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자사 진​
박경순

덕흥리 벽화 무덤: 유주자사 진

고구려의 짧지 않은 역사에는 적지 않은 대소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많은 사건가운데는 4세기 70년대를 빛나게 장식한 유주 진출도 있다. 이 유주진출로 말하면 B.C. 108년 고조선이 한나라의 침략으로 망한 후 그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하여 수백 년 동안이나 장구한 투쟁을 줄기 차게 벌인 고구려가 370년 말 나라의 서북방에 조성된 유리한 정세를 이용하여 만리장성 계선을 넘어 오늘의 베이징 부근 일대까지 원정하였던 사건이다. 고구려는 이 지역에 임시로 자기의 주-유주를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였으며 일정한 기간 군사를 주둔시켜 고구려를 위협하던 침략 세력에 대한 일대 소탕전을 전개하였다. 그때 유주 지역에 파견되었던 고구려의 관리는 진이라는 사람이였다.

고구려의 유명한 광개토왕 시기인 영락 18년(408년)에 오늘의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에는 큰 벽화무덤이 만들어졌다. 회죽미장을 매끈하게 한 무덤 칸의 벽면에는 무덤에 묻힌 사람의 생존시 활동이 채색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이 바로 고구려의 유주진출 당시 활약한 유주자사 진이다.

때는 370년 10월의 어느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고구려의 임금이었던 고국원왕은 진을 대궐로 불러들였다.

진은 젊어서부터 무술에 능하여 외적을 쳐물리치는 전장에서 많은 공로를 세우고 여러 급의 장군직을 역임하다가 지금은 왕궁을 호위하는 장군인 룡양장군으로 지내고 있었다. 이런 경력으로 하여 진은 고국원왕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었으며 어떤 중대사가 제기되면 임금은 많은 경우 그에게 위임하군 하였다.

지금 그를 부른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다.

《소신 진 어명대로 대령하였소이다.》

《이리 가까이 오라구.》

진은 몇걸음 더 앞으로 나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임금의 말을 기다렸다. 얼마쯤 동안을 두었다가 임금이 진에게 물었다.

《그대는 지금 우리가 서쪽에서 벌여 놓은 싸움을 어떻게 생각하는고? 그대의 소견을 숨김없이 말해보도록 하라.》

《신의 소견을 감히 여쭙건대 이번 전연과의 전역은 우리 대고구려의 국력을 과시하는 절호의 기회인 줄로 아옵니다. 더군다나 전연하고는 셈을 치를 게 많지 않소이까.》

《장군의 말이 옳도다. 임인년의 참화를 회고하면 짐은 절치부심의 격정이 북받쳐 침전에 들었다가도 부지불식간에 소스라쳐 깨여나군 하노라. 그대는 그때가 10대 초의 소년이었겠다?》

《그렇소이다. 하지만 신은 그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우리 고구려가 당한 수치를 어떻게 쉬이 잊을 수 있겠나이까.》

임금과 진이 말한 임인년의 참화란 342년에 있은 전연과의 전쟁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해 겨울 모용황을 우두머리로 하는 전연의 군사가 고구려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전술상 착오로 하여 그를 성과적으로 물리치지 못하였다.

이때 적들은 북도와 남도의 두 길을 따라 고구려의 전방지휘부가 자리잡고 있던 환도성(오늘의 료녕성 환인동북방)으로 달려들었다. 적들은 이 두길가운데서 넓고 평탄한 북도로 1만 5 000명의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군의 주의를 그쪽으로 쏠리게 하고는 험하고 좁은 남도로 4만명의 정예부대를 들이밀어 불의 침공을 기도하였다.

그런데 고구려군의 지휘부는 이 기도를 제 때에 간파하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적들이 대군으로 밀려오는 것만큼 주력의 침입노정은 북도일 것이라고 타산하고 여기에 5만 명의 군사를 배치하고 남도에는 1만 명정도의 병력만을 배치하였다. 그 결과 북도에서는 적장이하 침략군을 전멸시켰지만 남도에서는 적군 수만 명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바람에 전선이 돌파당하고 환도성까지 내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국원왕 자신은 소수 병력의 호위를 받으며 겨우 위기를 모면했으나 태후(왕모) 주씨는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여 적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북도로 나갔던 고구려군의 주력이 엄중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환도성으로 달려오자 적들은 비열하게도 임금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무덤을 도굴하여 시신과 많은 재물을 걷어 싣고 황황히 도망쳐버렸다.

그 이듬해에 고국원왕은 전연에 사신을 파견하여 낮은 자세에서 숱한 물건들을 주고 부왕의 시신과 태후를 되돌려 받기 위한 교섭을 벌렸다. 하지만 전연 측에서는 미천왕의 시체만 돌려주고 태후는 인질로 억류해놓고 있다가 10여 년이 지난 355년에야 돌려보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고구려와 전연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그 후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와신상담하며 치욕을 씻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때로부터 20여년세월이 흘러갔다. 바로 이해 (370년) 초 전진과 전연 사이에 큰 싸움이 붙었다. 여기서 전연은 연전연패하여 궁지에 몰렸다. 이것은 고구려에 있어서 전연에 대한 일대 반격전을 개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서북방의 정세를 주시하고 있던 고구려는 10월 초 중무장한 개마(갑옷을 씌운 말)부대를 선두로 하여 전연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그것은 말 그대로 파죽지세의 공격이었다.

