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명시대의 마중물, 신석기 농업혁명

[새로 쓰는 고조선 역사](3) 한반도의 신석기 농업혁명

 

박경순 우리역사 연구가

 

 

 

한반도 신석기 농업혁명- 고대문명 탄생의 어머니

 

우리들에게 신석기 시대의 표상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돌을 도구로 사용하던 매우 원시적인 사회, 구석기 시대와는 달리 돌을 갈아서 도구를 만드는 시대 정도일 것이다. 구석기 시대와 비슷하지만 석기의 형태가 구석기 보다 조금 발전한 사회라는 게 대다수의 인식이다. 하지만 신석기 시대는 인류의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대변혁의 시대였다. 인류는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농사는 인류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사회적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을 초래했다. 이러한 신석기 시대의 대변혁을 가리켜 신석기 농업혁명이라고 부른다.

인류 최초의 혁명이라할 수 있는 신석기 농업혁명은 여느 혁명과 달리 수천 년에 걸쳐 매우 서서히 완만하게 일어났다. 그러다보니 혁명이라는 낱말이 갖는 뉘앙스에 걸맞지 않아 보인다. 보통 혁명이란 매우 빠르고 급격하게 질적 전환과 도약이 발생하는 것을 지칭하는데,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신석기 농업혁명은 혁명이라는 용어에 걸맞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석기 농업혁명은 혁명이다. 그 어떤 다른 혁명보다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았으며, 인류의 문명시대를 여는 마중물의 역할을 수행했다.

인류는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농업이라는 새로운 산업을 발명했다. 사람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단순 채취노동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생산노동으로 노동의 성격이 변화했으며, 깬(타제)석기로부터 간(마제)석기로 노동도구의 발전이 이룩되었다. 이로써 인류의 경제체제는 채취와 수렵 등 채취경제체제에서 벗어나 농업과 목축 중심의 생산경제체제로 바뀌었으며,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고, 잉여생산물이 축적되고 사회적 분업이 형성 확대 발전되었다. 또한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인류의 삶은 땅에 고착되면서 항구적 정착생활이 이루어지고, 마을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씨족과 종족의 발전 등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초래했다. 이것이 신석기 농업혁명이며, 고대문명 발생의 어머니 역할을 담당했다.

신석기 농업혁명은 세계 모든 지역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고대문명의 발상지라고 불리는 몇몇 지역에서 먼저 신석기 농업혁명이 발생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곳에서 발생한 신석기 문화가 보급 전파되면서, 농사와 목축이 시작됐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농사 대신 유목생활을 영위하기도 했다. 신석기 시대 유목 생활만을 했던 지역에서는 고대문명이 자체로 발생하지 못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신석기 농업혁명이야말로 고대문명 발생의 핵심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신석기 농업혁명이 발생했다.

 

 

한반도 신석기 문명을 창조한 주인공들은 누구인가?

 

인류는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오랜 발전과정에서 이루어진 유전학적 계승성과 일정한 지역을 포괄하는 문화적 공통성 등에 의해 하나의 인류학적 유형으로 묶이게 되었다. 이는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종족 겨레와 같이 다른 사회적 집단과 구별되는 동질적인 사회적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특정 인류학적 규정으로 묶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현대 한국인들의 기원은 신석기 시대로까지만 거슬러 올라가 논의될 수 있다. 즉 현대 한국인들의 기원을 논의할 때 그 출발점을 한반도 신석기 시대로 본다. 우리들의 직접적 선조를 논의할 때 신석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다보니 한반도 구석기인들과 현대 한국인들과는 아무런 혈연적 관계가 없는 것처럼 오해되고 있다. 즉 우리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식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인의 외래기원론이 스며들면서 한반도 신석기 문화를 창조한 주체 문제가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 신석기 문화를 창조한 주인공들은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왔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된다. 한반도에서 신석기 문화를 창조한 주인공들은 외부로부터 흘러들어온 이주민 집단이 아니라, 구석기 시대에서부터 한반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직계 후손들이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동안 횡횡했던 2단계 주민이동설과 같은 대규모 주민이동이 없었으며, 한반도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사이에 시간적 공백이 없었으며, 인류학적 연구결과 한반도 후기 구석기인들과 현대 한국인 사이에는 중국인이나 몽고인, 일본인, 퉁구스족이나 고아시아 족과는 다른 독특한 인류학적 특징을 공통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신석기 문화의 전개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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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고산리 유적지

