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 동아시아 최초 고대국가

[새로 쓰는 고조선 역사](6) 단군조선의 성립, 기원전 30세기 초

 

지구상에서 첫 고대국가들이 성립된 것은 대체로 기원전 30세기를 전후로 한 시기이다. 인류는 이 시기에 야만시대를 끝내고 고대 문명을 창조하면서 역사시대로 접어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기원전 30세기 초에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인 단군조선이 건국되었다. 하지만 사대주의 역사관을 탈피하지 못했던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는 단군신화를 단순한 신화에 불과하다고 보았으며, 단군조선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북한학계 역시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단군조선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고 고조선은 기껏해야 기원전 10세기경에 성립되었다고 주장했었다. 북한의 역사학계는 단군릉 발굴이후 이러한 견해를 수정해 단군조선이 기원전 30세기 초에 건국되었다고 인정했지만, 이남의 역사학계는 단군릉 발굴성과를 부인하면서 단군조선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재야 역사학계와 첨예한 갈등관계를 겪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단군조선의 존재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단군조선이 기원전 30세기 초에 건국되었다는 것을 밝히려면 단순히 단군릉에서 발굴된 유골 감정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연대측정결과의 과학성을 담보할 수 있는 다양한 보충근거들이 요청된다.



물론 권위 있는 역사서들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고 왕릉급 무덤에서 발굴된 유골을 연대 측정한 결과 5천 년 전의 것이라면, 그것은 단군의 유골이라고 확정할 수밖에 없다. 또 과학적인 방식에 의해 연대 측정한 결과 단군의 출생연대가 5011±263(1993년 기준)이라면 단군조선의 건국은 기원전 30세기 초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 단군조선의 건국연대를 확증하기보다 다양한 유적 유물들을 토대로 단군조선의 건국연대를 확증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고 설득력이 있다.





유적 유물로 본 단군조선의 건국 시기



단군 유골의 연대 측정치가 스모킹 건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고조선의 건국 시기를 확정할 수 없다. 고조선의 건국시기가 기원전 30세기 초라는 것을 확정하려면 당시의 사회발전단계를 종합적으로 분석 평가해 고대 국가 성립의 사회역사적 전제가 충분히 숙성되었다는 것도 밝혀야 한다. 또한 고대국가 체제의 성립을 보여줄 수 있는 유적 유물적 증거들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로는 신석기 농업혁명을 통한 잉여생산물의 증대와 사회적 분업과 계급 발생을 보여주는 유적 유물, 청동기 시대 도래를 보여주는 유적 유물, 노예제사회를 보여주는 유적 유물, 고대 국가 체제 성립을 확증해 주는 고대 성곽의 존재 등등이 이에 해당된다.



먼저 고대 국가 체제의 성립을 확증해 줄 수 있는 유력한 증거는 고대 성곽의 존재 유무이다. 성곽은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국가적 방어시설로서, 성곽 축조에 들어가는 막대한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권력이 없이는 축성될 수 없다. 이것은 원시시대에는 필요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곽 축조에 필요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힘)도 없었기 때문에 고대국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가의 존재유무를 확증해 주는 매우 위력적인 증거이다. 평양근처에서는 최근 단군조선이 기원전 30세기 초에 건국되었다는 것을 입증해 줄 수 있는 고대 성곽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평양시 강동구 남강구에 있는 황대성, 대성구역 청암동 토성 아래성, 남포시 온천군 성현리 토성 아래성,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 토성 아래성 등은 기원전 30세기 초에 평양일대에 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을 명백히 실증해준다. 특히 청암동 토성 아래성을 중심으로 100여리를 사이에 두고 동 서 남 요충지 마다 성곽이 축조돼 있었다는 것은 바로 여기에 고대국가의 수도가 있었음을 실증해준다. 여기에서 아래성이라고 표현된 것들은 고구려 성곽의 아래쪽에 단군조선의 성곽 유적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성들을 살펴보면 단군조선 시기의 성곽위에 고구려 시대의 성곽이 축조되었기 때문에 과거에는 단순히 고구려 성곽으로만 알려졌었다. 그런데 단군릉 발굴이후 단군조선 시기의 유적 유물들을 찾는 과정에서 고구려 성곽의 아래 층에 단군조선 시기의 성곽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할 성은 평양시 강동구 남강구에 있는 황대성이다. 황대성의 성벽은 강돌로 성심을 쌓고 거기에 흙은 씌운 토석혼축 형식의 성으로 현재 300m 정도만 남아 있다. 이 성이 주목되는 것은 성의 축조시기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성터에서는 2기의 고인돌 무덤과 1기의 돌관무덤, 1개의 배수 시설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고인돌 무덤 1기가 동쪽 성벽 위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인돌 무덤의 연대를 알면 자연히 성벽의 축조시기를 알 수 있다. 성벽위에 있던 고인돌 무덤은 오덕형 고인돌 무덤인데, 황대성이 축조되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만들어진 무덤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연대를 알 수 있는 직접적인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 고인돌 무덤과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된 돌관무덤에서 유물이 나와 연대 측정한 결과 4795±215(1993년 기준) 전의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기원전 28세기에 해당된다. 황대성이 폐성된 훨씬 후에 조성된 무덤의 연대가 기원전 28세기에 해당된다면 황대성의 축조연대는 기원전 30세기 전후로 될 것이다. 이는 단군조선이 기원전 30세기 초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실증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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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대성



