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응변의 전술로 성을 사수한 박서 

안광획


(사진: 구주성 남문과 성벽. 평북 구성군 소재.)

정황이 수시로 변하는 전투 행정에서 그때그때의 사정과 형편을 보아가며 그에 맞게 대응하는 것은 전투의 승리를 담보하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된다.

박서(朴犀)가 지휘한 구주성(龜州城, 평북 구성군) 방어 전투는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중세 수성전의 모범의 하나로 된다.

박서는 죽주(竹州,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사람이며 그의 생존년대와 가계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그가 고려 23대 왕 고종(高宗, 1214~1259년) 때에 활약한 사람이었다는 것뿐이다.

(그림: 몽골제국의 시조 징기스칸과 2대 칸 우구데이 칸)

(지도: 몽골의 제1차 침략과 구주성 전투 개념도)

1227년 10월 징기스칸(Чингис хаан)이 죽고 그의 아들 우구데이(Өгэдэй)가 임금으로 되자 그는 1231년 8월 살리타이(撒禮塔)으로 하여금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범하게 하였다.

몽골 통치배들의 침략목적은 고려의 영토를 점령하고 인민들을 노예화하며 그 재부(財富)를 강탈하자는데 있었다. 몽골침략군의 기본주력은 압록강을 건너 서경(평양)을 향하여 진격하였고 일부 부대는 구주성을 목표로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이때 구주성 안에는 서북면(西北面) 병마사(兵馬使) 박서의 지휘 밑에 정주분도장군(定州分度將軍) 김경손(金慶孫), 삭주분도장군(朔州分度將軍) 김중온(金仲溫), 그리고 삭주, 정주, 위주, 태주의 고을원들이 군대를 거느리고 모여와 있었다.

박서는 김중온으로 하여금 성의 동쪽을 담당하게 하고 김경손은 성 남쪽을, 도호별초(都護別抄)와 위주, 태주의 별초(別抄) 250여 명은 동, 서, 남쪽으로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성의 방어배치를 통해서도 박서의 군사적 재능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말을 탄 기병이 공격하기 어려운 동면에는 겁기가 있고 군무에 밝지 못한 김중온을 배치하고 적들의 공격이 집중될 수 있다고 본 남면에 용맹하고 지략이 있는 김경손을 세웠다.

그의 예측대로 적들은 후에 남문을 집중 공격하였다.

박서는 첫 전투에서 침략군의 예봉을 꺾어놓고 방어군의 사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김경손에게 그 임무를 주었다.

(그림: 구주성 전투 당시 13결사대의 돌격전을 재현한 그림)

김경손은 12명의 용사들을 거느리고 남문을 집중공격해 오는 침략군을 맞받아 돌진하였다. 그는 적의 선두에서 검정말을 타고 오는 적장을 단 한대의 화살로 쏘아 맞히고 용사들과 함께 한바탕 적진을 휘몰아쳤다. 그는 팔에 화살이 박혀 피가 흘렀으나 북 치는 손을 잠시도 멈추지 않고 결사대원들을 고무하였다.

4~5차례의 싸움 끝에 적들은 물러갔다.

김경손은 대오를 정돈한 후 기세충천하여 성으로 돌아왔다.

박서는 돌격대원들을 뜨겁게 맞아주었다.

12명 용사들의 투쟁 모습에서 성안 군민들은 큰 힘을 얻었다. 그들은 반드시 싸워 이길 결사의 각오만 가진다면 그 어떤 강적도 물리칠 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게 되었다.

얼마후 적들은 첫 전투에서 패전한 복수를 하려는듯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몽골침략군은 구주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밤낮으로 서, 남, 북문을 공격하였다. 성안의 고려군사들은 완강히 방어하다가 이따금 반돌격으로 적군을 격퇴하였다.

당황한 몽골군은 생포한 위주부사(渭州府使) 박문창(朴文昌)을 성안으로 들여보내며 항복을 권유해보았다.

박서는 박문창의 머리를 단칼에 베어 성 밖으로 내던졌다.

악에 받친 몽골침략군은 정예군사 300명을 선발하여 북문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박서는 방어군을 지휘하여 이를 물리쳤다. 이렇게 구주성 공방전은 밤낮없이 계속되었다.

(그림: 구주성을 공격하는 몽골군)

몽골침략군은 이번에는 초목을 쌓은 차를 굴리면서 진공하였다. 성문을 불사르려는 것이었다. 박서는 지체없이 포차로써 끓는 쇳물을 쏟아부어 쌓은 풀을 불태워버리게 하였다. 몽골침략군은 황급히 퇴각하였다.

(그림: 공성병기 누차와 포차.)

몽골군은 누차(樓車)*와 대상(大象)**을 만들어 그것을 소가죽으로 싼 다음 그 안에 졸병들을 넣어 가지고 성 밑으로 바싹 접근하여 지하도를 팠다. 박서는 성 밑으로 구멍을 뚫고 쇳물을 쏟아부어 누차를 불사르고 땅을 꺼지게 하여 지하도를 파던 몽골군 30여 명을 깔려 죽게 하였다. 또 마른 짚에 불을 붙여 대상을 불태우니 적들은 혼란에 빠져 뿔뿔이 달아났다.

