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문서를 불사른 김윤후

안광획

(그림: 김윤후를 소재로 한 북의 그림책 <적장을 쏜 중>(조선출판물수출입사, 2004) 표지)

전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 인민대중이다. 생사를 판가름하는 싸움에서 인민대중의 무궁무진한 힘을 조직동원 할 줄 아는 장수만이 참된 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승려 출신의 김윤후(金允侯), 바로 그는 그런 장수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생존연대와 가문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그가 고려 23대 국왕 고종 때 사람으로서 일찍이 승려가 되어 백현원(白峴院)이라는 자그마한 절에 있었다는 기록만이 있다.

당시 고려는 세계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위세를 떨치던 몽골의 거듭되는 침입을 물리치며 나라의 주권을 사수하기 위한 가열찬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사진: 강화도 고려궁지)

1232년 7월 고려봉건정부는 수도를 개경(開京)으로부터 강화도(江華島)로 옮겼다. 이것은 해전에는 무능한 몽골침략군의 약점을 이용하여 수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고려 정부가 강화도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몽골 임금 우구데이(Өгэдэй хаан)는 1232년 8월에 살리타이(撒禮塔)를 시켜 다시 고려를 침략하게 하였다. 살리타이는 몽골침략군을 끌고 압록강을 건너서자 곧바로 개경에 덤벼들었다.

당시 개경에는 유수병마사(留守兵馬使)가 거느리는 수천 명의 관군과 노비들을 비롯하여 강화도에 들어가지 못한 인민들이 남아있었다. 개경의 군민들은 포위 공격하는 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성을 끝까지 지켜냈다.

살리타이는 개경을 점령하고 이어 강화도를 점령하려던 초기의 침략계획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계속 밀고 내려갔다. 그러던 중 살리타이는 광주성(廣州城)* 군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광주성 군민들은 완강한 방어를 하다가 기회만 있으면 성 밖으로 나가 몽골군을 기습하기도 하였다.

* 오늘날 경기도 광주시.

침략을 단념하지 않은 살리타이는 계속 남하하여 처인성(處仁城)*에 이르렀다. 처인성은 수주에 속하였던 부곡으로서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일반 군, 현의 양인보다 더한 천대를 받았다. 처인성 인민들은 침략자가 쳐들어오자 자발적으로 대오를 편성하여 용감히 싸웠다.

(그림: 처인성 전투를 묘사한 민족기록화)

* 오늘날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살리타이는 자그마한 처인성을 깔보고 접어들었으나 처인성 인민들의 완강한 항거에 의하여 성이 쉽게 함락될 수 없음을 깨닫고 성 밖 산중에서 잠시 휴식하기로 하였다.

백현원에 있던 김윤후는 몽골침략자들이 쳐들어오자 잠시 처인성으로 피난하였다. 항상 원수들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을 간직하고 무술을 익히고 병서를 터득해온 그는 처인성의 군민들과 함께 싸우며 어떻게 하면 적장 살리타이를 쏴 죽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아무리 흉포한 몽골침략군이라고 해도 적장이 없고 보면 대가리 없는 뱀이 될 것은 불 보듯 명백하였다.

그러나 좀처럼 기회가 차례지지 않았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적장 살리타이는 부하 3~4명을 데리고 성을 향해 천천히 말을 몰아오고 있었다. 싸움터에서 일생을 보내면서 야전, 공성전을 수다하게(무수히) 겪어본 살리타이는 도대체 이 자그마한 성이 무엇을 가지고 대군과 맞서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살리타이는 성에 다가와 토성을 살폈다.

김윤후는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이거야말로 하늘이 주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김윤후는 성가퀴에 몸을 숨기고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곧바로 살리타이의 얼굴에 박혔다. 살리타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나떨어졌다. 천만뜻밖에 지휘자를 잃은 몽골군은 갈팡질팡하다가 황급히 침략군을 거두어 가지고 본국으로 내빼고 말았다.

1232년 몽골침략군을 물리친 공로는 승려 김윤후의 것이었다. 봉건정부는 그에게 무관 가운데서 가장 높은 벼슬인 상장군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투할 때에 나는 활이나 화살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어떻게 귀한 상을 받겠소이까.” 하며 극구 사양하였다.

고려에 침공하여 항복을 받아내려던 몽골침략자들의 목적은 이번에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몽골통치배들은 그 후에도 고려를 정복하기 위하여 침공을 계속하였다. 1235년에 적장 당고(唐古)의 지휘 아래 제3차 침입을, 1247년 적장 아모간(阿母侃)의 인솔하에 제4차 침입을, 1253년 적장 야굴(也窟)의 지휘하에 제5차 침입을, 1254~1255년 적장 자랄타이(車羅大)의 지휘 아래 제6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포악한 침략군의 말발굽이 닿는 모든 곳이 잿더미로 변하고 육지의 인민들은 싸우다 죽고 굶어서 죽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빚어지고 있을 때 무신집권자 최우(崔瑀)는 인민들의 항전을 조직하지 않고 부화방탕한 생활만을 일삼았다.

