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북한교화의 시작

윤창원(서울디지털대)

원불교의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는 「금강산은 천하의 명산이라 멀지 않은 장래에 세계의 공원으로 지정되어 각국이 서로 찬란하게 장식할 날이 있을 것이며, 그런 뒤에는 세계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그 산의 주인을 찾을 것이니, 주인될 사람이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 없으면 무엇으로 오는 손님을 대접하리요.」(전망품 5장)라고 하셨다.

통일로 가는 길목에 금강산이라는 인연지가 있으며, 그로 인해 통일이 될 것임을 예지하신 것으로 이해된다. 원불교 2대 최고지도자인 정산 종사의 건국론, 원불교 3대 종법사인 대산 종사와 4대종법사인 좌산 상사, 5대 최고자도자인 경산 종법사님의 통일법문은 대종사의 금강산 법문을 현실에 되새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원불교의 북한교화에 대한 첫 인연으로는 원불교 초기 대표적 교화자로 인정되는 장적조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본다. 장적조는 1936년(원기21) 해운사업을 하는 아들이 청진으로 이사하자, 같은 거주지의 인연들 7명을 입교시키고, 1937년에는 만주로 진출하여 각지에 행상을 하며 용정, 목단강시, 장춘, 심양 등 중국 동북지방에서 교화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12월에는 목단강시에 정착하여 1945년 5월 29일까지 중국인 일부를 포함한 북한지역출신 교도 218명을 확보하였다.

통일 후, 최초에 교당을 세운다면 먼저 한국전쟁 전 교당을 두고 교화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던 개성을 생각하게 된다. 1937년(원기22) 12월, 개성교당 이천륜 교도의 원력과 경성지부 이동진화 순교무의 주선으로 김영신 교무가 개성 교무로 부임하였다.

1938년부터 이천륜 교도의 집에서 법회를 보기 시작하여 동년 8월 덕암동에 교당을 마련 ‘개성출장소’ 간판을 붙이게 되었다.

덕암동교당(개성출장소)은 선죽교가 내려다보이는 ㄷ 자형 한옥으로 일반 출석교도는 20명, 중학 야학과정을 개설하여 6-70명의 청소년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1946년(원기31) 4월 개성출장소가 발전하여 개성지부로 승격되었고, 1947년 덕암동 교당을 매각, 시내중심지 북안동 312-2번지에 있는 한옥을 인수하고여자금강청년단을 조직, 직조업을 개시하였다. 동년 7월 3일 정산종법사를 모시고 800명의 대중이 모인 가운데 봉불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개성교당 법회출석 규모는 70여명 전후였다고 한다.

1949년에 개성시내 자남동 송도고등학교 근방에 20여칸의 한옥 기와집을 인수하여 개성 여자수양원을 설립하는 한편 직조공장을 그곳으로 이전하였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4 후퇴 때 이순석 교무가 피난하고 이후 분단이 되면서 북한지역에서의 교화가 중단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