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수논쟁을 다시 본다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새로쓰는 고조선역사] 고조선과 한나라 국경선인 패수는 어디인가?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인 패수의 위치비정을 둘러싼 수많은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를 패수논쟁이라고 부른다. 패수가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이었다는 것은 사마천이 쓴 <사기> 조선열전에 명백히 나온다. 이에 따르면 “진나라에 뒤이어 한나라가 서면서 요동고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러 고조선과 경계를 삼았다”고 밝혀놓았고, 또 고조선이 멸망하기 전해인 기원전 109년 한나라의 사신 섭하가 고조선의 우거왕을 회유하려다가 실패하고 돌아가던 중 자기를 바래주려 나왔던 고조선의 비왕 상을 살해하고 패수를 건너 새에 도망쳐 들어갔다고 나와 있다. 이것은 한나라 초기부터 고조선 말기까지 패수가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이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이었던 패수가 오늘날 어떤 강인가 하는 것은 후조선과 만조선의 강역을 정확하게 밝히는 문제이자, 고-한전쟁의 전쟁터가 어디인가를 좌우하는 문제이다. 더 나가 고조선 붕괴이후 설치된 한사군의 위치비정문제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패수의 위치비정문제를 둘러싸고 수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동강설, 청천강설, 압록강설, 요하설, 대릉하설, 난하설 등 대동강에서 난하까지 대다수의 큰 강들은 모두 그 후보지에 올라있다. 패수의 위치를 정확히 비정하려면, 후조선시기 서변(서쪽 경계)의 위치, 진개의 고조선 침공이후 고조선 연의 경계, 만조선 시기의 서변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

 

후조선 서변은 난하 중류계선

 

후조선은 성립후 국내질서를 회복하고 국력을 강화해 서쪽으로 의무려산 줄기 서쪽의 넓은 지역(현재의 요서지역)으로 진출해 자기 영역과 세력권을 크게 확대해 난하 중류계선에 이르렀다. 난하는 베이징 동쪽 150km쯤 떨어진 탕산시 동쪽지역에 흐르는 강인데, 하북성과 내몽골 자치구에 유역이 걸치고 발해만으로 흘러들어가는 강이다. 후조선의 서쪽 국경선이 난하 중류계선에 이르렀다고는 것은 고조선의 강역임을 입증해주는 비파형동검, 좁은 놋단검(세형동검) 문화가 이 지역까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의무려산 줄기 서쪽지역에서 난하중류유역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는 고조선의 비파형동검, 좁은 놋단검 문화에 속하는 위영자 문화(기원전 15세기~기원전 11세기)와 그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능하문화(기원전 11세기~기원전 4세기)가 광범히 분포되어 있다. 위영자 문화와 능하문화의 비파형동검, 좁은 놋단검 문화는 고조선의 고유한 문화로서 이 문화의 창조자들은 후조선 시기에 의무려산 줄기 서쪽 넓은 지역으로 진출한 고조선 사람들이다. 고조선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직접 진출해 위영자 문화와 능하문화를 창조했다.

 

3861_8357_620.jpg

▲ 후조선 시기 고조선 영역

 

후조선의 서쪽 계선이 난하 계선에 이르렀다는 것은 중국의 옛 기록들에서 전해주는 고조선과 연나라의 관계 자료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현재 전해지는 중국 쪽 기록들에 의하면 기원전 4세기경 고조선은 요수(난하)를 경계로 연나라와 이웃해 있었다. 전국시대 유명한 책략가인 소진은 기원전 334년에 연무후(연나라의 무후)에게 “연나라는 동쪽에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 임호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 운중, 구원이 있고, 남쪽에 호타 역수가 있다”고 했다(<사기> 권 69 소진전). 또 <염철론>(기원전 81년 중국 전한 조정에서 있었던 논쟁을 기록한 책)에서는 “연나라는 갈석에 의해 막히고,….요수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고 했다. 이 두 기록은 연나라가 동쪽으로 조선, 요동과 이웃해 있었으며, 갈석(갈석산)과 요수가 연나라 동쪽의 험준한 요새로, 경계로 되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이 기록에서 나오는 요수를 오늘날의 요하로 오해하는 경향이 많은데, 한나라 때(기원전 1세기 초) 요동군을 오늘날의 요하 동쪽 지방으로 옮긴 이후의 일이고 그 이전에 요수는 오늘날 요하가 아니라 난하이다. 기원전 7세기 중엽에 제나라 환공이 영지 고죽 비여 등을 토벌할 때 제 환공은 연나라를 거쳐 동쪽의 고죽을 치러가던 도중 요수를 건넜다는 기록이 있다(<세원> 권 18 변몰편). 제 환공이 건넜다는 요수는 오늘날 어떤 강이었을까? 제환공이 건넜던 요수는 연나라(도읍은 베이징 일대)의 동쪽, 고죽의 서쪽에 있던 강이었으므로 오늘날의 난하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연나라때 요수가 오늘날의 난하였으므로, 그 당시 요동은 오늘날의 난하 동쪽지역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됐다는 것은 명백하다.

