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안광획

(그림자료: 안중근 의사와 하얼빈역 의거 장면.)

10월 26일은 우리에게 여러모로 특별한 날이다. 흔히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처단한 날이고, 1979년에는 다까끼 마사오(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살해당함으로써 YH무역 사태-부마항쟁을 거치며 몰락해가던 유신독재가 종말을 고한 날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1909년 10월 26일의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남북이 모두 높게 평가하고 존경하는 인물로써 민족의 동질감을 확인하는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북의 역사인물 인식 소개의 시작을 여는 인물로, 10월을 맞으며 안중근 의사를 선정하는 바이다.

먼저, 북의 정사(正史)인 『조선전사』에서의 안중근 의사에 대한 서술을 살펴보도록 하자.

“안중근(1879-1910년)은 20세기초 우리 나라 반일애국운동가의 한 사람이였다. 로일전쟁(역주: 러일전쟁)이후 일제가 조선에 대한 강점정책을 로골화하기 시작하자 안중근은 애국의 뜻을 품고 민족운동에 나섰다. 그는 처음에 민중의 지혜를 계발하여 국력을 기르는것이 독립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애국문화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대중속에서 문화계몽활동을 적극적으로 벌리는 한편 1906년에는 삼화부(오늘의 남포시 룡강군)에서 사립학교를 제우고 청소년들에게 반일 애국정신을 고취하였다. 또한 그는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자 이 운동을 추진시키기 위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벌리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날로 포악해지는 조건에서 문화운동이나 국채보상운동만으로는 독립의 뜻을 이룩할수 없었다. 그리하여 안중근은 직접 손에 무장을 잡고 반일의병투쟁을 벌릴것을 계획하고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당시 그곳에는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살고있었는데 그들 역시 일제의 조선강점정책에 대한 민족적격분을 참지 못하고있었다. 안중근은 그들로 반일의병대를 무어가지고 국내에 들어와 일제침략자들과 싸웠다. 이 의병대는 1909년 6월 함경북도 경흥(오늘의 은덕), 회령을 비롯한 북부국경 일대에서 일본《수비대》들을 습격함으로써 일제침략자들에게 일정한 타격을 주었다.

이와 같이 안중근은 당시 민족운동의 주요조류였던 애국문화운동에도 참가하였고 의병운동에도 참가한 열혈애국청년이였다. 그러나 이 운동들을 통해 뜻을 이루지 못한 안중근은 우리 인민을 망국의 비운에서 구원할 정확한 지도리론과 전략전술이 없었던 조건에서 명확한 투쟁방도를 찾지 못하고 침략의 원흉들을 습격처단하는 것이 반일구국의 가장 주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르렀다. 바로 이러한 때인 1909년 가을에 조선강점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며 대륙침략을 확대하기 인한 흉계를 가지고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또 히로부미가 《만주시찰》의 길에 나서게 되였다. 이해 10월에, 이또놈은 할빈에서 짜리로씨야(역주: 제정 러시아)정부의 재정부장인 꼬꼬브체브를 만나 《만주문제》와 《한일합병문제》에 대한 침략흥정을 벌리게 되여 있었다.

이또놈이 짜리로씨야대표와 《회담》하기 위하여 할빈(역주: 하얼빈)에 기여든다는 정보를 받은 안중근은 이 기회를 리용하여 이또놈을 처단함으로써 민족의 원쑤에 대한 복수를 하는 동시에 놈들의 흉계를 앞질러 파탄시킬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여러 동료들과 비밀리에 의논하고 급히 할빈을 향하여 떠났다.

신문을 통하여 이또놈이 10월 26일 아침 9시정각에 할빈역에 도착한다는것을 알게 된 그는 은밀히 할빈으로 들어갔다. 조선인민의 피맺힌 원쑤 이또놈을 태운 《특별렬차》는 예정된 시간에 할빈역에 도착하였다. 역구내는 짜리로씨야군대, 봉건중국군대로 삼엄한 경계망을 이루고있었으나 그는 은밀하고도 민첩한 동작으로 경계망을 뚫고 들어가 기차에서 방금 내린 이또놈에게 권총으로 복수의 명중탄을 퍼부어 그놈을 즉사시켰다.

이때 그는 원쑤를 쏴죽인 다음 《조선독립 만세!》를 몇번이나 소리높이 부름으로써 조선인민의 불굴의 애국적기상을 보여주었으며 침략자들을 전률케 하였다.

놈들에게 체포된 안중근은 려순감옥에 압송된후 놈들의 갖은 악형으로 하여 모진 고초를 겪었다. 그가 감옥에 갇혀있는 기간 교활한 원쑤들은 여러가지 간계와 회유로써 그를 굴복시키려고 꾀하였으나 그는 1910년 3월 26일 일제교형리들에 의해 회생될 때까지 애국적지조를 굽히지 않고 용감히 싸웠다.
《공판》석에서 안중근은 이또놈이 우리 나라에 발길을 들여놓은때부터 조선인민앞에 저지른 침략적죄행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유린한 사실, 민비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고종을 강제로 왕의 자리에서 내쫓은 사실, 《을사5조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사실, 교과서를 태워없애고 신문잡지를 금지한 사실, 사법권을 빼앗고 조선군대를 해산시킨 사실, 죄없는 인민들을 학살한 사실, 국채보상 운동을 파괴한 사실, 세계의 이목을 기만한 사실, 동양의 평화를 교란한 사실 등을 들면서 조선인민은 누구나 다 이에 분개하고있으며 일제와 싸울 각오로 가득차있다는것을 력설하였다.

