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취려 

안광획

 

(그림: 김취려 장군 영정)

김취려(金就礪, ?~1234년)는 언양(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사람으로서 아버지 김부(金富)는 예부시랑 벼슬을 하였다. 음직(蔭職)*으로 벼슬길에 올라 정위로부터 동궁위를 거쳐 여러 번 승급되었다. 후에 장군으로 임명되어 동북 지역을 관리하였으며 이어 대장군으로 등용되었다. 그 후 변경 요새지대를 관리하였는데 변경주민들이 그를 존경하였다고 한다.

* 음직: 고려시대에 과거가 아니라 아버지의 관직에 따라 자식이 관직에 등용되던 제도. 음서제(蔭敍制)라고도 한다.

그는 키가 여섯 자 반이나 되는 장신이었으며 수염이 길어 배를 지났으므로 예복을 입을 때에는 반드시 시녀 두 명으로 하여금 수염을 좌우로 갈라 들게 한 후에 띠를 매곤 하였다. 그의 명성은 거란 유종(遺種, 나머지 무리)의 침략을 물리치는 전투 과정을 통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진: 몽골을 통일하고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에 나선 징기스칸)

1206년 오논(Онон) 강 유역의 유목 귀족의 아들인 테무진(Боржигин Тэмүжин, 鐵木眞, =징기스칸(Чингис хаан, 成吉思汗))이 몽골국가를 세우고 북부 중국을 점령하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급속히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1211년 금나라의 북변 천호였던 거란인 야율유가(耶律留哥)는 반란을 일으키고 거란족을 규합하여 1213년에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웠다.


(지도: 13세기 초엽 동북아시아의 정세)

10여만의 대군을 가지고 있던 야율유가는 같은 해 12월에 포선만노(蒲鮮萬奴)가 거느린 금나라의 토벌군을 쳐부수었다. 이어 다시 토벌하러 온 금나라의 좌부원수 이라도의 10만 군사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농안(農安, 길림성 농안시)으로부터 함평(咸平, 오늘날 요녕성 개원시)으로 옮겼다.

한편 야율유가에 의하여 격파된 포선만노는 금나라를 배반하고 1215년 10월에 동경(東京, 요녕성 요양)을 차지하고 ‘대진국(大眞國)’을 세웠다.

그 후 거란 귀족 내에서 발생한 권력다툼에 의하여 야율유가는 정권을 빼앗기고 징기스칸에게 투항하였다. 이어 야율유가는 몽골군대를 끌고 와서 대요수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9만 명에 달하는 대요수국의 거란 유민들은 류가가 끌고 온 몽골 군대에 쫓겨 압록강 북쪽에까지 밀려 내려 왔다.

이때 거란인들은 감국 걸노(乞奴)와 행 원수 아아(鵝兒)가 지휘하고 있었다. 이들은 토벌을 피하여 1216년에 굶주린 맹수처럼 고려 땅으로 기어들었는데 목적은 식량을 약탈하여 주린 배를 채우고 그다음은 고려의 땅 어느 한 모퉁이를 강점하고 살자는 것이었다. 거란인들의 침입 때문에 고려는 일부 영토를 강점당할 엄중한 정세 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인민들은 애써 수확한 열매를 송두리째 빼앗기게 되었다.

이때 고려는 거란인들이 침습했다는 급보를 받고 상장군 노원순(盧元純)을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상장군 오응부(吳應夫)를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로, 대장군 김취려를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로 하는 3군을 편성하여 서북면(西北面, 평안도 지방)으로 출동시켰다.

(사진: 평북 녕변군에 소재한 녕변성 남문. ‘옛 연주성문(古延州城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3군은 조양진(朝陽鎭, 평북 개천시), 연주(延州, 평북 녕변군), 구주(龜州, 평북 구성군) 등지에서 여러 차례 싸워 침략군에게 큰 참패를 안겼다. 그러자 적들은 그 이상 분산 작전을 하지 못하고 개평역(開平驛, 평북 녕변시)에 병력을 집중하였다. 하여 고려군 주력은 더 전진하지 못하게 되었다. 우군은 서산 기슭에 자리 잡고 중군은 평지에서 적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약간 퇴각하여 독산(獨山)에 주둔하였다.