* 화살과 돌을 막을 수 있게 한 공성병기.
** 누차를 좀 간단히 한 것.

몽골군은 다시 대포차 15문을 가지고 성의 남쪽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러자 박서는 성우에 누대를 쌓고 포차(砲車)를 쏘아 돌을 날려 쳐 물리쳤다.

몽골군은 금나라와의 여러 차례 전투에서 공성 방법을 체득하였고 여러 종류의 공성기재도 가지고 있었다.

몽골군은 기름으로 장작을 적셔서 쌓아놓고 불을 질러 성을 공격하였다. 박서는 거기에 물을 끼얹게 하였는데 그러자 불은 더욱 성하였다. 곧 진흙을 물에 타서 던지게 해서야 불이 꺼졌다.

몽골군은 이번에는 또 수레에 풀을 싣고 와서 불을 질러 초루(譙樓)*를 공격하였다.

* 성문 위에 있는 높은 누대, 즉 망을 보는 곳,

박서는 미리 이곳에 물을 준비하였다가 끼얹게 하였다. 불길은 곧 사그라지고 말았다.

몽골군은 성을 포위한 지 30일 동안 갖은 방법을 다하여 공격하였으나 박서는 그때마다 그에 맞는 방법으로 막아냈다. 그리하여 몽골침략군은 막대한 유생역량의 피해를 보고 포위를 풀고 달아나면서 “이 성은 적은 군사로써 큰 적을 대적하니 하늘이 돕는 바요, 사람의 힘이 아니다.”라고 비명을 질렀다.

이와 같이 몽골군은 한 달 동안이나 성을 포위하고 모든 수단을 다하여 공격하였으나 박서가 구주성 군민(軍民)들을 지휘하여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전술로 막아냄으로써 부득이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구주성의 제1차 방어전은 고려군의 승리로 끝났다.

1231년 10월 하순부터 구주성 군민들의 제2차 방어전이 벌어졌다.

(그림: 몽골군에 맞서 싸우는 구주성 방어자들)

몽골침략군은 안북성(安北城, 평북 안주)에서 우리 방어군과 전투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구주성에 대한 공격을 또다시 개시하였다. 몽골침략군은 서북면 여러 지방에 널려진 군사들을 전부 긁어모아 가지고 달려들었다.

몽골군이 포차 30문을 배치하고 돌을 날려 성벽 50간을 파괴하자 박서는 즉시로 이를 수축하게 하고 또 굵은 쇳줄로 묶어놓게 하였으므로 몽골침략군은 다시는 공격하지 못하였다. 이때를 틈타서 박서는 군사를 거느리고 반공격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성밖에 나와 대전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던 몽골침략군은 대항도 못하고 피동에 빠져 유생역량의 큰 손실만을 보았다.

12월초에 살리타이는 개경 정부에 강화를 제기하면서 구주성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몽골침략군은 다시 대포차로써 구주성을 공격하였다. 박서도 이에 대항하여 포차를 쏘아 돌을 날려 여적병들을 수많이 쳐 죽였다. 몽골침략군은 부득이 퇴각하여 목책을 세우고 방어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살리타이는 할 수 없이 통사(通事) 지의심(池義深)과 학록(學錄) 강우창(姜遇昌)을 보내어 회안공(淮安公) 왕정(王侹)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항복하라고 요구하였으나 박서는 거절하였다. 살리타이가 다시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박서의 결심을 돌려세울 수 없었다.

(그림: 공성병기 운제와 선풍포.)

몽골침략군이 이번에는 운제(雲梯, 구름사다리)를 만들어 공격하자 박서는 대우포(大于浦)*로써 요격하여 모조리 쳐부셨다.

* 큰 날을 가진 무기.

후에 고려와 몽골 사이에 강화가 체결된 후 70살 가까이 나는 몽골의 한 장수는 성밖에 이르러 성벽과 기재를 돌아보고 감탄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15살에 군인이 된 후 천하의 성지에 대한 공격전을 다 보았으나 이와 같이 공격을 받으면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는 것은 본 일이 없다. 성안의 장수들은 훗날 반드시 장상(將相, 장수와 재상)이 될 것이다.”

박서가 지휘하는 고려군은 수성전에서 시종일관 주동을 틀어쥐고 임기응변하여 싸웠으며 첫 전투에서 승리하여 침략군의 예기(銳氣, =사기)를 꺾어놓아 그들을 피동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특히 몽골침략군이 예견하지 못했던 때에 불의에 성 밖으로 나와 여러 번 놈들을 타격한 것은 넓은 초원전투에서 주동을 쟁취하고 마음대로 싸울 수 있었던 몽골기병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박서의 지휘 밑에 진행된 구주성 방어 전투의 승리는 침략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그 후 계속되는 몽골의 침략을 반대하는 고려 인민들의 투쟁을 크게 고무하였다.

몽골과의 강화에 항의하여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내려갔던 박서는 그 후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되었다.

원문: 「림기응변의 전술로 성을 사수한 박서」, 림호성, 󰡔단군민족의 명인들󰡕, 단군민족통일협의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