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귐성의 비결

안광획

(그림: 『월야선유도』)

고려 때 서경(평양)에는 사람들이 저마다 사귀고 싶어 하는 류씨 성을 가진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어찌나도 안면이 넓었는지 서경에 류씨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서경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나도는 정도였다.

어느 해 류씨 사나이가 사는 마을로 서경에서 손꼽히는 재산가로 이씨 부자가 왔는데, 그는 온 동네가 좋아하는 류씨를 보고 그를 몹시 질투했다.

도대체 저 류가가 뭐가 잘난 데가 있기에 사람들이 반겨 맞고 따르는 것일까?

족보로 따지면 도저히 사람 축에도 들지 못하는 천한 상놈인데다 인물을 보면 보통 키에 볕에 새까맣게 탄 얼굴이어서 볼품없고, 재산을 논하면 절반은 농사꾼에 반은 석수장이(석공)이어서 쑬쑬한 집 한 채뿐 가진 것이란 뭐 별로 없는 가난뱅이다. 구변술을 봐도 워낙 천성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 과묵한 성미다 보니, 마실방의 이야기꾼같은 구수한 말재주는 더욱이 없었다.

문벌로나 인물이나 구변술로나 그리고 재산을 보아도 어느 하나 변변치 못한 류씨 사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친숙하게 사귀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대대로 사대부의 피를 물려오는 존귀한 바탕에 인물도 사내싸게 잘나고 말주변도 뛰어나고 보다는 손자대, 아니 증손자의 대하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호의호식할 수 있는 만금 재산을 가진 이 이씨 부자는 사람들이 모르쇠를 하닌 이게 어디 될 법인가?

그 때문에 심사가 꼬일대로 꼬이고 밸(창자)가 뒤틀릴 대로 뒤틀린 이씨 부자는 먼발치에서 류씨 사나이를 보기만 하여도 이가 갈려 미칠 것만 같았다.

‘저 빌어먹을 류가 상놈이 이 마을의 으뜸가는 이 이씨 부자를 제쳐놓고 사람대우를 도맡는 것은 나에 대한 모욕이고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저 빌어먹을 상놈을 짓뭉개고 온 마을의 공경과 칭찬을 이 한 몸에 모을 수 있을까?’

이씨 부자는 자기에게 티끌만큼도 해가 되는 어행을 한 적 없는 류씨 사나이었지만, 그가 있는 한 자기는 누구의 공경은커녕 존재 자체도 논할 수 없고 그래서 자기네와 류씨네 사이는 수화상극(水火相剋: 물불과 같이 상존할 수 없는 사이)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씨 부자는 궁냥밑에 길거리에 나가 돈주머니를 흔들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공짜 술도 사 먹이고 동냥꾼들에게 동전 몇 닢도 던져주며 그들에게 환심을 사려 했지만 어진 부자라는 귀맛좋은 소리는 없고 백성들의 고혈로 살찐 욕심쟁이 부자가 제 낯내기(과시)를 하려 한다는 손가락질이나 받을 뿐이었다.

그런 뒷소리를 들을 때면 당장 사환꾼들을 내몰아 류씨 사내에게 뭇매를 안겨 화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그를 한 식솔처럼 여기는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 억지로 참고는 하였다.

도대체 류가 상놈이 무슨 묘술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겼을까? 그 묘술을 알고 싶어 한동안 류씨 사나이를 남몰래 지켜보았지만 범상하기만 한 그의 행동에는 아무것도 안겨 오는 것이 없었다.

‘내 기어코 저놈의 묘술을 밝혀내서 그놈의 체면을 납작하게 짓뭉개놓고야 말겠다.’ 이런 악심을 먹은 이씨 부자는 어느 날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을 주관하는 좌상노인을 찾아갔다. 값진 물건을 좌상노인 앞에 내놓은 그는 직판(곧바로) 찾아논 용건을 터놓았다.

“이 마을에 이사를 와서 보노라니, 류가가 온 마을 사람들과 무척 친하던데 그가 가지고 있는 사귐성을 비결이 무엇인지 알고 싶소이다.”

좌상노인은 허연 수염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사귐성의 비결이라… 이거 되물어서 안됐네만, 자네가 보건대 사람들이 가져야 할 사귐성의 비결이 뭐라고 생각되나?”

이씨 부자는 헛기침을 깇고(하고)나서 목청을 돋구었다.

“에~ 주어서 싫다는 놈 없고 먹자는 귀신은 먹여야 한다고 제 생각엔 코아래 진상*만이 사람들과 사귀는 비결이 아니겠소이까. 그런데 내 지켜보니 류가는 사람들에게 동전 안 닢도 거저 주는 것이 없고 또 그럴만한 힘도 없는 가난뱅이인데도 다들 그를 좋아하니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소이다.”

* 남에게 먹을 것이나 뇌물을 바치는 일.

좌상노인은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코아래 진상이 사귐성의 비결이라는 자네의 말에도 일리가 있네. 권세를 쥔 부자들 치고 아랫사람들이 재물을 바치기를 바라지 않는 이 없고 그래서 그것이 오고 가며 위아래가 친교를 맺으니 말이요. 그러나 코아래 진상으로 이루어진 친교는 오고 가는 재물이 없어지면 불 맞은 고드름처럼 형체마저 없어지는 것이니 어찌 그런 것이 사귐성의 비결이라 하겠소.”

이씨 부자는 목마른 사람처럼 침을 모아삼키며 물었다.

“그럼 어떤 것이 진짜 사귐성의 비결이라 할 수 있겠소이까?”

