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잎도 약으로

안광획

 

(사진: 남한산성 남문)

 

  임진조국전쟁(임진왜란)이 끝난 지도 긴 세월이 흐른 어느 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있은 일이다. 남한산성의 군사들 속에는 특별히 ‘송도내기’가고 불리는 젊은 군졸이 있었다. 수백 명의 군사들 속에서 송도(松都, 개성)에서 온 군졸이 여러 명이나 되었지만, 그만이 유독 ‘송도내기’라 불리게 된 것은 그가 쩍하면(걸핏하면) “우리 송도에서는…” 하고 서두를 떼는 까닭에 그런 별명이 붙게 된 것이었다.

  송도 자랑이 입에 붙은 ‘송도내기’한테 추위가 닥치자 한 가지 불쾌한 일이 생겼다. 남들보다 몸이 든든하다고 자처해온 그한테 병치고도 아주 고약한 병이 생긴 것이었다. 그때문에 누구보다도 화포를 배우는 교련에 열성이던 그가 군교(軍交, 교관)들한테서 ‘굼벵이’라는 모욕까지 받는 정도였다.

  그런 모욕을 받을 때면 ‘송도내기’는 울화가 치받쳐 자기를 저주했다. 하필 골라골라 남 보이기 창피스러운 병에 걸려 가지고 이런 수치를 당할 건 뭐람. 자칫하다가는 창피스러운 그 병 때문에 집으로 쫓겨갈 수도 있었다. 전복(전투복)을 벗기고 고향으로 쫓겨가는 자기를 그려 보느라니 기가 막혔다. 

 

(사진: 조선시대 화포 발사체 대장군전(大將軍箭)을 시범 발사하는 장면)

 

  ‘송도내기’가 굳이 화포를 배우려 하는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임진조국전쟁 때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이끈 조선 수군의 포수였는데 여러 차례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위력한 화포로써 숱한 왜적선을 불태운 군공자였다. 

  그의 아버지도 포수였다. 관군의 포수였던 아버지는 몇 해 전에 안주성(安州城)을 지켜 싸웠다. 그때 안주성에는 화포가 몇 문 밖에 안됐지만 그의 아버지와 군사들이 어찌나 명포수였던지 오랑캐군이 그 불벼락 앞에 넋을 잃었다. 

  안주성을 지켜 화포를 쏘다가 화약이 떨어지니 창을 꼬나들고 최후의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셨다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송도내기’를 크게 격동시켰다. 나도 아버지처럼 화포를 배워가지고 나라를 지켜 싸우는 명포수가 될 테다. 이런 꿈을 가졌기에 관가에 찾아가 화포가 많은 남한산성의 군사로 자청한 것인데 이곳에 온 지 반년도 안 되어 고약한 병에 걸렸으니 기가 막힐만도 하였다.

  그동안 병을 고쳐보려 애쓴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얼굴이 붉어지는 ‘송도내기’였다. 글쎄, 나이 스물이 되도록 멀쩡했던 엉치 밑이 굼실굼실하더니 아파지고 그 자리를 손으로 더듬었더니 콩짜개만 한 두드러기가 만져졌다. 두드러기는 인차 커져 지금은 밤톨만 해졌는데 때없이 터지면서 피가 나고 그럴 때면 더 쓰리고 아파졌다.

  전장에서 싸워야 하는 군사에게는 날랜 것이 선차(先次)인데, 밑에 난 덩어리 때문에 움직이기가 괴로워 자연 동작이 둔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데 난 병이라면 남들에게 내놓고 보이고 그에 맞는 약을 제때에 구해다 쓸 수 있었지만 엉치 밑의 병이어서 한동안은 참고 견뎠다.