고국원왕의 말은 계속되였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수십년간 참아온 치욕을 만회할 수 있는 때로다. 그대도 알겠지만 우리 고구려의 대군은 지금 만리장성을 넘어가 유주지역을 휩쓸고 있소.》

《실로 희세의 장거로소이다. 이러한 때 거기에 참가하지 못하는것이 한스럽게 생각되오이다.》

진은 자기의 심정을 그대로 내비쳤다.

《그대의 심중을 내 다 아노라. 그래서 그대를 불렀도다. 전쟁의 성과를 공고히 하자면 우선 요동지방을 완전히 안정시켜야 하느니라. 그래서 짐은 그대를 새로 점령한 요동군의 태수로 보내려고 하오. 장군은 그곳에 가서 우선 민심을 수습하고 진격하는 우리 군사들의 뒤바라지를 잘해야 하겠소.》

《분부만 내리시오이다. 그러면 소인은 맡은 바 직책을 어김없이 수행하겠나이다.》

요동태수로 부임한 진은 현지에서 맡은 소임을 짧은 기간안에 재치 있게 수행하였다. 370년 11월 고구려군이 연계(베이징근방)지방까지 쳐들어가자 전연의 수도를 함락시킨 전진군이 북상하였다. 두 나라는 공동으로 전연 잔여세력을 격파하였다. 그런데 이것으로 전연세력이 밑뿌리채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이런 형편에서 고구려는 당분간 점령지역을 유지하면서 전연의 잔여세력을 철저히 짓부수기로 하였다. 고국원왕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인재는 이미 요동군에서 경험을 쌓은 진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급히 불러들였다.

진이 왕궁에 당도하자 고국원왕은 그를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짐은 연계지방까지 영원히 차지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근 백년세월을 두고 우리나라를 괴롭혀온 모용선비 놈들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짓눌러놓아야 해. 그래야 전쟁의 화근을 막을수 있다. 그러자면 수완이 있는 장군을 보내야겠는데 짐은 유주 자사로서 그대가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그대는 속히 그곳으로 가서 전연의 무리들을 사정보지 말고 쳐 갈기도록 하라.》

《삼가 분부를 받들겠나이다.》

《뒤일은 그다음에 가서 보련다. 아무튼 이번의 유주원정은 고구려의 국위를 천하에 다시 과시할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렸다.》

고국원왕은 계속하여 백제와 신라 등과 같은 겨레의 나라들을 대고구려가 포섭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그를 위한 남방진출이 바야흐로 일정에 오른 것만큼 서북방의 안전을 위해서도 그 일대에서 침략의 근원을 제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성상의 어지는 참말로 원대하옵니다.》

이렇게 되어 진은 유주의 장관으로 부임하여 갔다.

덕흥리 고분벽화 행렬도

며칠 후 유주의 소재지인 연계(베이징일대)에는 굉장한 행렬이 나타났다. 북소리, 뿔나팔소리가 한데 어울려 요란스럽게 울리는 속에 자사 일행이 탄 수레들이 개마무사들을 비롯한 많은 군사들의 위엄있는 호위와 관리들의 안내를 받으며 현지에 도착했던 것이다. 이때의 요란한 행렬상황이 벽화의 한 부분에 그대로 그려져 있다.

유주자사로 임명된 진은 13개의 군으로 이루어진 유주의 통치질서를 수습 정리하는 한편 강력한 군사에 의거하여 전연의 잔여세력에 대한 소탕전을 벌려 그것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겨레와 강토를 통일하기 위한 고구려의 남진 정책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본격적인 추진단계에 들어섰다.

고구려의 유주 진출은 여기에만 의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유주진출로 하여 고구려는 대릉하하류-의무려산줄기계선 이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동족의 나라였던 고조선의 옛 땅을 완전히 되찾게 되었다.

그 후 고구려는 유주 지역에서 침략위험이 기본적으로 제거되고 정세가 완화되자 376년초 여기에서 주동적으로 철수하여 대릉하계선 즉 이전의 고조선지역까지 물러났다. 고구려로서는 고조선의 옛 땅만 되찾으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덕흥리무덤의 벽화는 이러한 고구려의 유주진출을 반영하고있다.

무덤의 주인공인 진은 고구려의 신도현 중감리(오늘의 평안북도 운전군 가산리)출신의 귀족관료로서 젊어서부터 벼슬살이를 하다가 40대의 한창나이에 유주자사까지 지냈으며 77살에 죽었다.

이처럼 그는 고구려가 자기의 국력을 세상에 떨치게 하는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으며 그것으로 하여 훌륭한 벽화무덤에 묻혔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