좌상노인은 간절한 눈길로 쳐다보는 이씨 부자를 진중한 눈길로 마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림: 김홍도, 『주막』)

“가령 어떤 사람이 일부러 술집들에 가서 외상술을 먹고 다음 날 제가 먹은 술값보다 더 많은 돈을 주었다고 합세. 물론 그것도 꾀바른 인심이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끄당기는 수법이라 할 수 있지만 결코 사귐성의 비결이라고는 할 수 없네. 그런 값 눅은(싼) 인심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으니까.”

이씨 부자는 그 말이 자기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또 어떤 부자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자 하는 역빠른(재빠른) 타산으로 동이 값이 눅은 봄철에 많이 사들였다가 값이 비싼 장마철에 동이를 본전으로 팔아주었다고 합세. 물론 그것으로도 사람들의 호감을 살 수는 있어도 혈육과도 같은 뜨거운 정은 얻을 수 없네. 그런즉 이런 값 눅고 역빠른 수법들은 사귐성의 비결이라고 할 수가 없네. 그러나…”

이씨 부자는 좌상노인의 입에서 이제 어떤 명쾌한 답이 흘러나올까 하는 기대 속에 가슴을 조였다.

“이번에는 이런 경우를 놓고 보세. 언제인가 어떤 사나이가 마을로 들어서는데 뜻밖에 삼단같은 불길이 어떤 집을 삼키고 있었네. 부모들은 다 밭에 나가서 없고 집에는 코흘리개들만 있었는데, 장난 세찬 그 녀석들이 부엌에서 콩을 닦아(볶아)먹다가 그만 불을 질렀네.

초가집은 삽시에 세찬 불길에 휩싸이고 당황한 아이들은 밖으로 뛰쳐나왔지만 방 안에서는 한 살짜리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네.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 발을 동동 구르며 아우성을 쳤지만 그 불길 속에 들어가 아기를 안아 나올 엄두만은 내지 못했네. 바로 그때 마을로 들어선 사나이가 무섭게 타번지는 불 속에 뛰어들어 아기를 안아 나왔지.

생판 남남지간인데도 제 목숨은 아랑곳하지 않고 죽을 수도 있는 불 속에 뛰어들어 아기를 살려낸 그의 소행은 온 마을을 크게 감동시키고 그때로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를 친혈육으로 여기고 따랐다네.

만일 자네가 그런 경우와 맞다들렸다면 그 사람처럼 할 수 있겠나?”

이씨 부자는 불에 덴 듯 놀라 한무릎 물러나 앉았다. 고담(옛이야기) 같은 이야기로 상대의 진속을 가늠해보려는 이 늙은이는 정말 능청스럽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방금 그가 들려준 이야기에서 마을 사람들이 감히 그 불길 속에 뛰어들지 못했다는데, 이게 바로 인간 세상의 정해진 이치가 아니겠는가?

친혈육이 아닌데도 불길 속에 뛰어든 그 사람은 온전한 제정신이 아닌 바보였을 것이다. 이렇게 이치도 맞지 않는 이야기로는 똑똑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깨칠 수 없다. 돈 다음에 나은 놈 같은 이씨 부자로서는 불길 속에 뛰어든 그 사람의 심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노인은 입가에 비웃음이 실린 이씨 부자를 보며 그의 속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친김에 힐 말은 하고 싶었다.


(사진: 수해복구가 완료되어 새로운 집에 입주하는 북 동포들)

“또 어떤 가난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집안의 맏이로서 막내동생이 장가를 가면 집을 마련해주려 여러 해째 허리띠를 졸라매고 푼전을 모았소. 마침 집 한 채를 지을 돈을 장만한 그해 여름 보기 드문 왕장마가 져서 한 마을의 어떤 집이 큰물에 떠내려가고 말았소.

그 사람은 배를 곯으면서 애써 장만했던 돈으로 한지(빈터)에 나앉은 그 사람의 집을 지어주었소. 그의 소행은 온 동네를 감동시켰고 오늘도 온 마을은 그를 한 식솔로 여기며 따른다네.”

이씨 부자는 듣고도 모를 소리여서 입만 쩝쩝 다셨다. 세상에 멍텅구리가 아니고서야 헐벗고 굶주리면서 모은 목돈을 공짜로 남에게 줄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 아니면 남인게 이 세상 이치인데…

좌상노인의 저력있는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그 사람이 바로 우리 마을의 류씨 사내일세. 남을 진정 친혈육으로 여기는 그런 사람만이 누구나 친하고 싶어하고 공경과 찬사를 한 몸에 지닐 수 있는 것이네.

그런즉 사귐성의 비결이란 억지로 꾸민 그 어떤 묘술이 아니라 남을 위해 자기를 서슴없이 바치려 하는 참된 마음이라 할 것일세. 다시 말하여 인자무적(仁者無敵: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음)이라고 어진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적이 없거니 그런 사람과는 천하가 사귀려 한다 그 말일세.”

이씨 부자는 좌상노인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신선 세상에서나 논할 수 있는 그따위 소리가 빈부귀천의 인간 세상에서 어찌 통할 수 있단 말인가?

제가 가져왔던 값진 물건을 도로 찾아들고 방을 나서는 이씨 부자를 지켜보는 좌상노인은 부자와 가난뱅이는 수화상극이어서 사람들과 사귀는 그 비결까지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절감하였다.

저런 양반 부자들이 어찌 진정만을 인간으로 본성으로 아는 백성들의 사귀는 비결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원문: 전철호, 「사귐성의 비결」, 󰡔야담집 돈항아리󰡕, 평양출판사,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