애국청년 안중근이 일제침략의 원흉 이또놈을 처단한 사실은 당시 우리 인민들에게 반일애국심을 북돋아주었으며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조선전사』 근대편 2,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0, 258~260쪽.

『조선전사』에서 나타나는 북의 안중근 의사에 대한 평가는 기본적으로 남측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일정 부분 남측의 시각 및 강조점(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면모 강조, 『동양평화론』을 비롯한 각종 저작물 강조 등)과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북측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평가 중 강조하는 부분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 위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안중근의 반일독립투쟁(반일의병투쟁, 이또 히로부미 처단 의거 등)에 큰 의의를 둔 것을 들 수 있다. 초반에는 애국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일제 침략이 가속화함에 따라 한계점을 느끼고 반일의병투쟁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을 잘 서술하고 있다. 또한, 반일의병투쟁이 지도이론 및 전략전술적 부문의 미비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침략 원흉에 대한 습격처단을 주요한 투쟁 방식으로 채택하였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또 히로부미를 처단함으로써 민중들에게 반일애국심을 고무시키고 적잖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는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독적인 습격처단으로 침략자와 매국노 몇놈을 복수할수는 있었으나 발톱까지 무장하고 우리 나라 강점을 다그치는 일제침략자들은 물리치고 나라의 독립을 지켜낼수는 없었다. 이 투쟁은 그후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에 충분한 반일력량의 준비밀에 옳은 지도리론과 전략전술에 의거하여 투쟁이 령도될 때만이 민족해방의 성스러운 위업을 이룩할수 있다는 심각한 교훈을 남기였다.” 위의 책, 264쪽.

“조선청년들속에서 리준(이준)의 방법이 옳은가, 안중근의 방법이 옳은가 하는 문제가 화제에 올라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던 시기도 바로 이무렵이였다. 많은 청년학생들은 안중근의 투쟁방법에 절대적인 의의를 부여하고있었다.

나는 상월선생에게 안중근의 투쟁방법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상월선생은 그때 안중근의 소행은 물론 애국적이다, 하지만 투쟁방법은 모험주의적이라고 말하였다. 선생의 그 대답은 나의 생각과 일치하였다. 나는 일본제국주의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은 결코 큰 군벌의 앞잡이 한두명을 처단하는 테로적 방법으로는 승리할 수 없으며 반드시 인민대중을 교양하고 각성시켜 전민을 궐기시킬 때에만 목적을 달성할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1,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152쪽.

물론, 북은 이와 같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투쟁의 한계점 역시 지적한다. 기본적으로, 단독적 의거투쟁(개인테러 및 산발적 투쟁)을 통하여 침략자 및 매국노 몇 명에 대한 복수는 가능할지언정 일제의 침략 자체를 무찌르고 나라의 독립을 지켜낼 수 없다고 지적한다. 또한, 안중근 의사의 애국계몽운동과 반일의병투쟁 역시 실패한 원인에 대해서도 제대로 그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민족해방을 위한 올바른 지도이론과 전략전술이 부재하여 전체 민중을 충분히 항일투쟁으로 조직·지도하지 못했던 것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후 항일독립투쟁에서 철저한 준비의 필요성과 전체 민중을 조직·지도할 올바른 지도이론과 전략전술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고 밝힌다.

이와 같은 명확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북은 안중근 의사의 애국정신과 그에 기초한 항일독립운동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비록 애국계몽운동 및 반일의병투쟁이 실패하고 이또 히로부미에 대한 처단투쟁 자체만으로는 일제의 조선 점령을 막을 수는 없었을지언정, 의거를 통해 조선민중들에게 반일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항일독립투쟁에 동참케 하는 적잖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후의 항일독립투쟁의 전개 및 발전에 있어서 교훈을 준 점(개인적 의거투쟁이 아닌 무장투쟁을 통한 전민항쟁 방식, 민중을 조직·지도하기 위한 올바른 지도이념 및 전략전술의 필요성 대두 등) 역시 안중근 의사 의거투쟁에 일정한 역사적 의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조선예술영화촬영소, 1979년) 중 장면과 북의 안중근 의사 탄생 125주년 기념 우표)

결론적으로, 북은 안중근 의사 자체의 개인적·방법론적 한계는 있지만 항일독립투쟁 전반의 역사에서는 적잖은 영향(조선민중의 반일애국심 고취 및 올바른 투쟁방식의 필요성 대두 등)을 미친 것을 높게 평가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항일무장투쟁 준비기에도 조선 청년들을 조직·교양하는 데 안중근, 이준 등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의 독립투쟁 일화가 활용되었고,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와 같은 문학예술작품(혁명연극, 영화 등)이 제작되며 현재까지도 남북이 함께 존경하는 역사인물로 선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