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청우당 “민족국가의 만년대계 설계와 인류문명의 개조”

윤창원(서울디지털대 교수)

일제 시대를 그 어떤 항일단체나 종단보다도 치열하게 보낸 천도교가 맞이한 해방은 그들의 보국안민 이념을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분단된 국토와 새로운 외세의 개입은 자주,자립을 기반을 하는 천도교의 보국안민 실천 기회를 빼앗아 갔다.

천도교는 교정쌍전을 추구하는 종교이기에 우선 정치조직을 만들었다. 천도교청년당의 후신인 천도교청우당은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으나 해방 후 바로 재건되어 천도교 이념 실현의 전위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강력한 외세와 그를 배경으로 한 외세 추종주의자들만이 득세하여 주도권을 잡은 해방정국에서 청우당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특히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왜곡 전달된 신탁통치안에 대한 찬반탁의 물결속에서 천도교나 청우당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청우당 분포도 남북으로 확연히 구분되어 있어 단일정책의 지향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청우당의 정치이념과 건국 이념을 담은 ‘천도교 정치이념’이 남북 청우당의 합의로 정리되었다.

해방후 우리사회는 최초의 이념적 자유속에서 다양한 이데올로기에 바탕한 정치단체들이 저마다의 노선과 주장을 가지고 등장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과거를 참회하고 현실을 정관하고, 미래에 정진하자.’ 며 자중정관하던 천도교 역시 9월 23일 전국대회를 준비하는 한편 청년들을 중심으로 당세 부흥과 건국 및 민족통일 운동을 위해 일제말기에 해체되었던 청우당의 부활을 결의하고 9월 24일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일제하 청우당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새롭게 다가온 기회를 맞이하여 당을 부활하고 신국가 건설에 적극 참여하고자 한다는 취지문을 발표하였다. 이는 청우당이 종교운동 차원의 정당이 아니라 명백한 정치활동 단체임을 내외에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우당 부활전당대회는 10월 31일 오후1시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각지방 대표 1천여명이 참석하여 진행되어 민족통일기관 결성 촉진, 전재동포구제, 실업대책, 기관지 발행등을 결의하였다. 부활전당대회에 앞서 청우당은 ‘민족국가의 만년대계 설계와 인류문명의 개조’를 위하여 개벽사를 다시 설립하고 개벽지를 복간하였다. 또 청우당은 과거의 부문운동을 회복하기 위해 부분단체로 천도교 청년회를 재건시켰다.

남쪽에서의 청우당 재건에 이어 북쪽에서도 청우당이 재건되었다. 해방후 이미 상당수의 교세를 자랑하던 북쪽지역에서는 1946년 2월 8일 평양에서 천도교 청우당 결성대회를 갖고 뒤이어 2월 23일 전당대회를 통해 재건되었다. 이어 5월 31일 청우당 함북도당을 결성하였다.
천도교청우당은 창립대회 때 당원이 5만 2,959명이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는 1948년 9월 시점에는 당원수가 28만 9,494명으로 팽창하였다. 청우당원의 80%는 농민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그 외에 노동자가 7%, 사무원이 3%로서, 노동자-농민이 전체의 90%를 차지하며, 상인·기업가·수공업자·학생 등이 부분적으로 참여하였다.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은 농촌에 거주하는 천도교인들로 주로 구성되었음이 확인된다. 조선민주당과 기독교계가 주로 도시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면, 천도교는 반대로 농촌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천도교청우당의 국가건설 방략은 당지와 천도교정치이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지에서는 먼저 천도교의 원리를 종지·강령·목적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宗旨는 ‘人乃天’, 강령은 ‘물심일원 성신쌍전 교정일치’, 목적은 ‘보국안민 포덕천하’이다. 그 다음 보다 구체적인 국가건설론을 당강령주해에서 설명하였다. 천도교청우당의 4대 강령은 아래와 같다.

1. 민족자주의 이상적 민주국가의 건설을 기함.
2. 事人如天의 정신에 맞는 새 윤리 수립을 기함.
3. 同歸一體의 신생활이념에 基한 신경제제도의 실현을 기함.
4. 國民皆勞制를 실시하여 日常輔國의 철저를 기함.

이후 천도교청우당은 북한에서 입지가 좁아졌다가 1970년대 초 남북대화가 시작되자 천도교청우당을 다시 내세웠다. 북한으로 망명한 최덕신(전 외교부장관)이 1989년 천도교청우당 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 2000년 제1차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때 당시 천도교청우당 위원장이었던 류미영(최덕신의 부인)은 북측 단장으로 서울을 다녀가는 등 남북공동행사시 북한의 대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류미영은 2016년 2월 사망했고 차남 최인국이 2019년 7월 6일 북한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