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하고 능란한 외교로 강적(强敵)을 몰아낸 서희 

안광획

(그림: 거란의 1차 침입을 담판으로 물리친 서희와 강동6주 지도)

 서희(徐熙, 942~998년)는 내의령(內議令)이었던 서필(徐弼)의 아들로서 어렸을 때의 이름은 렴윤(廉允)이었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였는데 그와 관련하여 이런 일화가 전해 온다.

서희의 할아버지인 서신일(徐神逸)이 시골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사슴 한마리가 신일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는 것이었다. 신일은 이상하게 여기며 사슴의 아래위를 훑었다. 사슴의 몸에 화살이 박혀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그것을 뽑아주고 숨겨놓았다. 얼마 후에 사냥꾼이 헐레벌떡 달려와 ‘화살에 맞은 사슴을 보지 못했는가?’고 물었다. 신일은 보지 못했다고 시치미를 뗐다. 사냥꾼은 헛물을 켜고 돌아갔다.

그날 밤 신일의 꿈에 신인(神人: 신선)이 나타나 사의를 표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사슴은 나의 아들이었는데 그대의 덕택으로 죽지 않았소. 앞으로 당신의 자손들은 대대로 재상이나 대신의 높은 벼슬을 하게 될 것이오.”

과연 그의 말대로 서필, 서희, 서눌(徐訥, 서희의 아들) 등이 대대로 재상이 되었다.

서희는 960년에 18살로서 과거에 급제한 후 차례를 뛰어 넘어 광평(廣評) 원외랑(員外郞) 벼슬에 임명되었으며 나중에는 내의시랑으로 승급하였다. 972년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성을 떨쳤다. 983년에 좌승(佐丞)을 거쳐 병관어사(兵官御使)로 임명되었고 그 후 내사시랑(內史侍郞)*으로 전임되었다. 그는 엄정하고 성실하였다고 한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큰 공적은 993년에 있은 거란의 1차 침입 때 적들의 약점을 간파하고 대담하게 적진에 들어가 능숙한 외교전으로 적들의 강도적 요구를 물리치고 국경 밖으로 몰아낸 것이다.

* 성종 때에 내의시랑(內議侍郞)으로 개칭함.

992년 12월 요(遼, 거란) 임금 성종은 고려가 고분고분하지 않는다고 하여 동경(東京, 중국 요녕성 요양시) 유수(留守) 소손녕(蕭遜寧)*으로 하여금 고려를 치게 하였다. 소손녕이란 자는 담력이 있고 모략에 능하였다고 한다.

* 소손녕(蕭遜寧): 이름은 항덕, 자는 손녕, 요 성종의 사위)

이 자는 침략준비를 갖춘 데 기초하여 다음 해 8월경에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미 그해 5월부터 여진인들이 거란의 침략음모를 고려 정부에 알려 왔지만 고려봉건정부는 거짓보고로 생각하고 그에 대한 방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불의의 사변을 당한 고려봉건정부에서는 여러 도에 병마제정사(兵馬齊正使)를 파견하였다.

10월에는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中軍使)로, 시중 박양유(朴良柔)를 상군사(上軍使)로, 문하시랑 최량(崔亮)을 하군사(下軍使)로 각각 임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북계(北界: 평안북도 지방)에 가서 적을 막게 하였다. 윤 10월에는 고려 임금 성종 자신이 직접 방어를 지휘하기 위하여 서경(평양)을 거쳐 안북부(安北府, 평남 안주시)에 주둔하였다.
적들이 황북 봉산군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려 성종은 되돌아섰으며 서희는 군대를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서희가 봉산을 구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소손녕은 저들이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였는데 고려가 저희네  강토를 점령하고 있으므로 찾으러 왔다느니, 저들이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귀순하지 않으므로 소탕하러 왔다느니 하는 잡다한 말을 퍼뜨리게 하였다.

이것을 통하여 서희는 오히려 적들의 약점을 간파하였으며 왕에게 “그들과 화의할 수 있는 조짐이 보인다.”고 하였다. 고려 성종(982~997년)은 감찰 사헌차 예빈소경(禮賓少卿) 이몽전(李蒙戩)을 거란침략군의 병영에 보내어 적들의 의도를 타진해보게 하였다.

소손녕은 저희 군사 80만이 도착하였다고 허장성세(虛張聲勢)하면서 빨리 국왕과 신하들이 와서 항복할 것만을 재촉하였다. 이몽전이 그 이유를 묻자 소손녕은 고려에서 백성들을 돌보지 않으므로 천벌을 주러 왔다는 희떠운 소리(헛소리)를 줴쳤다(지껄였다).