  정 견디기 어려워서야 남몰래 산성 아래의 마을에 사는 의원을 찾아가 보였더니 그 덩어리란 것이 입에 올리기도 멋쩍은 치질(痔疾)이란 것이었다. 의원은 아무 산에나 흔한 오이풀을 끓여가지고 단지에 붓고 엄지손가락이 나들만(통할만) 한 구멍을 뚫은 널빤지로 뚜껑을 덮은 다음 그 위에 걸터앉아 구멍을 통해 치질 자리에 뜨거운 김을 쐬면 며칠 만에 날 수 있다는 처방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였건만 전혀 효험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금 의원을 찾아갔더니 그는 이번엔 오이풀 대신 느티나무 가지를 써 보라고 하였다. 그 처방도 오이풀 처방과 다를 바 없었다. 가까운 데 사는 의원의 의술로는 병을 고칠 수 없겠다고 생각한 그는 수십 리 떨어진 다른 마을의 의원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분지씨 가루를 치질에 바르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그 의원의 처방도 써봤지만 그 역시 효험이 나지 않았다.

  이쯤 되니 그렇게 열성이 나서 화포를 배우던 ‘송도내기’는 손맥이 풀려 만사가 귀찮기만 하였다. 만사가 귀찮으니 마지못해 교련에 나섰고 결국은 ‘굼벵이’라는 모욕을 면할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병은 더 심해지고 그의 입에는 한숨 소리가 잦아졌다. 쓰러지기 전에 화포 배우기를 그만두고 집에 돌아가는 것이 어떨까? 요즘은 이런 생각까지 걸음걸음 고개를 쳐들며 그를 괴롭혔다.

  바로 그때 ‘송도내기’의 고통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전라도 전주 태생인 오장이었다. 어느 날 점심 무렵 오장은 인편에 집에서 보내온 짐을 받았는데 그 속에는 담뱃잎이 다섯 근이나 들어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담배가 떨어져 몹시 궁금해하던 오장은 목마른 사람 샘을 만난 듯 환성을 질렀다.

  

 

(그림: 담배와 관련된 김홍도의 풍속화. 「담배썰기」, 「벼타작」)

 

  냉큼 놋으로 만든 담뱃대에 담뱃잎을 부스러넣고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던 오장은 ‘송도내기’가 생각나 무릎을 쳤다. 

  “아, 그렇지!”

  또다시 댓통에 담뱃잎을 부스러넣고 부싯돌을 쳐서 불을 붙인 그는 담뱃대를 ‘송도내기’에게 내밀었다.

  “이보게, 지네 병 때문에 속깨나 태우는데 이걸 좀 빨아보라구.”

  오장이 담배를 피우는 걸 본 적 있는 ‘송도내기’는 시무룩해서 대꾸했다.

  “그게 몹시 귀하다는데 나까지 피울 게 있소이까.” 

  오장은 소리없이 웃으며 말했다.

  “담배란 게 수십 년 전에는 몹시 귀한 물건이어서 양반 부자들이나 피웠다누만. 허나 근래에는 내 고향 전주뿐 아니라 도처에 많이 심으니 나 같은 백성들도 피울 수 있다네. 그건 그렇고, 요 담배란 게 참 요물은 요물이야. 심심할 때 피우면 심심한 걸 달래주는 심심초요, 속상할 때 피우면 속상한 걸 달래주는 위안초이거든.”

  ‘송도내기’는 귀가 솔깃해졌다. 담배란 게 정말 위안초일까? 담뱃대를 받아든 ‘송도내기’는 군침을 삼키고 나서 물부리를 입에 물었다. 두 볼이 쏙 들어가도록 몇 모금 빨던 그는 너무도 가슴이 뻐근해서 콜록콜록 기침이 나갔다. 눈물까지 글썽해거 기침을 하고 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게 여간 독초가 아니구만요. 에~ 에~ 난 돈을 준대도 이런 걸 피우지 못하겠소이다.”

  오장은 철썩 ‘송도내기’의 등을 치고 나서 담뱃대를 받아 입에 물었다.

  “어~ 구수하다.”

  ‘송도내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흥! 쓰고 매캐한 담배가 꿀맛이란 말 누가 곧이 듣게소이까. 내 보기엔 쓸모가 전혀 없는 것 같소이다.”

  오장은 맛 좋게 담뱃대를 빨며 웃음을 지었다.

