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조선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새로쓰는 고조선역사] 만조선 성격에 대한 고찰

 

만조선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이다. 고조선은 단군조선, 후조선, 만조선이라는 세 왕조가 있었는데, 이를 삼조선이라고도 한다. 기원전 15세기경 단군조선은 내부적 모순의 축적으로 약화 몰락하고, 후조선이 성립했다. 후조선은 단군조선 시기의 영토였던 부여, 구려, 진국 등이 분리 독립해 나가 영토가 축소됐지만, 왕조 성립 이후 신속히 내부 체제를 정비하고, 의무려산맥 서쪽지역(요서지역)으로 광범히 진출해 난하 중류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하지만 연나라 소왕 때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략으로 요하 서쪽 지역 2000여리의 땅을 연나라에 빼앗긴 후 나라가 약해졌다. 후조선 마지막 왕인 준왕 때에 이르러 서변의 제후로 있었던 만에 의해 멸망했다. 이때가 기원전 194년이다. 이로부터 후조선 왕조는 만조선 왕조로 됐다.

 

만 왕조의 성립

 

만 왕조를 세운 창건자는 만이다. 역사서들에서는 위만이라고도 전해진다. 그는 원래 연나라 사람이었는데, 기원전 209년 후조선으로 망명했다. 이에 대해서는 <위략>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동쪽으로 취수(패수)를 건너 준에게로 가서 항복했다. 그가 준왕을 설복해 서쪽 변경에 살면서 옛 중국의 망명자들로 조선의 울타리를 삼겠다고 하니 준이 그를 믿고 박사벼슬을 주고 규를 주었으며, 백리땅을 봉토로 주어 서쪽 변방을 지키게 했다”고 나와 있다. 이처럼 만은 원래 연나라에 살다가 진승오광의 반란으로 중국 내부가 소란스러워지자 지지자들을 끌고 고조선 땅으로 망명했다. 기원전 209년 후조선으로 온 만은 준왕의 신임을 얻어 후왕으로 대접을 받으면서 변방 백리 땅을 통치하는 권력을 갖게 됐다. 

 

만이 후조선에 망명하고 준왕에게 받은 서쪽 변경 백리 땅은 어디인가? 그것은 <사기> 조선열전에서 전하는 ‘진고공지 상하장’ 즉 패수(대릉하) 동쪽, 요양하 서쪽 지역이며, 후국 수도는 험독에 두었다. 만이 후조선 준왕으로부터 받은 후국 수도인 험독의 위치가 나온 역사책은 <한서> 지리지이다. 이 책 요동군 험독현 조에는 응소가 “조선왕 만의 수도이다”라고 했다는 주석이 붙어 있고, <사기색은>(당(唐, AD 618 -907)나라 시대 때 유명한 사학자인 사마정(司馬貞)이 쓴 <사기> 주석서)에는 응소의 주석을 인용하면서 “조선 왕의 옛 수도”라고 했다. 여기에서 조선왕의 옛 수도라는 것은 고조선(후조선)의 왕으로 되기 전 후왕(제후 왕)으로 있었을 때의 후국(제후국)의 수도라는 의미이다. 이는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요동군 험독현으로 된 지역(요양하 서쪽 지역)이 후조선 말기에는 중국이 아닌 고조선의 영토에 속해 있었고, 연나라 당시, 그리고 진나라 한나라 초기의 요동군과 훗날 고조선 멸망 이후의 요동군의 위치가 달랐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된다. 덧붙여 만이 후조선 왕으로부터 받은 변방 백리 땅이 요하 이서 패수(대릉하) 이동지역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또한 패수가 대릉하라는 것을 말해주는 유력한 증거이기도 하다. 

 

만은 후조선 서쪽 변경 100리 땅을 봉지로 다스리면서, 10여 년 동안 자체적인 정치경제적 군사적 역량을 구축하며, 후조선을 집어삼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왔다. 기원전 195년 한나라에서는 연왕 로완의 반역사건이 일어났다. 한나라 중앙정부는 주발을 총지휘자로 하는 중앙토벌군을 파견해 반란을 진압토록 했다. 중앙토벌군이 연왕 르완이 다스리던 지역(옛 연나라 땅으로 대릉하 서쪽지역)으로 물밀 듯 들어오자 연나라땅은 전쟁마당으로 변하고 수많은 피난민들이 살길을 찾아 후조선으로 넘어왔다. 기회를 엿보던 만은 직감적으로 이때다 하고 기원전 194년 사람을 시켜 후조선의 왕 준에게 “한나라 군대가 10개의 길(방향)로 쳐들어오니 내가 가서 왕궁을 지키겠다”고 거짓보고를 하게 하고 많은 무력을 이끌고 불의에 왕검성(평양)으로 들이닥쳤다. 후조선 준왕은 한나라 대군이 접경지대인 연나라땅에 들어와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 군대가 임의의 시각에 이웃나라를 침공할 수 있기 때문에 허위보고를 믿고 만이 군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오는 것에 대해 방심했다. 만의 기병대는 며칠 안으로 왕검성에 당도해 공격을 개시했다. 방어대책을 치밀하게 세우지 못한 준왕은 허망하게 왕검성을 내주고 부랴부랴 몇몇 신하들과 호위군사들을 이끌고 배에 올라 대동강으로 내려가서 바다길로 진국의 마한 땅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리하여 만은 힘들이지 않고 후조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만왕조를 수립했다. 

