역사학자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허구적 상상의 산물이다.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중화사상에 기초해서 주변나라 시조들을 자기 나라와 연관시켜 역사서에 기록해 놓는 관습이 있었다. 예컨대 <사기> 흉노열전에 보면 “흉노는 그 선조가 하후씨의 후손으로 순유라 한다” 고 써 놓아 마치 흉노족의 선조가 중국 하왕조 걸왕의 후손이듯이 써놓았다. 이처럼 흉노의 시조는 하나라 걸왕의 후손이고, 서융은 하나라 말기에 이주해간 사람들이며, 선비족의 조상은 유웅씨의 후손이고, 서강의 조상은 유우씨의 후손이며, 왜의 조상은 오나라 태백의 후손이라고 조작했다. 이처럼 중국 주변나라 사람들이 마치 중국에서 퍼져나간 종족이듯이 왜곡시켜 놓았다. 

 

기자 동래설도 이러한 중화적 사고에서 나온 역사적 왜곡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들이 역사서를 대할 때 이러한 점들을 잘 알고 비판적으로 대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양편향이 발생할 수 있다. 기존의 역사서에 오류와 의도적 왜곡이 있다 해서 역사서 자체를 배격하는 경향이 하나의 편향이라면, 또 다른 편향은 역사서 자체를 맹목적으로 신뢰하면서 절대시하는 경향이 또 다른 편향이다. 역사서는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사료이기 때문에 역사서를 대할 때 역사주의적 관점을 잘 세워서 양편향에 빠지지 않도록 비판적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기자가 조선에 온 적이 없다는 것은 이미 많이 밝혀졌다. 하지만 여전히 기자동래설을 사실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기 때문에 다시 종합적으로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첫째, 우선 ‘기자 무덤이 양국 몽현(오늘날 하남성 상구현)에 있다’고 한 진나라 두여의 말에 의해 증명된다. 이것은 기자동래설의 허구성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이다. 원래 기자라는 말은 기국의 자라는 뜻인데, 기국은 주나라로부터 봉지를 하사받은 제후국이다. 기자는 조선이 아니라 주나라 땅에 속하는 기국의 제후로서 살다가 거기서 죽었다. 그러므로 그의 무덤이 양국 몽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청대의 고증학자인 정은택은 춘추전국시대에 기箕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지만, 두여의 말과 같이 기자는 양국 몽현에 봉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기자는 주나라로부터 양국 몽현 (오늘날 하남성 상구현) 땅을 봉지로 하사받고 거기서 살다 죽었다고 고증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역사서들에는 기국에 관한 자료들이 많이 등장하며, 주무왕 16년에 주무왕을 알현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등 여러 역사자료로 볼 때 기자는 중국내에서 활동하다 죽은 인물임이 명확하다. 이처럼 기자는 은나라 말기에 실재한 사람으로 중국 관내에서 살다가 거기에서 생을 마쳤던 것이다.

 

3708_8033_534.jpg
▲ 기자묘. 현 산동성 서남부에 있는 하택시 조현에 남아 있는 기자묘

 

기자가 조선에 온 적이 없다는 것은 소위 평양의 기자묘의 발굴로서도 입증된다. 기자묘라고 주장하는 평양 모란봉의 기자묘를 해방이후 발굴해 봤지만, 벽돌조각과 사기조각밖에 나오지 않아 가짜 묘라는 것이 드러났다. 또 <상서대전> 이전의 중국의 역사서들에서는 기자에 대한 많은 언급이 있었지만 기자가 조선에 갔다는 기록은 전혀 나온바 없다는 것으로 볼 때에도 기자동래설은 허구이다. 만약 기자동래설이 사실이라면 <상서대전> 이전 역사책들에서 공자가 중국의 삼대성인이라고 칭송한 기자의 조선행을 기록해 놓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천 역시 기자동래설을 확신하지 못해, <사기> 조선 열전에서는 기자동래설을 써 놓지 않고 단지 송미자 세가에서만 간단히 거론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청나라 고증학자 최술은 <상고신론>이라는 책에서 ‘사기의 본기와 세기의 기자에 관한 기록이 모순이 있기 때문에 사마천이 정견이 없었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사마천 자신도 기자에 관한 구체적 자료를 갖지 못한 채 오로지 떠도는 전설을 아무런 고증 없이 받아 문 것에 불과하다. 