또 앞에 글에서 언급했던 용산리 순장 무덤 역시 단군조선이 기원전 30세기 초에 건국되었다는 것을 실증해 주는 유력한 물질적 증거로 된다. 용산리 순장무덤은 그 당시 사회발전 단계를 보여주는 유력한 유적이다. 최초의 고대국가는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계급지배의 도구로서 등장한다. 그러므로 사회가 계급 사회로 진입했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순장무덤은 고대 국가 성립의 역사적 전제가 무르익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증적 자료로 된다. 용산리 순장무덤은 30여명의 노예를 순장한 무덤으로 무덤 조성 시기는 기원전 31세기, 즉 단군조선 건국 직전 시기이다. 당시에 30여명의 노예를 생매장할 수 있는 권력과 재부를 가진 노예주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이미 고대 국가 성립의 전제조건들이 모두 충족되었다는 것을 웅변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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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남도 상원군 장리 고인돌



평양과 그 주변일대에서 발견된 여러 유형의 고인돌 무덤들도 주목해야 한다. 고인돌 무덤은 청동기 시대에 출현한 단군조선의 고유한 묘제이다. 고인돌 무덤, 비파형 동검, 팽이그릇과 미송리형 토기 등이 단군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유적 유물들인데, 그중 고인돌 무덤은 계급사회의 존재를 입증해 주는 물질적 자료이다. 평양일대에서 발굴된 고인돌 무덤들은 기원전 30세기 초에 국가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보여주는 물질적 증거들이다. 평양일대에는 왕릉급 특대형 고인돌 무덤을 비롯해 1만 4000기에 이르는 고인돌 무덤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중에는 기원전 3000년기 전반기로 편년되는 침촌형 3,4형식, 오덕형 1형식, 묵방형 1형식 고인돌 무덤들이 많이 조사됐다. 특히 기원전 3000년기 초엽에 이르러 규모가 큰 오덕형 고인돌 무덤이 새롭게 출현하면서 특대형 고인돌 무덤들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기원전 30세기 초 단군조선이 건국된 이후 많은 재부와 권력을 가진 지배계급들이 많이 생겨났다는 것을 실증해주는 사례로 된다. 그중에서 상원군 장리 1호 고인돌 무덤의 규모를 보면 뚜껑돌은 길이 6.3m, 너비 4.05m, 두께 72cm이고, 무덤칸의 크기는 길이 2m 너비 1.5m 높이1.8m이다. 이 무덤에서는 청동 2인 교예 장식품(1개), 청동방울(2개), 청동끌(1개), 돌 활촉 (44개), 미송리형 단지등 질그릇 조각이 나왔는데, 뚜껑돌의 무게는 100t이상으로 추산된다. 또한 기원전 3000년기 전반기에 해당되는 황해북도 신평군 선암리와 황해남도 봉천군 대아리 돌관무덤에서나온 비파형동검, 기원전 3000년기 중말엽에 해당되는 평양 호남리 표대유적 집터와 상원군 용곡리 5호 고인돌 무덤, 평안남도 덕천시 남양리유적 집터에서 나온 비파형 창끝은 전투전용의 금속제 무기들이며, 이것들은 당시 사회가 계급국가 시대였다는 것을 실증해준다. 그밖에 기원전 30세기 초의 대동강 유역 30여개소의 부락터 유적들과 기원전 3000년기 전반기에 단군을 숭배행사를 진행했던 제사터인 평양시 화성동제단을 비롯한 제단시설들이 기원전 30세기 초에 단군조선이 국가적 성격을 띠고 존재했다는 사실을 실증해 준다.





문헌기록들로 본 단군조선의 건국연대



우리나라 옛 문헌기록들은 대체로 단군기년을 기원전 2333년으로 보는 견해들이 다수이다. 단군에 의한 단군조선 건국시기에 대해 서술된 가장 오래된 역사자료는 <삼국유사> <제왕운기>인데, 두 기록 모두 중국 요임금과 결부시켜 기술해 놓았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에는 요임금(당요)과 같은 해, <고기>에서는 요임금 즉위 50년(경인년)으로 되어 있으며, <제왕운기>에서는 요임금과 나란히 무진년에 나라를 세웠다고 밝혀놓았다. 이후 대다수의 역사자료들은 이러한 견해와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주목할 점이 있다. 거의 대다수 역사자료에서 단군의 건국기년을 무진년으로 기록해 놓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건국연대를 다양한 자료들에 의해 다양하지만, 건국기년의 간지만은 모두 일치한다는 것은 그것이 독자적인 고유한 전승으로 전해져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삼국유사에서 보면 단군조선은 1500년간 존속하다가 주무왕이 즉위한 기묘년(기원전 1122년)에 기자가 조선에 왔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단군조선의 건국기년은 기원전 27세기가 된다.