 

큰 전투 없이 왕검성을 차지한 만은 자기를 왕으로 선포했다. 이로써 기원전 194년 고조선의 두 번째 왕조인 후조선은 종말을 고하고 만왕조가 수립됐다. 만왕조는 수도를 왕검성(평양)에 두었으며, 후조선 시기의 통치체계와 질서를 기본적으로 그대로 유지했다. 만은 기존 정치세력들 가운데서 순종하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진압하고 나라의 정치정세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무력을 강화 발전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얼마지 않아 사방 수천리나 되는 큰 나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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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조선의 강역

 

만은 고조선 사람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는 만왕조를 위만조선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는 만왕조를 세운 만왕이 연나라 출신 위만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역사서들에서는 연나라 사람 위만이 고조선에 망명했다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만은 고조선 사람일까? 아니면 중국 사람일까? 이것이 핵심 쟁점으로 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만은 연나라 땅에 살고 있었던 고조선 사람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가 후조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웠지만 국호를 여전히 조선이라 불렀으며, 후조선 왕조 시기의 각종 제도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만을 비롯해 함께 망명했던 세력이 중국 사람들이었다면, 그 당시의 중화적 사고의 흐름으로 볼 때 조선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두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백번 양보해서 국호는 내부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그대로 뒀더라도 각종 정치, 사회제도는 반드시 중화적인 것으로 바꾸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기록과 유적 유물적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만왕조가 중국식으로 사회제도와 문화를 바꾸려 노력했던 흔적은 전혀 없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만과 함께했던 그 정치세력들이 중국 사람들이 아니라 고조선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옛날 연나라의 침공으로 빼앗겼던 지역에서 살고 있었던 고조선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선식 제도를 고수했다고 봐야 한다. 후한의 응소가 <한서음의>라는 책에서 만조선의 관직제도를 논할 때 “오랑캐들이 관직의 규범을 잘 모르기 때문에 모두 상”이라고 칭했다고 했는데, 이는 고조선의 관직제도가 중국과는 구별되는 고유한 제도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둘째, 그에게는 원래 중국식 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기〉나 〈한서〉의 조선 열전에서는 그를 조선왕 만이라고 했지 성을 쓰지 않았다. 〈후한서〉나 〈삼국지〉에서는 만을 위만이라고 썼지만, 이것은 그가 연나라 땅에 살고 있었을 때 쓰던 성씨였을 뿐이고 고조선에 들어온 이후에는 성씨를 쓰지 않았다. 만약에 그가 진짜 성이 있었고 위씨가 맞다면 중국적인 것을 내세우기 좋아하던 중국의 사가들이 〈사기〉나 〈한서〉 같은 역사서에서 성씨를 빼놓았을 리 없다. 후조선의 마지막 왕들인 부왕 준왕의 경우에도 성씨가 나오지 않는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고대에 중국식 성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도 연나라에 살 때는 편의상 중국식 성을 사용했다가 고조선에 망명한 이후에는 성을 쓰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원래 중국 사람이 아니라 고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원래대로 성을 쓰지 않은 것이다. 만약 중국 사람이었다면 당시 성을 쓰지 않은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셋째, 그가 연나라 땅에서 망명할 때 고조선 풍습대로 조선식 차림새로 하고 왔다는 점에서 볼 때 그는 고조선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사기〉나 〈한서〉에서는 그가 연나라 땅에서 조선으로 갈 때 ‘오랑캐 옷’ 즉 조선 옷을 입고 상투를 틀고 패수를 건너갔다고 쓰고 있다. 옷차림 풍습은 식생활, 주택 풍습과 함께 민족적인 전통과 생활방식을 반영한 것으로서 해당 시기 사람들의 옷차림은 그의 민족적 징표를 정확히 반영한다. 그가 한족이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후조선으로 피난해 올 때 구태에 조선옷을 입고 상투를 틀고 국경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고조선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상 전례의 차림새를 하고 왔던 것이다.

 

넷째, 결정적으로 만이 고조선 사람이 아니라 중국 사람(한족)이었다면, 후조선의 준왕이 그를 중국과의 변경지역에 후왕으로 보냈을 리 없다. 당시는 중국이 통일된 이후 후조선 왕조는 중국의 침략에 대해 고도로 경계하고 있었을 때이다. 그런 때에 만이 중국 사람었다면, 그를 신뢰할 리 없으며, 그를 후왕으로 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준왕이 그를 신임하고 후왕으로 임명해 변경지역을 다스리도록 한 것은 나라를 지키는 역할을 맡긴 것으로 그가 고조선 사람이면서도 중국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조선의 성격

 

만조선은 한반도 내 소국도 아니고 고조선의 일개 후국도 아니다. 만조선은 후조선을 계승한 국가이며, 한반도 임진강 이북지역과 만주 일부지역에 걸쳐 영토를 갖고 한나라와 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경쟁한 거대한 고대국가였다. 정변에 성공한 이후 국내정세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며 군사력을 강화해 옛 후조선 지역을 거의 장악했다. 이를 두고 〈사기〉 조선 열전에서는 “만이 군사적 위력과 재물을 가지고 주변의 작은 고을들을 쳐서 항복시키니 진반과 임둔 등이 모두 복속되어 영토가 사방 수천리에 달하게 되었다”고 평했다.

 

만조선은 후조선과 똑같이 수도를 평양으로, 두고 후조선의 통치체계와 지배질서를 그대로 계승해, 중앙과 지방에 보다 정연한 지배체제를 구축해 갔다. 왕은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 전제권력을 행사했으며, 왕위는 대대로 세습했다. 만의 왕위는 우거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계승됐고 우거왕도 자기의 왕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아들을 태자로 삼았다. 만조선의 지방 통치체제는 크게 국왕의 직할지와 후왕들이 관할하는 후국으로 갈라져 있었다. 또한 직할지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수도 외에도 부수도 제도를 두었다. 만조선 시기 부수도로 대표적인 곳은 고조선-한나라의 격전이 펼쳐졌던 요동지방에 있는 왕검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