 

둘째, 기자가 조선에 온 적이 없다는 것은 한반도 서북지방에 은나라(말기까지의) 문화유물이 전혀 나온 적이 없고, 요동지방에도 거의 나온 것이 없다는 것으로도 입증된다. 기자가 조선에 와서 기자조선을 세웠다면 분명히 유적 유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수많은 유적 유물이 발굴됐지만 기자동래설을 입증할만한 유적 유물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요서지방에 기자조선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도 은나라 유적 유물이 하나의 문화종태를 이룬 일관 유물로 나온 적이 없다. 그와는 반대로 비파형동검 등 조선적 성격의 유적유물들이 집중적으로 발굴되었을 뿐이다. 기자는 공자가 칭송한 중국의 성인이고, 중국적 성격의 문화의 대변자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 무왕은 그에게 통치의 원칙을 물었고, 홍범구주를 알려줬다. 이처럼 그는 중국문화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러한 그가 조선에 왔다면 조선에서 은나라 주나라의 문화를 상징하는 유적유물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러한 유적 유물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기자동래설이 허구적인 것이라는 것을 반증해준다.  

 

셋째, 기자가 조선에 왔다든가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것은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보더라도 있을 수 없다. 기원전 12~기원전 11세기라면 후조선이 강대한 나라로 성장해 자기의 영역을 급속히 확장해 대릉하 난하의 중류구역까지 심지어는 난하의 하류지역까지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에 주나라는 아직 황하 중류의 중원지방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국제정세로 볼 때 고조선은 주나라보다 영토의 크기나 문명의 발달수준에 비춰볼 때 훨씬 더 큰 강대국이었다. 이런 상황에 주 무왕이 자기 나라도 아닌 고조선 땅에 가서 왕 노릇을 하라고 책봉했다던가 또 기자 자신이 스스로 와서 임금 노릇을 했다든가 하는 것은 완전히 상식을 벗어난 꾸며낸 허구에 불과하다.  

 

기자동래설의 배경과 교훈

 

이처럼 허무맹랑한 기자동래설이 왜 나오게 되었을까? 기자동래설이 처음 등장한 것은 <상서대전>인데, 이 책은 중국 최초의 역사서로 평가되는 <상서>에 주석과 경전을 추가한 유교경전이다. 기자 동래설은 <상서>에는 원래 없었는데, 진한시기 학자였던 복승(복생)이 <상서대전>을 쓸 때 원본에 없던 내용을 추가하면서 기자동래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왜 복승은 원본에도 없던 허황된 기자동래설을 조작해냈을까? 당시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왕조를 수립하던 때였다. 중화주의에 물든 중국 지식인들과 지배세력들의 시야에는 고조선이 눈에 가시였다. 중국 왕조는 원래 황하 중하류지역에서 시작해서 끊임없이 동진하면서 전국시대를 끝내고 국토를 통일했다. 그런데 그들의 전진 앞에는 동쪽나라 고조선이 딱 가로막고 있어서 더 이상 국토를 확장할 수 없었다. 이 시대 중국의 지배세력과 지식인들 사이에는 구한말의 정한론처럼 고조선을 차지하려는 야망이 싹텄다. 이러한 야망에 휩싸여 고조선 침략의 정치적 구실을 만들려고 기자동래설을 조작해냈다.  

 

이처럼 고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전 공작 차원에서 만들어진 기자동래설이 그처럼 확대되게 된 데는 사대주의에 오염된 우리나라 역대 역사학자들과 유학자들 탓이 크다. 고려이후 이조시대까지 사대주의에 빠져 있었던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황당무계한 기자동래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 각종 허구를 만들어 냈다. 사대주의에 물들면 머저리가 된다는 말처럼 아무런 근거도 없는 황당무계한 기자동래설을 금과옥조로 받들고, 없는 기자묘까지 가짜로 만들어 숭배하는 머저리 짓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해댔다. 참으로 부끄럽고 어처구니없다. 기자동래설은 일제가 조작해낸 임나일본부처럼 고대시기에 발생한 대표적인 역사왜곡 사건이며, 우리 내부의 사대주의와 외세의존사상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