한반도에서 신석기 시대가 열린 것은 기원전 8000~1만 년경부터이다.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신석기 유적 중에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제주 고산리 유적이다. 고산리 유적은 제주 수월봉 앞 해안단구 대지에 넓게 형성되어 있는 초기 신석기 시대 유적으로, 석기 9만9000여 점, 토기 1000여 점이 발굴되었다. 이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후기 구석기 최말기(기원전 1만년)에서 신석기 초기로 이행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즉 한반도에서 후기 구석기 시대에 살고 있던 신인(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들의 직계 후손들이 고산리식 토기 등 신석기 문화를 창조하면서 한반도 신석기 사람들로 발전해 갔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현대 한국인들의 직계 조상으로 되는 한반도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일찍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역사책들에서는 신석기 시대에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비중을 어떻게나 낮춰보려는 접근법이 횡횡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반농 반어, 또는 반농 반수렵식의 표현들이 바로 그것이다. 수렵과 채취, 어로행위는 신석기 시대뿐 아니라 고대 중세에 이르기까지 민중들의 보조적인 생계방식의 하나로 계승되어 왔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긴 했지만 아직 농사에 의존하는 비중이 매우 낮았다는 식의 폄하는 더 이상 피해야 한다. 농사는 지배적인 생산양식으로 주요한 생계 방식이었으며, 수렵 채취, 어로는 보조적인 생계 방식에 불과했다. 한반도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일찍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농업을 주업으로 삼고 항구적 정착생활을 했고, 신석기 농업혁명을 일구어 나가면서 고대문명을 창조해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족을 가리켜 유목민족이라고 오해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유목민족은 농사를 주업으로 삼지 않고 목축을 주업으로 삼고 이동생활을 한 종족들을 가리킨다. 유목민족은 자체적으로 신석기 농업혁명을 거쳐 고대문명 창조로 발전하지 못한 민족이다. 우리 민족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일찍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신석기 농업혁명을 통해 고대문명을 창조해 나간 농경민족이다. 우리나라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 초기부터이며, 그 중심지역은 한강과 대동강 등 한반도 중서부지역이다. 한강과 대동강 유역에서 발원한 농업은 한반도 전 지역과 중국의 동북지역, 연해주 지역 등 우리겨레가 살던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한강유역이 한반도 신석기 문화의 중심지의 하나라는 것은 이 지역에 다수의 구석기 유적들이 존재했으며, 암사동 유적을 비롯한 신석기 유적들이 다수 몰려 있는 것으로 증명된다. 그 중에서도 동아시아에서도 가장 빠른 시기에 벼를 재배했다는 사실이 최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청원 소로리에서는 기원전 1만500년경 고대 볍씨가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볍씨이다. 또 충주 조동리 신석기 유적에서 기원전 4200년경 볍씨, 일산 가와지에서 기원전 3300년경, 김포 가현리에서 기원전 2000여년경 볍씨가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볼 때 이미 신석기 시대에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동강 유역 역시 한반도 신석기 문화의 중심지의 하나이다. 북한에서는 대동강에서 한강에 이르는 신석기 문화를 궁산문화라 명명하고 한반도 신석기 문화의 중심지로 보고 있다.