 

즉 연나라 때 설치한 요동군을 기원전 1세기 초 한나라 때 요하동쪽지역으로 옮기면서 요수가 난하가 아닌 요하를 가리키는 말로, 요동이 난하 동쪽이 아닌 요하 동쪽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바뀐 것이다. 요동군이 기원전 1세기 초에 현재의 요하 동쪽 지역으로까지 이동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역사자료가 있다. 그것은 <한서>지리지 요동군의 험독현에 대한 주석가들의 견해를 따져 보면 요동군 험독현은 원래 조선왕 만의 구도(위만이 고조선 왕위를 찬탈하기 전 후조선 왕 준으로부터 봉지로 부여 받고 제후왕으로 있었던 당시의 중심지)로서 현 요하 하류 서쪽 북진 동남쪽이었다. 이것은 요하 서쪽지역이 만조선 시기까지 고조선의 영토였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당연히 고조선 멸망이전에는 요동이라는 말이 현 요하 동쪽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 요하 동쪽으로 요동군이 옮긴 것은 기원전 75년경이며, 이 때 이후부터 요동이라는 말이 현 요하동쪽지역이라는 말로 사용됐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변천된 지리적 개념을 정확히 알아야 패수의 위치를 올바로 비정할 수 있다.

 

진개의 후조선 침공 이후의 고조선의 서변

 

후조선 말기인 기원전 3세기초 고조선의 서변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연나라 소왕은 장수 진개를 보내 후조선 서쪽 변방을 치고 2000여리의 땅을 차지하고 만반한을 경계로 삼았다는 기록이 <삼국지> 한전에 인용된 <위략>에 나온다. 후조선은 이 전쟁의 결과 2000여리에 달하는 서쪽 영토를 잃고 만반한을 경계로 연나라와 접하게 되는데, 이 때 빼앗긴 2000여리의 땅이 얼마 만큼이며, 만반한은 오늘날 어디였는가가 문제로 된다.

 

연나라 당시의 2000여리는 오늘날의 길이단위와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잣대로 계산하면 착오가 발생한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러한 오류에 빠져 압록강 또는 청천강 계선까지 고조선이 후퇴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는 군사학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당시 연나라의 통치력으로 자신보다 몇 배나 큰 지역을 장악 지배할 수 없다. 그랬다면 연나라가 소왕이 죽은 후 다시 조그마한 나라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232년 경 연나라가 존재하던 시기 진나라 사람 감라가 강한 조나라, 약한 연나라라고 한 것(<사기> 권 71 감라전),연나라의 마지막 왕 희의 아들 단이 자기 나라는 판도가 작고 국력이 약하다고 한 것(<사기> 권 86 자객전), 진나라 말기 농민전쟁을 계기로 기원전 209년에 연나라를 재건한 이전 연나라 귀족들이 고국을 회고하면서 연나라는 작은 나라였다고 한 것(<한서>권 31 진승항적전)등은 연나라의 장성과 그에 따르는 동방에로의 영토 확장이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것을 해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마천은 연나라의 역사를 총결하면서 연나라를 만맥, 제, 진 사이에 끼여 있는 가장 약하고 작은 나라로 평가했던 것이다.(<사기>권 34 연소공세가) 이처럼 역사 기록들을 보면 연나라는 소왕이 죽은 후 진개가 빼앗았던 땅들을 대부분 다시 빼앗기고 조그마한 나라로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나라가 압록강 청천강 까지 진출했다는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

 

당시 2000여리가 어느 정도의 거리인가는 연나라가 고조선을 침공하기 반세기전에 소진이 당시 연나라 땅이 사방 2000여리에 해당된다고 묘사한 것을 참고하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연나라 한변의 길이만큼의 거리를 난하 중류로부터 재어 보면, 당시 연나라가 차지한 고조선 땅은 난하 중류로부터 요하하류(서쪽 요양하계선)에 이른다. 연나라 진개의 침공으로 고조선의 서변은 요하하류(요양하) 계선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연나라 소왕이 죽은 후 연나라는 급속히 약해졌다. 이때를 틈타 동호는 다시 빼앗긴 지역을 되찾고 기원전 273년 대지방(베이징 근처)까지 급속히 세력을 확장했다. 이 때 고조선 역시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펼쳐 패수유역까지 서쪽으로 다시 진출했다. 그 결과 패수가 연나라 고조선의 경계선으로 되면서 그 이후 진한 시대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놓고 보면 패수는 요하 서쪽에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한반도 내 대동강 청전강 압록강은 패수로 될 수 없다. 이는 앞에서 인용한 <한서> 지리지에서 만왕의 구도가 요동군 험독현에 있다는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요동군 험독현은 현재 요하의 서쪽에 있으므로 만조선 시기 한나라와 고조선의 경계인 패수는 요하 서쪽에 있을 수밖에 없다.