불리한 형세를 만회하지 않으면 완전히 피동에 빠질 위험이 조성될 수도 있었다. 적의 포위망은 시시각각 좁혀지고 있었다. 이때 김취려는 결연히 칼을 빼 들고 말에 올라 장군 기존성과 함께 적들 속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겁에 질린 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포위망은 헝클어지게 되었다. 그 기세로 적을 추격하여 개평역을 지나자 역 북쪽에 매복하였던 적들이 내달아 중군을 맹렬히 공격해왔다.

김취려는 군사를 이끌고 재빨리 반돌격으로 넘어가 적들을 물리쳤다. 이 개평역 전투의 승리는 무비의 용감성으로 포위망을 뚫고 주동을 쟁취한 다음 그것을 확고히 견지한 결과에 이룩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중군병마사 노원순은 중군이 적들의 공격을 받은 것에 겁을 먹고 소극적인 전투방책을 김취려에게 제기하였다.

“적은 다수에 우리는 소수일 뿐 아니라 우군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형편이며, 출발할 때 3일분의 군량밖에 가지지 못한 것을 이미 다 소비하였으니 연주성(개천)으로 후퇴하여 후방의 원조를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것은 애써 쟁취한 주동을 다시 잃는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김취려는 그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

“아군이 여러 번 승리하여 투지가 오히려 왕성하니 한 번 더 싸운 후에 다시 의논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적들은 묵장 벌판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아직은 기세가 왕성하였다. 김취려가 장수 문비(文備)와 함께 적진을 가로 잘라놓으니 돌진하는 곳마다 적병들이 쓰러졌으며 세 번 싸워 세 번 다 이기는 큰 승리를 달성하였다.

그런데 이 격전에서 김취려의 맏아들이 애석하게도 전사하였다. 그러나 김취려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김취려는 부대를 거느리고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수천 명의 적을 살상하였다. 급해 맞은 적들은 부녀들과 아이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고려군이 연주를 지날 때에 적의 후속부대가 또 우리 국경안으로 들어온다는 정보를 듣고 전군과 중군은 먼저 박주(博州, 평북 박천시)로 돌아가고 김취려는 치중(輜重, 식량과 마초)부대를 보위하면서 천천히 행군하였다. 사현포(沙峴浦)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적군이 습격해왔다. 김취려가 중군과 전군에 급보로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그들은 자기 안전만을 생각하여 구원하지 않았다.

김취려는 홀로 힘껏 싸워서 적을 물리치고 끝내 수송부대를 보호하여 박주에 이르렀다. 노원순은 서문 밖에까지 나와 영접하면서 “갑자기 강적을 만났는데 적의 기세를 꺾었으므로 짐을 운반하는 병사들을 자그마한 손실도 없게 하였으니 이것은 당신의 힘이다.”라고 치하하고 마상에서 술을 부어 축배를 들었다.

양군의 장병들과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모두 절하며 인사를 드렸다.

“이번 적의 강점지에서 강적과 맞서 싸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개평, 묵장, 향산, 원림의 여러 전투에서 후군이 매번 선봉으로 싸웠으며 적은 병력으로 매번 대군을 격파하여 우리 같은 사람의 생명을 보존케 하여주니 그 은덕에 보답할 길이 없어 오직 장군께 축수를 드릴 뿐입니다.”

1217년 2월 3만 명의 거란군이 장성을 넘어 정주(定州, 정평) 계선으로 쳐들어왔다. 이때 김취려는 금오위(金吾衛) 상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고려 정부는 5군을 편성하여 적을 막게 하였으나 안주 태조탄(太祖灘)에서 패하여 물러섰다. 김취려는 형세를 역전시켜보려고 문비, 인겸(仁謙) 등 장수들과 함께 칼을 휘두르며 용감히 싸웠다. 하지만 인겸은 전사하고 김취려는 심한 부상을 입게 되었다.

