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

안광획

(전봉준 장군과 북측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 1~3권(박태원, 문학예술출판사, 1977~1986)

11월 11일은 남측에서는 ‘농업인의 날(농민의 날)’이다. 농업인의 날은 정식 국경일은 아니기도 하고 모 제과업체의 상술로써 조작된 자본주의적 경축일(이른바 ‘빼빼로데이’)에 묻히는 감은 있지만, 이 날은 이 땅의 식량주권을 수호하고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민들의 노고를 기리는 날이다.

농업인의 날을 맞이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땅의 농민들의 삶과 투쟁을 떠올리게 된다. 가깝게는 2015년 민중총궐기 당시 식량주권 사수 및 통일농업 쟁취를 외치며 투쟁하다가 국가폭력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나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결국 촛불항쟁을 이끌어낸 백남기 열사를 떠올릴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역사에서는 근현대 반봉건·반외세 투쟁의 시초가 된 갑오농민전쟁(남: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전봉준 장군을 떠올리게 된다.


(조선화 『갑오농민전쟁』, 1984년)

과연 북측 동포들은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에 대해서 어떻게 보고 있을까. 기본적으로, ‘반봉건·반외세 성격의 대규모 농민전쟁’의 의의를 크게 두는 점에서 남북의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겠다. 다만, 남측에서는 군사독재정권기에는 ‘동학란’이란 표현을 쓰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가 민주화 이후 ‘농민혁명’으로 재평가하게 된 것을 차이점으로 들 수 있다. 또한, 남측에서는 갑오농민전쟁을 주도하였던 종교인 동학(천도교)의 민족적·근대적 성격에 주목하거나 갑오농민전쟁의 한계성(농민군의 봉건적 한계, 조선왕조의 외세 의존 등)에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다.

“1894년에는 전라도농민들이 봉건통치배들의 악정을 반대하여 농민전쟁을 벌렸습니다. 이때에도 농민들을 비롯하여 애국적군인, 선비들은 통치배들을 반대하여 투쟁하였을뿐아니라 국내의 혼란된 기회를 리용하여 기여들어온 일본침략군을 맞받아 피어린 투쟁을 벌렸습니다.” 김일성, 『김일성저작집』 1, 조선로동당출판사, 1979, 230쪽.

반면, 북측에서는 갑오농민전쟁과 관련하여 ‘동학(천도교)’는 농민대중을 조직하는 수단 및 매개(종교)에 지나지 않았고 엄연히 그 주체를 당대의 농민대중임을 명확히 한다. 또한, 계급적 제한성과 전략전술적 부족점, 투쟁에서의 선진계급의 지도가 없던 것, 외세의 개입 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봉건통치배와 일제침략자들에게 조선민족의 애국정신과 불굴의 기상을 시위한 반봉건·반외세 항쟁으로서의 의의를 크게 부여한다.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조선단대사』 리조사 12,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11, 176~180쪽.
그리고 갑오농민전쟁은 이전 시기 갑신정변(1884년)에서 김옥균을 위시한 개화파의 근대적 사상적 영향을 적잖게 받았으며 “당시 ‘희생된 김옥균의 넋이 폭동자들가운데 나타났도 또한 지금까지 무적의 대군을 지휘하고있다.’는 말이 국외에까지 퍼진것은 농민군의 페정(폐정)개혁의 요구와 그 실현을 위한 활동이 단순히 반봉건적반침략투쟁에 국한된것이 아니라 부르죠아개혁운동을 추동한 요인이였다는것을 말해준다.” 「동경주재 러시아공사 히뜨로브가 러시아 외교부장 기르스에게 보낸 편지」, 『Красный архив』, 1898.06.08.;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조선단대사』 리조사 11,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11, 129쪽 재인용.
, 이후 반일의병투쟁과 항일의병투쟁으로 계승발전되었음을 강조한다. “갑오농민전쟁은 일청(日淸) 량군의 개입으로 인하여 비록 실패하였으나 각지로 흩어진 농민군은 그후 반일의병운동의 주력으로 되여 구국항전을 계속하였다.”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5, 조선로동당출판사, 1994, 216쪽.

아래 인용문은 전봉준 장군에 대한 북측 『력사사전』(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편, 과학백과사전, 2004)의 설명이다.

전봉준(1854-1895)

갑오농민전쟁때 농민군을 조직하고 지휘한 지도자의 한 사람. 전라도 고창군 덕정면 당촌에서 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힘써 하였고 재주가 있었다. 청년시기부터 고부, 전주, 태인에서 서당훈장을 하였다. 애국심이 강한 그는 인민들에 대한 국내봉건통치배들의 가혹한 착취와 외래침략의 강화로 말미암아 도탄에 빠진 인민생활과 기울어진 나라의 형편을 걱정하면서 부패무능한 통치배들을 쳐없애고 외래침략자들을 몰아내려고 굳게 결심하였다.

그는 1893년에 전주, 익산, 고부 등지에서 농민들의 앙양된 투쟁기세를 리용하여 농민봉기를 조직할 것을 계획하여 왔으며 1894년초 고부농민들의 폭동을 지도하여 농민전쟁에로 발전시키였다. 1894년 2월 8일 전봉준은 당시 농민들의 반봉건반침략적지향을 반영한 격문을 발표하여 광범한 농민들을 투쟁에로 궐기시켰다. 그는 농민군의 군사지휘관으로서 황토현전투, 백산전투 등에서 기습전과 공격전으로 봉건정부군에 련거퍼(연달아) 타격을 줌으로써 승리를 거듭하였다. 농민군의 승리적 진군은 봉건통치배들로 하여금 6월 10일 휴전담판 즉 전주화의에 응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화의이후 전봉준은 전라도 각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농민들로 하여금 지방자치를 하게 하였다.

1894년 7-8월경에 일본침략군의 무력침공이 시작되자 그는 다시 농민군을 조직하여 일본침략자를 반대하는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중 특히 11월 22일과 29일의 공주전투는 가장 치렬한 전투의 하나였다. 수적으로나 장비에서 우세한 일본침약군대와의 공방전에서 농민군이 많은 손실을 받게 되자 전봉준은 일단 공주에서 퇴각하여 순창에서 력량을 수습하여가지고 재차 싸울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1895년 5월 5일(음력 1894년 11월 29일) 관군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체포된 후 서울에 압송되여 갖은 악형을 받던 끝에 4월 23일(음력 2월 17일)에 사형당하였다. 그는 감옥안에서도 적에게 굴하지 않고 끝까지 용감히 투쟁하였다.

전봉준은 농민전쟁의 훌륭한 지도자였으며 적에게 굴하지 않는 굳은 투지를 가진 애국적인물이였다. 그는 자신의 계급적제한성으로 하여 봉건제도를 근본적으로 뒤집어엎기위한 명확한 투쟁강령을 제기하지 못하였으며 농민전쟁을 지휘함에 있어서 농민군의 산만성과 자연발생성을 극복하지 못하였고 일본의 자본주의침략군대와 싸움에 있어서 중세농민전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군사상 우세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그가 지도한 갑오농민전쟁은 결국 실패하였으나 봉건통치자들과 일본무력침략자들에게 큰 타격을 준 투쟁으로서 조선농민전쟁력사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