이것을 통하여 서희는 적들이 싸우기를 꺼리고 있다는 약점을 포착하였다. 그것은 적들이 큰소리를 치면서 저들의 군세를 과장하고 고려의 항복만을 재촉하는 사실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는 일이였다. 병법에도 적의 사신이 말을 겸손하게 하면서 전투준비를 일층 강화함은 진공을 기도하기 때문이요, 말을 강경하게 하면서 전진할 기세를 보임은 퇴각을 준비하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떤 관료는 임금은 수도로 돌아가고 대신 한명으로 하여금 군대를 인솔하고 투항을 청하자고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자는 서경 이북의 땅을 적에게 넘겨주고 황주로부터 철령(鐵嶺)에 이르는 계선을 국경으로 정하자는 얼토당토않은 의견을 제기하기까지 하였다.

성종은 땅을 떼어주자는 의견에 찬동할 생각으로 서경 창고에 두었던 쌀을 통털어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하였다. 그러고도 오히려 많은 쌀이 창고에 남았으므로 성종은 이 쌀이 적들의 군량으로 될까봐 염려하며 대동강(大同江)에 버리도록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서희는 임금에게 간곡히 간하였다.

“식량이 넉넉하면 성을 능히 지킬 수 있고 싸움에서 승리할 수도 있사옵니다. 전쟁의 승패는 강하고 약한 데만 달린 것이 아니라 적의 약점을 잘 알고 행동하면 승리할 수 있소이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쌀을 버리려고 하시나이까.”

성종은 서희의 의견을 옳게 여기고 그것을 중지하게 하였다.

서희는 임금의 마음이 돌아섰다는 것을 깨닫고 적들의 약점에 대해서 밝혔다. 그는 적들의 의도는 고려가 생여진을 몰아내고 쌓은 가주, 송성 두개 성을 탈취하려는데 불과하며 고구려의 옛 땅을 찾겠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은 고려야말로 고구려의 계승국이므로 명분이 서지 않 데다가, 고려군이 천험의 요새인 청천강(淸川江)을 계선으로 하여 철통같은 방어진을 치고 있으므로 몹시 두려워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서희는 “지금 적들의 병력이 성대한 것만을 보고 갑자기 서경 이북을 떼어준다면 이것은 올바른 계책이 아니옵니다. 뿐만 아니라 삼각산(三角山)* 이북은 모두 고구려의 옛 강토인데 그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강요한다고 해서 다 주겠소이까. 하물며 국토를 떼어 적에게 준다는 것은 만세의 치욕이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수도로 돌아가시고 저희들로 하여금 적과 한번 판가리싸움**을 하게 하신 후에 다시 논의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라고 자기의 굳은 결심을 표명하였다.

* 삼각산: 서울에 소재한 북한산(北漢山)의 다른 이름.
** 판가리싸움: 생사를 가르는 치열한 싸움.

전 민관어사(民官御使) 이지백(李知白)도 국토를 떼어주자고 한 자들을 통절히 규탄하며 거란군과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성종은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림: 제1차 고려-거란 전쟁도)

소손녕은 고려에 항복을 요구한 후 오랫동안 소식이 없게 되자 군사적 압력을 가하여 고려를 굴복시키려고 청천강을 건너 안주 서남쪽 65리 지점에 있는 안융진(安戎鎭, 평남 안주시 일대)을 불의에 공격하였다. 적들은 안융진이 고려 방어선의 가장 약한 지점이라고 타산(계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중랑장 대도수(大道秀)*가 지휘하는 고려 방어군의 용감한 항전에 부딪쳐 여지없이 패하여 사기를 잃고 말았다. 소손녕은 무모하게 압력을 가하려다 병사들을 잃고 더는 싸우려 하지 못하고 다시 항복을 재촉하였다.

* 대도수: 고려에 넘어 온 발해왕족의 후손.

서희는 적들과의 담판시기가 성숙되었음을 느꼈다.

소손녕은 화통사(교섭꾼)로 파견된 합문사(閤門使)인 장영(張榮)을 돌려 보내면서 다른 대신을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성종이 군신들을 모아놓고 “누가 거란영문으로 가서 언변으로써 적병을 물리치고 만대의 공을 세우겠는가?”고 물었으나 아무도 응답하며 나서는 자가 없었다. 생사를 기약하기 어려운 그 일에 선뜻 나서기 두려웠던 것이다.

서희가 비장한 결의를 가다듬으며 일어났다.

“신이 불민(不敏)*하오나 감히 왕명을 받들겠소이다.”

* 불민: 어리석고 아둔하여 재빠르지 못하다.

성종은 너무 기뻐서 강가에까지 나가서 그의 손을 잡고 전송하였다.

서희는 말을 타고 소손녕이 있는 군영으로 가면서 생각을 굴렸다. 소손녕은 송나라군과 여러 번 싸워 이겼으므로 콧대가 높고 고집이 셀 것이니 먼저 기세를 꺾어놓은 다음에 담판에 임해야 할 것이었다.

서희가 예측한 바와 같이 담판에 임하는 소손녕의 태도는 오만무례하였다.

“나는 큰 나라의 대신이니 고려사신은 응당 뜰아래에서 절을 하여야 한다.”

“신하가 임금에게 대할 때 당하에서 절하는 것은 예법에 있는 일이나 양국의 대신들이 대면하는 좌석에서는 그런 예법이 있을 수 없소.”