기원전 30세기 초에 단군조선이 건국되었음을 시사해 주는 문헌기록들도 많다. 수산 이종휘(1731~1786년)는 자기의 문집인 수산집에서 단군조선의 존속기간 1508년 설을 주장하면서 단군은 중국으로 말하면 복희씨, 신농씨(대략 기원전 30~29세기)와 같은 시대의 인물이라고 추측했다. 또 홍만종(1643년~1726년)의 <해동이적>에서도 역시 단군은 1508년간 통치했다고 하면서 단군은 복희씨와 비슷한 시기의 사람이라고 했다. 18세기 실학자 황윤석(1729~1791년)은 단군왕조 은 무정 8년설을 소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단군조선이 2800년간 존속했다는 전승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만조선이 성립된 기원전 194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 시기 2800년간이나 단군이 통치한 고조선 국가가 존재했다고 전한 것이다. 이것은 단군이 30세기 초에 나라를 세웠다고 본 것이다.





단군조선 건국의 역사적 의의



단군유골에 대한 연대 측정결과, 평양일대의 유적 유물자료, 역사기록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단군조선은 동아시아에서는 최초로 기원적 30세기 초에 건국되었다. 이웃나라 중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자기나라 최초의 고대 국가를 하나라로 보고, 그 건국연대를 기원전 21세기(기원전 2070년)로 보고 있다. 이처럼 동아시아 다른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신석기 시대의 원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이 땅에 살고 있었던 우리의 선조들은 청동기 문화를 창조하고, 계급사회로 전진해 나가면서, 국가시대 역사시대의 문을 활짝 열었던 것이다.



단군은 지금으로부터 5000여년전에 평양지역의 강동 땅에서 태어났다. 단군이 출생하던 무렵 평양지역에는 태양신을 숭배하던 종족이 동물을 신성한 존재로 믿고 있던 종족을 통합해 하나의 종족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 종족 연합체의 추장이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었다. 환웅은 이웃 종족의 우두머리의 딸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단군이었다. 이것이 단군신화의 골자이다. 단군신화는 신화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그 속에는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이 담겨 있다.



단군이 출생하던 당시 사회는 원시시대 말기로서 이미 계급 분화가 진행되어 계급적 모순이 발생 심화되어 가던 대 혼란의 시기(종족 전쟁의 시대)였으며, 군사적 민주주의가 지배하던 사회였다. 이러한 시기에 종족 연합체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한 단군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추장이 된 후 원시적인 정치기구들을 점차 계급간 종족간 대립을 억제하고 지배계급의 지배를 원활하게 보장하기 위한 계급 지배의 권력기구로 개편해 나갔다. 그리고 이를 발전시켜 기원전 30세기 초 우리나라 최초의 계급지배 도구로서 국가권력의 탄생을 선포하고,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니, 이것이 바로 단군조선이다.



단군조선의 건국연대가 기원전 30세기 초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지대하다. 무엇보다도 단군조선은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였다는 점이다. 이는 한반도 고대 문명의 유구성과 독창성을 입증해준다. 고대문명의 시대는 국가시대와 함께 시작된다. 우리 선조들은 동아시아의 첫 고대국가를 세우면서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원시상태에서 벗어나 고대문명 시대를 열어나갔다. 이러한 점에서 한반도 문명과 중국문명 상호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세울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한반도 문명보다 중국 문명이 앞섰으며, 중국 문명의 직간접적 영향 하에서 한반도 문명이 싹트고 탄생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단군조선의 건국 연대가 중국 하나라의 건국연대 보다 8~10세기 앞섰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한반도 문명은 중국 문명의 영향 하에서 싹트고 탄생된 것이 아니라 우리겨레 스스로의 힘으로 독창적으로 창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석기 문화, 청동기 문화, 철기 문화를 비롯해, 생활방식과 풍습, 예의 도덕 등 모든 면에서 우리의 선조들의 지혜와 힘으로 독창적으로 창조한 자주 문화라는 것이다. 단순히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단군조선의 건국은 우리나라 역사발전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성립은 아직 원시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변지역(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 커다란 영향을 줌으로서 이 지역의 고대 문명 탄생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단군조선의 성립은 또한 단군을 원시조로 하는 우리 민족 형성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미가 있다. 민족의 형성에서 국가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다. 국가의 적극적인 작용과 역할에 의해서만 민족 형성의 기본 징표들인 혈연과 언어, 문화와 지역의 공통성이 형성될 수 있으며, 족(겨레, 에트노스)이 민족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 우리 민족의 경우 단군조선의 성립, 발전과 더불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던 우리 선조들의 대부분이 하나의 국가 통치 밑에 포괄되게 되었으며, 또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는 과정에 고대 우리겨레 속에서 혈연과 언어, 문화의 공통성이 더욱 확고해 지면서 하나의 단일민족으로 발전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