엄혹한 시련 속에서도 고려인민들의 항전은 계속되었다. 고려 인민들은 국가적인 방어군이 편성되지 않은 극히 불리한 조건에서도 수십, 수백 명에 지나지 않는 적은 인원으로 맹렬한 습격전을 벌여 몽골침략군을 타격하였으며 상호 연계도 없는 고립무원한 형편에서도 수많은 산성(山城)에 의거하여 침략군을 타격하였다.

(사진: 충주산성)

그 대표적인 전투가 충주성(忠州城) 방어 전투였다. 1253년 10월 적장 야굴은 침략군의 주력을 거느리고 충주산성을 포위하였다.

이때 충주산성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되어 산성 방어를 책임진 장수는 몽골군의 2차 침략 때 적장 살리타이를 쏘아죽인 김윤후였다. 충주성 군민들은 용기백배하여 그의 지휘 밑에 충주성을 고수하기 위한 싸움에 한 사람같이 일어섰다. 적장 살리타이를 쏘아죽인 명장의 지휘 밑에 싸운다는 긍지가 군민들의 사기를 크게 고무하였던 것이다.

충주성 군민들은 적 주력의 포위공격을 70여 일 동안이나 물리치면서 용감히 싸웠다. 하지만 성안에는 식량이 거의나 떨어진 상태였다.

김윤후의 근심은 컸다. 이 성을 지키지 못한다면 성내 군민들은 몽땅 도륙당할 것이었다. 이미 몽골침략군은 여러 지역을 침략하면서 저들에게 완강히 저항한 성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살육전을 감행하였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성을 잃으면 피해를 당할 것은 비단 충주성 사람들 뿐이 아니었다. 놈들의 발길이 미치는 곳마다 수많은 우리 사람들이 억울하게 숨지고 약탈을 당할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믿을 것은 대중밖에 없었다. 병사들만이 아니라 관노를 포함하여 성안의 모든 인민들을 투쟁으로 불러일으켜야 하였다. 그는 이미 성이 위험에 처하자 팔을 부르걷고 달려 나와 용맹을 떨치던 노비들을 보며 느낀 바가 컸었다.

그들을 더욱 분발시키자면… 김윤후의 눈길은 관노의 명부에서 멎었다. 위험한 일이다. 죽음도 각오해야 할 위험한 일이었다. 수백 년 동안 내려오는 노비제도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었다. 정부가 월권행위를 한 그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김윤후는 도리머리 하였다. 성을 지키고 백성을 살리며 나라를 보존할 수만 있다면 내 한목숨이 무엇이랴.

김윤후는 결심하였다. 그는 곧 군인들과 노비들을 모이게 하였다.

“모두 내 말을 들으라. 누구든지 힘을 다 바쳐 싸우는 사람에게는 귀천의 차별이 없이 벼슬과 작위를 줄 것이다. 너희들은 내 말을 의심하지 말라!”

김윤후는 손에 들었던 관노(官奴)*를 등록한 명부를 불에 태웠다.

* 관가에 속한 노비.

그것을 목격하고서야 누군들 김윤후의 말을 믿지 않으랴.

모여선 군중의 가슴은 격정으로 설렜다. 특히 노비들이 받은 충격은 누구보다 컸다.

김윤후는 또 노획한 소와 말들을 나누어 주었다. 대중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그림: 충주성 전투를 묘사한 민족기록화)

온 성이 한 덩어리가 되어 결사의 각오를 가지고 침략자와 맞서 싸웠다.

몽골침략군은 충주성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충주성은 고수되고 남방 인민들은 침략의 위험을 가시게 되었다.

충주성 방어 전투의 승리, 이것은 전적으로 성안의 군민대중 특히는 자유를 갈망하는 노비들과 같은 천민들이 결사적으로 싸운 결과였다.

바로 노비문서를 불살라 대중의 투쟁 열의를 더욱 고조시킴으로써 성을 지켜낸 김윤후야말로 재능있는 군사가였다.

고려봉건정부는 위기일발의 순간에 최후의 결심으로 최상의 성과를 이룩한 김윤후의 공적을 평가하여 감문위(監門衛) 상장군의 벼슬을 주었다. 그리고 기타 군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관노와 백정(白丁)*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공로에 따라 벼슬을 주었다.

* 자기 소유의 경작지가 적거나 없어서 평시에는 군인으로 되지 못하고 유사시에만 군인으로 되는 농민.

그후 김윤후는 동북면(東北面, 오늘날 함경도 일대) 병마사를 거쳐 수사공(守司空) 우복야(右僕射)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었다.

이처럼 김윤후는 적의 2차 침입 때는 적장 살리타이를 쏘아죽이고 5차 침입 때는 노비문서를 불사르는 용단을 내려 대중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적들의 두 차례의 침입을 격퇴하는데 크게 기여한 민족의 장한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