서희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소손녕이 고집하자 서희는 더욱 강경하게 맞섰다. 서희는 숙소로 돌아와 자리에 누워서 까딱 움직이지 않았다. 소손녕은 서희의 비범한 인품과 사리정연한 말에 탄복하여 황급히 사람을 보내어 그가 요구하는 예식절차를 승낙한다는 것을 전하였다.

고려대신의 체모를 지키려는 이러한 강경한 태도는 칼과 창을 든 수많은 적병들이 우글거리는 적진 가운데서 취해진 것이었다. 그러니 서희에게 드리워졌던 위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서희는 적들의 약점을 틀어쥐고 배심있게(뚝심있게) 적들과 맞서 이겼던 것이다.

두 나라 대표는 예식을 마친 후 곧 담판을 시작하였다.

영토에 관한 문제가 첫 의정으로 제기되었다. 소손녕은 담판에서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거란의 소유이다, 그런데 고려는 거란 땅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으니 대동강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서희는 그 말을 듣고 사리정연하게 반박하였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계승자이다. 그러므로 나라 이름도 고려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 경계를 따진다면 귀국의 동경(요녕성 요양)까지도 고려의 영토가 되여야 하는데 고구려의 영토를 또 내놓으라는 것이 무슨 말인가.”

역사적인 사실을 정확히 밝혀가며 말하는 서희의 반박에 소손녕은 드디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두 번째는 두 나라의 국교에 관한 문제였다. 소손녕은 “고려가 육지로 인접해있는 우리 거란과는 국교를 가지지 않고 바다를 건너 먼 송나라와 화친하는 것은 고려가 거란을 깔보는 태도이다. 이 때문에 우리 임금(요 성종)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라고 시비하였다.

이에 대하여 서희는 즉석에서 반박하였다.

“압록강 안팎의 우리 지경에 여진인들이 살고 있으면서 우리의 길목을 막고 있기에 거란과 통하지 못하고 바다 건너 송나라와 통하는 것이오. 고려가 여진인들을 몰아내고 우리의 옛 땅에 요새를 구축하고 도로를 개통하면 거란과 통교하지 않을 까닭이 없는 것이오.”

서희는 소손녕에게 여진인들을 몰아내고 우리의 수 백리 옛 땅을 찾겠다는 고려의 입장을 명백히 밝히고 그것이 거란과의 국교를 맺는 전제조건으로 된다는 것을 인정시켰다.

고려의 영토 확장을 거란과의 국교문제와 기묘하게 결부시킨 서희의 능란한 외교적 수완 앞에 말문이 막힌 소손녕은 자기 임금에게 이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였다. 거란 임금은 고려가 장차 여진인들을 몰아내고 통로를 개척한 다음 거란과 통교할 것이라고 믿고 군사를 거두어가지고 돌아올 것을 명령하였다. 이리하여 7일간 격렬하게 진행된 거란침략군과의 담판은 고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소손녕은 담판을 끝내면서 서희를 위하여 연회를 베풀겠다는 것을 제의하였다. 서희는 그것을 부드럽게 사양하며 말하였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귀국이 대군을 출동하였으므로 모두 손에 무기를 들고 떨쳐나서서 싸움준비로 긴장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때에 어찌 내가 잔치하고 즐기겠는가.”

그러나 소손녕은 “두 나라 대신이 서로 만났는데 어찌 친목하는 예식이 없을 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서희를 연회장으로 이끌어갔다.

소손녕이 굳이 간청하므로 서희는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즐겁게 지냈다. 소손녕은 담판 초기의 오만무례하던 태도를 버리고 서희를 깍듯이 존대하였으며 작별하는 시각이 되자 낙타 10필, 말 100필, 양 1,000마리, 비단 500필을 선물로 주었다.

고려가 적들과의 담판에서 승리하고 전리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예물까지 받을 수 있은 것은 993년 윤10월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하여 침공하는 적들의 예기를 꺾어놓은 다음에 강화담판을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안융진 전투 승리와 그에 의거한 서희의 대담하고 능란한 외교는 거란침략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994년 평장사(平章事)로 된 서희는 고려군을 이끌고 여진인들을 몰아내고 장흥(평북 태천군), 귀화 두 진과 곽주(평북 곽산군), 구주(=귀주, 평북 구성시) 두 고을에, 다음해에는 선주(평북 선천군), 맹주(평북 맹산군) 두 고을에 성을 쌓아 서북면 국경지대의 방어를 일층 강화하였다.*

* 이들 진지와 성이 고려가 압록강변 일대에 개척한 영토인 ‘강동 6주(江東六州)’이다.

이처럼 서희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대담하고 능란한 외교로 적들의 침략을 물리치고 강토를 수호하였을 뿐 아니라 여진인들을 몰아내고 옛 고구려 땅을 수복하는데 공로를 세운 단군의 후손이다.

원문: 림호성, 『단군민족의 명인』 1, 단군민족통일협의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