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에 울린 첫 총소리,

그 범죄의 내막

1945815, 일제의 패망으로 한반도에 드리웠던 압제의 검은 구름은 물러가고 우리 민족이 그처럼 바라던 광복의 날은 왔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일제 식민지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기쁨이 한없이 메이리 치고, 사람들의 가슴마다에는 그야말로 희망의 고동이 맥박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그어놓은 38선으로 하여 한반도는 두동강나고 38선 이남을 강제로 점령한 미군에 의해 남녘 땅에 부풀던 환희와 희망은 어느새 사그라들게 되었다.

38선 이남에서의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연합국들 사이에 맺어진 전시협정을 명분으로 미군은 일제 패망 채 한달이 안된 19459838선 이남을 점령했다.

그날 새벽 3시경 하지를 사령관으로 하는 미군 제24군단을 실은 함대가 인천 앞바다에 들어섰다.

이 함대가 오끼나와를 떠난 것은 3일전인 95일 새벽이였다. 그때 오끼나와섬의 태평양 연안에는 미 제7함대 소속의 함선 40여척이 모여 있었다. 하지는 그곳에서 <블랙리스트>라는 암호명의 작전명령을 받았다. 이 작전의 내용은 미군을 한반도에 투입할 것, 조선의 수도이자 교통의 중심지인 서울을 장악할 것, 서울을 장악한 다음 부산을 비롯한 여러 지역으로 확대할 것, 점령한 지역에서 군정을 실시할 것 등이였다. 이와 같은 임무가 하지의 미 제24군단에 하달된 것은 당시 이 군단이 한반도와 제일 가까운 오끼나와에 주둔해 있었기 때문이였다.

사실 이보다 앞서 827일 하지는 필리핀의 마닐라에 있던 맥아더(당시 미극동군 총사령관)에게 불려가 다음과 같은 명령을 직접 받았다.

귀관은 한반도에 진주하는 미군의 최고사령관이다. 일본군의 항복을 받은 후 <미군정>을 실시하라. 이 지침의 수행을 위한 세부계획을 작성하라.”

이튿날 오끼나와로 되돌아온 하지는 명령수행을 위해 그 즉시 군정 실시를 위한 미군정 기구를 만들었다.

38선 이남에 대한 군사적 강점을 위해 군대를 출발시키기에 앞서 하지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군이 한반도 남쪽을 점령하건 태평양의 어떤 섬을 점령하건 그것은 모두 점령이다. 우리는 적의 점령지대를 점령하는 점령군이다. 우리의 행동도 이에 상응하는 것이 될것이다.”

한반도 38선 이남을 점령지대로 규정하고 그 준비를 갖춘 미 제24군단은 마침내 95일 오끼나와를 출발했다.

미군의 인천상륙은 바로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미군의 인천상륙에 깔려있는 범죄적 기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못했다. 단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온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인천항에 많은 군중이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나와있었다는 사실이 잘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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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94598일 인천항에 상륙한 미군 (출처:인터넷 위키백과)

하지만 98일 인천항에 울린 총소리는 미군의 상륙이 곧 점령군으로서 미군 범죄의 시작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알렸다.

그날 일제 경찰은 미군을 해방군인줄로만 알고 환영나왔던 군중들에게 마구 사격을 가하였다. 이로 하여 해방된 땅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할 무고한 조선사람들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참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마치 일제 경찰에 의해 빚어진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유혈 참극을 연출한 장본인이며 주범은 바로 미군이였다. 왜냐하면 일제에게 살인권한을 부여한 것이 다름아닌 미군이였기 때문이다.

그 범죄의 내막을 보기로 하자.

당시 미국은 한반도에 병력을 파견할 형편이 못되였다.

왜냐하면 미군 무력이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오끼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해 있었고 또 한반도에 상륙시킬만 한 수송수단도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1945724일 당시 미육군 참모총장이였던 마샬이 연합국 포츠담 회의에서 한반도에서 미군이 작전을 펼수 없는 처지에 있다고 말한 사실과 미국 정부안에서도 38선 문제를 논의하면서 당시 형편에서 병력수송 문제와 기타 사정들로 하여 38선 이남에 있는 일본군대의 무장해제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한 사실들이 증명해주고 있다.

이에 미국은 아직 38선 이남에 그대로 남아있는 일제의 무장력을 이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군이 서울에 진주할 때까지 이른바 치안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미극동군 총사령관이였던 맥아더는 일제가 패망한지 5일이 지난 1945820일 당시 조선총독이였던 아베에게 특별명령을 내렸다. 그 내용은 38선 이남의 치안을 전적으로 책임지라는 것, 만약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처벌하겠다는 것이였다. 이것은 결국 미군이 서울에 진주할 때까지 38선 이남의 주인인 우리 민족이 스스로 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하지못하게 막으며 또 그것을 막지 못하면 처벌하겠다는 일종의 명령이고 위협이였다.

한마디로 8.15 해방 후 일제 경찰에 의한 치안유지란 미군의 군사적 점령을 실현하는데서 빈구석을 메우기 위한 하나의 미봉책이라고 할수 있었다.

이것은 일제에게 살인권한을 부여한 장본인이 다름아닌 미군이였다는것을 말해주고 있다.

일제 경찰은 바로 미군이 부여한 이 권한을 가지고 99일에는 서울시 성북구에서, 그 다음날에는 서울 각지에서 해방만세를 부르는 청년들에게 총을 난사하여 학살했다.

일제 경찰이 인천항에서 감행한 총격사건을 두고 미군이 자기들에게 내린 명령에 따라 치안과 질서유지를 위해 발포했다.”고 정당화한 사실과 미군이 이 사건을 일제 경찰의 공무집행이라고 종결해버림으로써 마땅히 징벌을 받아야 할 행위가 무난히 막을 내리게 한 사실들은 과연 누구에 의해 인천의 하늘가에 범죄의 총소리가 울려퍼졌는가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미군의 인천상륙은 결코 일본군의 무장해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이남을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려는데 있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였다.

이처럼 194598일에 감행된 미군의 인천상륙은 미군범죄의 첫 시작이였으며 인천부두가에 울린 총소리는 침략자, 강점자, 범죄자로서의 미군의 실체를 드러낸 첫 움직임이였다.

역사는 말한다. 194598일이야말로 이 한반도 남녘땅이 일제를 대신한 미군의 군화발 밑에 짓밟힌 저주로운 날, 민족비운의 날이였으며 미군범죄의 막이 오른 치욕의 날이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