 

패수는 대릉하

 

요하 서쪽에 있는 강중에 국경으로 될 만한 큰 강은 난하와 대릉하 외에는 없다, 난하와 대릉하 중에서 어느 강이 패수인가 하는 게 초점으로 된다. 일부 역사연구자들은 난하를 패수라고 주장한다. 진개의 고조선 침공 때 빼앗긴 2000여리의 땅을 연나라 소왕이 죽은 후 연나라가 약해졌을 때 모두 되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제반 역사적 사실에 의해 볼 때 타당성이 없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만리장성을 축조했는데, 그 동쪽 끝은 갈석이다. 이는 제반 역사자료에 의해 입증된다. 갈석은 연나라 장성의 동쪽 끝에 있는데, 지금의 산해관 지방에 있었다. 1984년 산해관에서 10여리 떨어져 있는 요녕성 수중현 만가향에서 2개의 궁전급 유적이 발굴됐는데, 그 하나는 갈석궁(진시황의 갈석 행사때 건설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문제의 갈석 행사때 건설한 망해대 유적으로 확인됐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갈석(지금의 산해관 일대)이고, 이 갈석이 난하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진한시대 난하는 중국의 강역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난하는 패수가 될 수 없다.

 

요하 서쪽에 있고 난하의 동쪽에 있으며, 국경으로 될 만한 큰 강은 대릉하 이외에는 없으므로 고조선 진 한나라의 국경선인 패수는 오늘날의 대릉하이다. 당시의 패수가 오늘날의 대릉하였다는 것은 요동고새(요동에 있는 옛날 요새)와 패수의 관계를 따져보면 뚜렷하다. <사기> 조선열전의 사료를 보면 고조선과 한나라사이의 경계선은 패수였지만, 한나라 측에서는 요동고새를 동쪽 최전선 방어요새로 삼고 있었다. 이것은 요동고새와 패수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나라를 세운 직후 동쪽 변방 요새를 ‘요동고새’라고 불렀으므로 요동고새는 한나라 성립이전 진나라 시기의 요동고새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만리장성 축조를 직접 책임지고 담당했던 몽염이 ‘임도에서 시작해서 요동에 이르렀다’고 한 만리장성의 동단(오늘날의 산해관 근처)을 가리킨 것이다. 만리장성 동단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두 나라 사이의 경계로 될 만한 큰 강은 대릉하 밖에 없다.

 

3861_8356_543.jpg

▲ 대릉하의 위치

 

당시의 패수가 오늘날의 대릉하였다는 것은 요동고새와 패수, 열수의 상대적 위치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패수의 서쪽에는 한나라의 요동고새, 동쪽에는 고조선의 열수라는 강이 있었다. 즉 패수는 요동고새와 열수 사이에 있었다. 그런데 고조선 말기 열수는 오늘의 요하로 인정되고 있다. 오늘의 요하가 고조선 말기의 열수였다는 것은 ‘요동성이 본래 오렬흘이었다’는 한 <삼국사기>의 기록이나, ‘요하를 일명 압록수라고도 한다’고 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렬이나 압록은 고대 우리말로 열과 통하며, 따라서 요하를 한 때 열수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진나라 시기 곽박은 <방언>의 조선 열수에 대해 주석하면서 열수는 요동에 있었다고 강조했고, <산해경>에서는 패수가 ‘열도에 흘러든다’고 했는데, 이 ‘열도’를 열수의 하구의 충적지대(니토지대)를 말하며, 이는 열수와 패수가 하구를 가까이 하고 있는 강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조선 말기 열수가 요하이고, 요동고새가 산해관일대에 있었던 만큼 그 사이에 있었던 패수는 응당 대릉하일 수밖에 없다.

 

또 패수가 오늘날 대릉하라는 것은 패수에 관한 <수경>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수경>은 중국의 강줄기를 기술한 책인데, 요서 요동의 물줄기를 설명하면서 큰 강의 하나인 대릉하를 서술하지 않고 있다. 이는 패수가 대릉하이기 때문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만약에 패수가 청천강이나 대동강이라면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을 기술하지 않은 까닭이 없다. 그 강들은 중국 땅에 속한 적이 없기 때문에 기술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또 수경에서 묘사된 패수의 강줄기의 모습을 놓고 볼 때 이에 부합되는 강은 대릉하 이외에는 없다.

 

패수의 위치는 오늘날의 대릉하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고조선- 한나라 전쟁의 주요 전쟁터가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반도이며, 고조선이 패망한 이후 고조선의 옛 땅에 설치한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닌 요동반도에 설치됐다는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