다시 조직된 5군이 전과가 없게 되자 무신집권자 최충헌(崔忠獻)은 최원세(崔元世)대신 김취려를 전군병마사로 임명할 것을 제의하였다. 하여 김취려는 부상당한 몸이 추릴 사이 없이 다시 전장에 나섰다.

고려의 전군과 우군은 양근, 지평에서 적군과 여러 번 싸워 승리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고려군이 황려현(黃驪縣, 경기도 여주시) 법천사(法泉寺)까지 적을 추격하고 독점으로 옮겨 유숙할 때 중군병마사 최원세는 김취려에게 “내일 행군할 길이 두 갈래인데 어느 편으로 가야 하겠소?”라고 물었다. 김취려는 “군대를 나누어서 좌우의 팔과 같이 서로 호응하면서 행군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라고 대답해주었다.

고려군은 김취려의 제의대로 두 갈래 길로 행군하여 맥곡에서 양군이 합세하여 적과 싸워 300여 명을 살상하고 제주의 개울가까지 추격하였다. 이때 적의 시체가 개울물을 덮으며 내려갔다고 한다.

분산과 집중으로 적을 소멸한 이 전투는 김취려의 군사적 재능을 잘 보여주었다.

이후 중군병마사 최원세는 김취려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꼭 그와 협의하여 군사를 쓰곤 하였다.

(사진: 충북 제천시에 소재한 박달재 전투 전적비와 김취려 장군 동상)

3일 후 고려군은 적을 추격하여 박달고개(박달재, 충북 제천시 소재) 에 이르렀다. 이때 동남도 가발병마사(加發兵馬)使인 대장군 임보(任輔)도 증원병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였다.

중군병마사 최원세는 두루 지형을 돌아보고 나서 김취려에게 자기 의견을 제기하였다.

“영마루터기(고개 중턱)는 대군이 머무를 곳이 못 되니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어떻소?”

김취려가 반대하였다. “전술상으로 보면 인심의 단결이 귀중한 것은 물론이나 지형의 유리함도 경시할 수 없소이다. 만약 적들이 먼저 이 고개를 점령하고 우리가 그 밑에 있게 되면 아무리 원숭이같이 민첩한 군대라도 통과할 수 없을 것이어늘 하물며 인간으로서 어떻게 통과하겠소이까.”

그리하여 고려군은 영마루에서 숙영하게 되였다. 이튿날 동틀 무렵에 적군이 고개 남쪽으로 진출하여 먼저 수 만명의 병력을 나누어 고개 좌우 고지로 올라오면서 그 고지를 점령하려고 하였다.

김취려가 장군 신덕위(申德威), 이극인(李克仁)으로 하여금 좌측을 담당하고 최준문(崔俊文), 주공예(周公裔)로 하여금 우측을 담당하게 하며 자신은 중간에서 북을 울리면서 지휘하니 군사들은 유리한 고지에 의거하여 결사적으로 싸웠다.

고려군이 적들을 내려다보고 함성을 지르면서 앞을 다투어 돌격하니 적군은 크게 패하여 노약자들과 부녀들, 병기와 수송기재 등을 내버리고 모두 도망쳤다. 적들은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남으로 진공할 계획을 포기하고 모두 동쪽으로 달아났다.

박달령 전투 승리를 계기로 김취려의 위신과 신망은 더욱 높아졌다. 부하들과 병졸들은 항상 전투지휘를 옳게 하여 승리에로 이끌어주는 그의 지휘를 받으려고 원하였다. 승리한 기세로 적을 추격하여 명주(溟州, 강원도 강릉시) 대관령에 이르니 적들은 이미 함주(咸州, 함남 함흥시)를 거쳐 여진 지역으로 도망친 뒤였다.