  “모르는 소리, 담배를 태우면 진이 나오는데 그 담뱃진이 헌데엔 제일이야.”

 

(사진: 담뱃잎을 건조하는 장면)

 

  그 말에 ‘송도내기’의 귀가 다시금 솔깃해졌다. 헌데라면 살가죽이 헐어서 상한 자리를 가리키는 말인데 치질도 헌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치질도 헌데라면 담뱃진이 약으로 될 것이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담뱃진을 써본다 해서 손해 볼 것은 없을 것이다.

  ‘송도내기’는 오장을 쳐다보았다.

  “담뱃진은 좀 주겠소이까?”

  “그건 왜?”

  “저… 거기에 좀 발라볼까 해서요.”

  오장은 곧 정색해졌다. ‘송도내기’가 치질에 걸려 제 홀로 약을 구해다 쓰는 걸 알고 있지만 의술에 문외한인 그로서는 그동안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밖에 없었다.

  ‘담뱃진이라…?’

  언제인가 손등에 난 헌데에 댓통의 담뱃진을 장난삼아 발랐었는데 그게 인차 아물었다. 그때문에 담뱃진이 헌데에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헌데가 나면 그렇게 고쳤다. 오장은 기대가 잔뜩 어려있는 ‘송도내기’의 얼굴을 건너다보며 말했다.

  “자네 머리가 핑핑 도누만. 담뱃진이 헌데에 좋으니 치질이라고 안 맞겠나. 헌데 보름가량 담배가 똑 떨어져 오른 처음 담배를 피우니 언제 이 댓통에 치질에 바를만한 양의 담뱃진이 생기겠나.”

  오장은 실망한 ‘송도내기’의 손을 잡고 눈웃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상심 말게. 꿩 대신 닭이라고 담뱃진 대신 담뱃잎을 물에 달여쓰면 될 게 아닌가. 안 그래?”

  오장은 담뱃대를 털며 말했다.

  “말이 났을 때 뿌리를 빼야 한다고 지금 당장 해봅세.”

   군영의 부엌으로 간 오장은 제가 직접 화로에 쇠 냄비를 놓고 담뱃잎을 달였다. 물이 한동안 끓자 가는 담뱃잎을 건져내고 걸쭉해질 때까지 졸였다.

  “자, 이제 된 것 같애. 이 약을 가져다 하루 몇 번씩 발라 보게.”

  그날부터 ‘송도내기’는 짬만 있으면 약물을 발랐다. 약물을 바른지 사흘째 되는 날 그렇게 애를 먹이던 밑이 편안해져 손으로 만져보니 늘 피와 진물이 배어 미끈거리던 덩어리가 말라 있었다.

  “거참, 신기한데.”

  약을 바른지 열흘 만에는 덩어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뜻밖에 담뱃잎의 덕으로 병을 고친 ‘송도내기’는 날아갈 것 같았다.

  “내 더욱 분발해서 명포수가 될 테다!”

  열심히 포 쏘는 법을 배운 그는 이듬해 명포수로서 오랑캐를 물리치는 싸움에서 조선사람의 본때를 보여주었고 담뱃잎의 달인 물이 치질에 명약이라는 비방도 항간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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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북의 󰡔고려의학대사전󰡕 앱과 고려의학-양의학 융합을 바탕으로 한 예방의학으로 코로나 방역을 극복한 북의 동포들)

  이처럼 슬기롭고 문명한 우리 선조들은 오랜 옛적부터 노동과 생활 속에서 조선 사람의 체질에 맞는 가지가지의 비방들을 찾아내고 더욱 활용하는 과정에 백과전서(백과사전)적인 한 분야를 개척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민간요법이었다.

  민간요법은 현대의학과 더불어 오늘도 사람들의 병을 미리 예방하고 원만히 치료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으니 참으로 선조들이 물려준 의학지식이야말로 얼마나 자랑스러운 재보(보배)인가.

 

원문: 전철호・리선복 외, 󰡔야담집 돈항아리󰡕, 평양출판사,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