한반도 신석기 농업혁명은 전기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에 걸쳐 매우 완만하게 진행되었으며, 독자적으로 농사방법과 농사 도구를 개발하고 발전시켜 갔다. 신석기 농업혁명의 중심지인 대동강유역의 궁산문화를 보면 크게 4기로 구분되는데, 궁산문화 1기는 신석기 시대 초기로서 주민들은 정착생활을 하면서 괭이농사를 지었고, 수렵과 어로, 질그릇 제작과 실낳이(방직) 등의 생산 활동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다음으로 궁산문화 2기와 3기는 신석기 시대 중기에 해당되며 1기보다 발전된 농사방법인 보습농사를 지었다. 이는 지탑리 유적 집터에서 돌보습, 돌삽, 돌낫과 함께 피 혹은 조로 보이는 탄화된 낟알들이 질그릇에 담긴 채 발견된 것으로 알 수 있다. 괭이농사에서 보습농사로의 전환은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왔으며, 잉여생산물의 축적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마지막으로 궁산문화 4기는 신석기 시대 후기에 해당되는데 이 시기에는 농업생산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잉여생산물을 축적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갔다. 이는 평양 호남리 남경유적 31호 집터에서 12쌍의 갈돌과 숯이 된 좁쌀과 더불어 높이가 84cm나 되는 큰 독을 비롯해 120여 개의 질그릇이 출토된 것으로 증명된다. 잉여생산물이 축적되는 단계로 발전했다는 것은 이미 계급 발생의 전제조건이 숙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농업과 수공업의 사회적 분업이 광범히 이루어졌다.

 

 

한반도 신석기 문화는 독창적인 토착문화이다

 

한반도 신석기 문화를 창조한 주인공들은 외부로부터 이주해온 이주민 집단이 아니라 한반도 토착인들이며, 그 문화는 외래에서 유입된 이식문화가 아니라 한반도 신석기인들이 창조한 독창적인 문화이다. 그 시대 문화의 독창성은 질그릇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 흔히 신석기 시대를 질그릇의 시대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것이 이 시대의 발명품이자 그 시대의 과학기술과 문화의 상징코드이기 때문이다. 신석기 시대의 질그릇 가운데는 형태도 세련되고 그것을 여러 가지 무늬로 장식함으로써 하나의 공예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것은 그것이 생활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생활수단이자 미적 요구와 감정 취미와 기호를 담아내는 문화수단이기도 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질그릇을 통해 신석기 시대의 문화적 코드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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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신석기 문화의 독자성은 질그릇의 제작방법과 표면장식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나라 질그릇은 그 당시 이웃나라 신석기 시대 질그릇들과 달랐다. 이웃나라 신석기 시대 질그릇들은 아가리와 손잡이를 사람 또는 짐승 모양으로 만들어 형태가 심하게 굴곡지고 복잡하여 조잡한 느낌을 주는데 반해 우리나라 것은 형태를 비교적 단순하게 만들고 직경과 높이의 비례를 안정감 있게 조화시켜 간결하면서도 세련되고 우아한 느낌을 준다. 또한 겉면 장식 역시 새김무늬로 간결하고 선명하게 장식해 부드럽고 연하며 담담하고도 아담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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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부터 시베리아, 중국, 우리나라의 신석기 질그릇

여기서 새김무늬는 옛날에는 빗살무늬라고 부르면서 시베리아에서 노르웨이에 이르는 북위 50도 이상 지역에서 나타나는 문화양태로서,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가 이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해석했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시베리아의 빗살무늬 그릇과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질그릇은 형태나 무늬의 제작방법과 양식에서 질적 차이가 있음이 밝혀졌다. 게다가 우리나라 신석기 질그릇이 시베리아 것보다 그 시기가 빠르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베리아 지역의 빗살무늬 그릇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게 아니라 독창적으로 창조되어 발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 질그릇을 새김무늬 질그릇이라고 명명하는 게 적절하다고 본다.

 

 

한반도 신석기 시대의 사회관계

 

우리나라에서는 한반도 후기 구석기인들이 신석기 문화를 창조하면서 신석기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오랜 신석기 시대에 걸쳐 한 갈래의 핏줄이 이어지고, 지역에 고착되어 대를 이어 살아오면서 문화적 공통성을 형성했다. 그 결과 현대 한반도인의 원형인 우리겨레가 형성되었다. 이처럼 신석기 시대는 우리 민족의 원형으로 되는 우리겨레가 형성된 매우 의미 있는 시대이다.