김취려는 방어 주력을 거느리고 흥원진(興原鎭)으로 옮겨가서 주둔하였다. 그러던 중 예주 주천에서 갑자기 병에 걸렸으므로 부하들이 후방에 가서 치료하기를 권하였다. 하지만 김취려는 결연히 반대하였다.

“차라리 변경의 귀신이 될지언정 어찌 집안에서 편안히 있기를 원하겠는가!”

이 말을 들은 부하들과 병졸들은 김취려의 높은 애국심과 헌신성에 탄복하였다.


(그림: 조선후기 지도에 표시된 강동성)

천리장성 밖으로 도망쳤던 거란 침략자들은 1217년 11월에 또다시 떼를 지어 고려에 기어들었다. 고려 정부는 수 사공 조충(趙沖)을 서북면 원수로, 김취려를 병마사로 하여 5군을 편성하였다. 고려군은 파괴와 약탈을 일삼는 무리들에게 곡주(谷州, 황북 곡산군), 숙주(肅州, 평남 숙천군) 등지에서 여러 차례 타격을 주었다. 급해 맞은 적 주력은 강동성으로 밀려들었다. 고려군도 거란군을 치기 위해 강동성(江東城, 평양시 강동군)을 포위하고 성밖에 진을 쳤다.

이 해 12월 몽골군 1만 명과 동진군 2만 명이 거란군을 친다는 구실 밑에 강동성으로 달려들었다. 새로 쳐들어온 위험한 세력인 몽골군과 동진국 군대들이 거란 침략군을 격멸한 후 어떻게 나오겠는가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김취려는 몽골, 동진군 장수와의 관계에서 먼저 주동을 쟁취하여 그들의 군대를 거란 침략군을 격멸하는 데 효과적으로 이용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래야만 거란군을 손쉽게 격멸할 뿐 아니라 작전이 끝난 후 몽골과 동진국 군대를 곧 물러가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몽골군 장수 합진(呤眞)은 앞으로 고려군과 협동작전 문제를 토의할 장수를 보내달라는 것과 함께 군량을 요구하였다. 누구든 고려 측 대표로 몽골 진영으로 가야만 했으나 횡포한 몽골군영으로 가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김취려는 조충에게 “나라의 중대사를 놓고 사양하지 않는 것이 신하 된 자의 도리라고 할 수 있소이다. 제가 가서 그 일을 맡아 하겠소이다.”라고 제기하였다. 조충은 그의 애국심과 헌신성에 감동하였으나 군사실무에 밝은 그를 위험한 곳에 선뜻 보낼 수 없었다. 그것은 고려군의 운명과도 관계되는 문제였던 것이다.

“군중의 모든 일을 공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공이 가면 어찌하오?”

하지만 김취려의 결심을 돌려세울 수 없었다.

이듬해에 김취려는 지병마사(知兵馬事)인 한광연(韓光衍)을 비롯한 10명의 장군과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몽골 진영으로 갔다. 그가 도착하자 몽골장수 합진은 영문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그를 맞이했다.

“귀국이 우리와 동맹을 맺으려면 먼저 몽골 임금(=칸(汗))에게 절하고 다음은 동진국 임금에게 절해야 하오.”

“하늘엔 태양이 두개 있지 않고 백성에겐 두 임금이 없는 법인데 어찌 두 임금이 있을 수 있겠소.”

김취려의 도도하고 사리정연한 주장 앞에 말문이 막힌데다가 김취려 장군의 장대한 몸매, 위엄있는 긴 수염, 불이 이는 듯한 눈길에 위압되어 합진은 그 이상 부당한 요구를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긴장한 분위기는 풀리고 협동작전 문제는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합진은 김취려의 인품에 끌리고 자기보다 10살 이상이나 위인 것을 알고는 형님으로 깍듯이 존대하였다.

며칠 후 고려군 원수 조충이 찾아왔는데 그가 김취려의 상급일 뿐 아니라 그보다 나이가 우이라는 말을 듣고 합진은 그를 큰형님으로 대우하였다. 당시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파멸시키거나 복종시키는 법만을 알고 있던 몽골 장수에게 이와 같은 충격적인 일이 생겨난 것은 역사적으로 고려가 침략자를 물리친 강한 나라로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김취려의 늠름한 기상과 위엄있는 태도에 압도당하였기 때문이다.

1219년 1월 강동성을 탈취하는 협동작전은 성과적으로 실현되어 드디어 5만 명의 거란군은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였다. 고려군은 그 우두머리 100여 명의 목을 자르고 나머지는 고려 땅에 남아서 살게 하였는데 거란인들이 모여 사는 곳을 ‘거란장(契丹場)’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김취려는 거란 침략자와의 싸움에서 시종 주동을 틀어쥐고 싸웠기에 승리를 이룩할 수 있었다.

1219년 10월 의주 별장 한순(韓恂), 낭장 다지(多智) 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고려봉건정부에서는 추밀원(樞密院) 부사 이극서(李克敍)로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이적유(李迪儒)로 후군을, 김취려로 하여금 우군을 거느리고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다음 해에는 김취려를 추밀원 부사로 임명하고 이극서와 교체하여 중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바빠 맞은 한순 등은 금나라의 우가하(亏哥下)에게 투항하였다. 우가하는 한순, 다지 두 명을 유인하여 죽인 후 그들의 머리를 고려 수도로 보내왔다.

3군의 장수들은 당시 역적들의 반란에 가담한 여러 성들에 대하여 죄를 줄 것을 정부에 요청하였다. 이때 김취려는 그 요청을 반대하였다.

“옛날 책에 이르기를 ‘그 괴수를 섬멸하거든 협박에 의하여 가담한 자는 죄주지 말라!’고 하였다. 대군이 이르는 곳에는 요원의 불길과 같아서(燎原如火) 죄 없는 백성들도 재난을 많이 당하고 있거늘 하물며 거란의 침략으로 인하여 관동(關東, 강원도)지방이 폐허로 되였는데 이제 또 우리 군대를 내놓아 나라의 울타리인 변방의 성을 허물어 버리는 것이 옳은가? 나머지 사람들은 일체 죄를 묻지 말라!” 그리고 관리들을 의주로 파견하여 피난민들을 안착시키게 하였다.

이처럼 김취려는 적을, 원수를 많이 만들지 않는 것이 나라를 무사하게 하며 승리할 수 있는 방책으로 됨을 잘 알고 있는 장수였다.

김취려가 거란 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싸우던 시기는 가장 곤란한 때였다. 고려 의무병제의 와해로 군사의 징집이 매우 어려운 데다가 그때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무신집권자 최충헌은 자신의 신변과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정예한 군사들은 모두 자기 사병부대(=삼별초(三別抄))에 넣고 이 부대는 전선에 출동시키지도 않고 있었다.

이러한 때 장수로 된 김취려는 검소하고 또 정직하며 충절과 의리를 신조로 삼았으며 군대를 통솔함에 있어서는 명령이 엄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군사들이 인민들의 재물을 침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술이 생기면 잔을 가져다가 병졸들과 함께 골고루 나누어 마셨기 때문에 병사들은 그의 명령이라면 목숨을 걸고 집행했던 것이다. 김취려는 또한 강동전투에서의 공로를 다 조충에게 넘겨주었다.

그리하여 김취려는 장병들의 신망을 얻을 수 있었으며 이것이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비결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그는 전쟁터에 나서서 적군과 싸울 때는 신기한 전술을 많이 써서 큰 공을 이루었지만 한 번도 그런 공적을 자랑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김취려는 그 후 추밀원사(樞密院使), 병부상서(兵部尙書), 참지정사(參知政事), 문하시중(門下侍中) 등 고위 관직을 지냈다. 그는 재상으로 된 후에는 정직하게 하부를 통솔하였으므로 부하들이 감히 그를 기만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원문: 「많은 공을 세우고도 자랑할 줄 모른 김취려」, 림호성, 󰡔단군민족의 명인들󰡕, 단군민족통일협의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