인류는 원시적인 무리생활로부터 벗어나 대우혼에 기초한 모계 씨족사회로 발전해 가는데 우리나라에서 모계 씨족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후기 구석기 시대이다. 모계 씨족 공동체 사회의 특징은 씨족 공동체의 집단생활을 운영하는 사회적 기능을 여자가 담당 수행했다는 데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의 생산 활동과 생활에서 여성들의 지위와 역할이 남성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후기 구석기 시대에서부터 씨족사회를 이루고 움집을 짓고 정착생활을 시작했으며, 씨족 평의회라는 원시적인 정치조직을 통해 씨족 내의 모든 일들을 결정해 가는 원시 민주주의가 시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모계 씨족제도는 더욱 발전했다. 이 시대 사람들의 사회관계에서 기본으로 된 것은 원시적인 집단생활과 집단 생산활동, 생산수단에 대한 공동소유, 생산물에 대한 균등분배에 기초한 공동체적 관계였다. 농사가 시작되면서 항구적인 정착생활이 이루어졌고, 마을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원시적인 농업과 질그릇 만들기, 방적(실낳이)을 비롯한 수공업의 직접적 담당자는 여성이었으며, 따라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높았다. 그리하여 모계 씨족사회는 더욱 더 공고화되고 발전되었으며, 씨족 조직 또한 더욱 강화되고 사회적 기능도 높아졌다. 씨족에는 최고기관으로서 씨족 안의 모든 성원들이 참가하는 씨족평의회가 있었는데 여기서는 생산 활동, 제사, 씨족의 방위 및 기타 씨족 앞에 제기되는 중요한 문제가 토의 결정되었다. 또한 생산력이 발전하고 주민이 차츰 늘어나면서 씨족의 구성과 조직이 더욱 체계화되고 풍부해졌으며, 사람들의 거주지역도 더 넓어졌다. 그리하여 모계 씨족 공동체 시기 사람들은 씨족, 부족, 종족 등에 뭉쳐 생활했다.

모계 씨족 공동체 사회로부터 부계 씨족 공동체 사회로 이행이 시작된 것은 신석기 시대 중기로 대동강 유역에서는 대체로 기원전 6000년 후반기~5000년 전반기이다. 이 시기에 모계 씨족 제도의 태내에서 부계제적 요소가 싹트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된 데는 괭이농사로부터 보습농사 갈이농사로 발전함에 따라 경제생활에서 남성의 생산노동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것과 관련 있다. 돌보습을 메고 연장을 끌어 땅을 갈아엎는 일을 비롯해 농사일의 힘든 부문은 남자들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었다. 생산활동에서 남성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생산의 조직과 지휘를 비롯하여 공동체의 관리에서 점차 남성의 발언권이 커지게 되었다. 이렇게 됨에 따라 남자들이 처와 아이들을 자기 씨족으로 데려다가 가정을 이루기 시작했으며, 대우혼은 점차 일부일처제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모계 씨족 사회관계는 붕괴되면서 부계제가 싹터 자라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신석기 시대 후기에 이르면 신석기 시대 중기에 싹트기 시작했던 부계제적 요소가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어 모계 씨족사회로부터 부계 씨족사회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다.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주요 유적은 제주 고산리 유적 서울 암사동 유적, 부산 동삼동 유적, 고성 문암리 유적, 양양 오산리 유적, 함경도 서포항 유적, 평남 온천군 운하리 궁산 유적, 평양시 사동구역 금탄리 유적,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남경 유적,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유적 등 전국 방방곡곡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 유적지들에서는 농사에 필요한 뿔괭이, 돌괭이, 돌보습, 집짐승 기르기와 관련된 유물, 사냥과 어로에 쓰인 돌활촉, 뼈활촉, 그물추 작살 낚시, 방적과 관련된 가락바퀴 등이 다수 발굴되고 있다.

 

 

박경순 우리역사 연구가

– 1956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1977년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수학했다.
– 대학 2학년을 중퇴하고 인천 등지에서 현장활동하다 1985년 구속되었다.
– 이후로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진보정당운동에 몸담다가 1998년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4년9개월간 복역했다.
– 2008년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 부소장, 2012년 통합진보당 부설 진보정책연구원 부원장 등을 역임했다.
– 고조선 역사와 선사시대를 아우르는 책 <새로 쓰는 고조선 역사>는 40년 만에 다시 역사학도로 돌아온 그의 첫 번째 결과물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이다.
– 진보운동 관련 저서로는 <21세기 진보적 민주주의>(새세상연구소), <마녀Vs마녀>(아고라) 등이 있다.

 

박경순 우리역사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