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성을 개척한 윤관 

안광획

(그림: 윤관 초상)

조상의 땅을 모두 되찾는 것은 고려 사람들의 한결같은 염원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고구려, 발해의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숙원으로 간직하고 그를 위한 필요한 정치, 군사적 조치들을 취하였다.

태조의 유언이기도 한 조상의 땅 수복을 위하여 고려정부는 12세기 초엽 단호한 군사 적조치를 강구하였다.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동북지역에 들어와 살던 여진 사람들을 몰아내고 9개의 성을 설치한 윤관의 대규모군사원정이었다.

윤관(尹瓘, ?~1111년)은 파평현(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사람으로서 자를 동현이라고 한다. 그의 고조인 윤신달(尹莘達)은 태조 왕건을 도와 삼한 공신칭호를 받았으며 아버지 윤집형(尹執衡)은 검교 소부소감벼슬을 지냈다.

윤관은 고려의 전성시대라고 하던 문종(1047~1083년) 통치 연간에 과거에 급제하여 습유보궐을 지냈고 숙종(1096~1105년)때에 여러 번 승급하여 동궁(東宮) 시강학사(侍講學士), 어사대부(御史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로 임명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장상이 된 후 신중에 있을 때에도 항상 경서를 가지고 다니었다고 하는 윤관.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조상의 땅을 회복하기 위한 성스럽고 준엄한 싸움에 한 몸을 기꺼이 내대어 동북지역에 9개의 성을 설치하는 전과를 거둔 것이다.

윤관이 구축대상으로 삼았던 여진(女眞)은 말갈의 한 갈래로서 고구려, 발해 때 그의 주민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926년 발해 멸망 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에 따라 여진은 숙여진과 생여진으로 불렸다.

여진 사람들은 산림이나 골짜기를 따라가며 여기저기에 흩어져 부락을 형성하고 수렵이나 어로를 기본생업으로 하여 살아갔다. 일부 여진 사람들은 고려에 귀순하여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았고 일부는 고려의 변경을 노략질하며 배신행위를 하기도 하였다.

11세기 여진 사람들의 생활에서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통치자의 선조가 고려사람*이라고 하는 완안부(完顔部) 여진이 강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부족은 원래 여진 여러 부 가운데서 제일 낙후하였는데 11세기초엽에 이르러 석로(소조)가 추장이 되면서 이웃부락들을 겸병하여 부락 연맹을 형성하며 강대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 혹은 고려에 살다가 여진지역으로 이주한 여진사람이라고도 한다.

오고내(경조)때에 이르러 완안부 여진은 더욱 강화되었다. 완안부를 중심으로 한 부락 연맹은 더욱 강대하고 공고한 것으로 되어갔다. 핵리발(세조)때와 파라숙(숙종), 영가(목종)때 완안부여진의 세력범위는 더욱 넓어졌다. 이렇게 11세기중엽부터 말엽까지 여진 각 부족의 통일과 부락 연맹의 공고발전, 완안부를 핵심으로 한 군사 연맹의 형성과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오아속(烏雅束, 1103~1113년)이 추장으로 되어 그 기세가 더욱 횡포해지기 시작하였다. 산골짜기를 따라 이동하면서 고려의 서북일대와 함경도일대까지 들어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살아오던 여진 사람들은 점차 세력이 커지자 변경을 소란 시키며 함부로 날뛰었다.

여진추장 오아속이 다른 부락의 부내로 와 분쟁이 일어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하면 서국경계선에까지 와서 주둔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고려정부는 임간을 보내어 국경을 수비하게 하였으나 그의 무모한 행위로 패하여 여진 사람들은 승전한 기세로 정주 선덕관의 성에까지 침입하여 살인·약탈을 자행하였다. 그리하여 잎간 대신 윤관을 동북면 행영도통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윤관은 적을 공격하여 30여명을 죽였으나 고려군이 입은 피해도 적지 않아 일단 강화를 체결하고 각기 퇴군하였다. 이 싸움을 통하여 윤관이 깨달은 것은 적기병과 대적하려면 우리도 강한 기병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려군이 큰 성과 없이 돌아오자 숙종왕은 몹시 노하였다.

“원컨대 신명께서는 은근한 도움을 내려주시어 적을 소탕하게 하여주신다면 그곳에 절을 창건하오리다.”

여진을 정벌하고 조상의 땅을 수복하려는 숙종왕의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그 후 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 겸 태자빈객으로 임명되었을 때 윤관은 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신이 보건대 적의 세력이 강하여 무슨 변을 일으킬지 예측하기 어렵사옵니다. 그런즉 병졸과 군관을 휴식시켜 훗날에 대비해야 할 것이옵니다. 또한 신이 전날에 패전한 원인은 적들은 말을 탔고 우리는 보행으로 대전한데 있사옵니다.”

고려정부는 여진에 대처하기 위한 군사적 조치를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유명한 윤관의 별무반(別武班)이 편성 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것은 문, 무의 산관, 서리들로부터 상인 사환군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과 주, 부, 군, 현에서 말을 기르는 사람 모두를 신기군(神騎軍, 기병)에 편입시키고 말이 없는 자는 신보군(神步軍, 보병)에 소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탕(돌격대), 경궁(활 쏘는 병종), 정노(쇠뇌부대), 발화(화공부대) 등의 병종을 편성하였는데 20살이 상의 남자로서 과거공부를 하지 않은 청년들은 모두 신보군에 배속시키고 무반과 각 진, 부에 속한 군인들은 사철 계속 군사훈련을 시키며 중들을 선발하여 항마군을 조직하였다. 한편으로 군량을 축적하여 재차 진공 할 것을 계획하였다.

윤관의 벼슬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승급하였다. 그러나 여진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던 중에 숙종왕의 상사를 당하였다. 원정은 일시 중지되었다.

1107년 국경경비군관으로부터 급보가 올라왔다. 여진이 강해져서 국경도시들에 자주 침입하고 있으며 추장이 바가지 하나를 까마귀꼬리에 달아 각 부락으로 돌리면서 대사를 의논하고 있으니 심중을 알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예종왕은 이 급보를 받고 중광전의 불감 속에 두었던 숙종왕의 발원문을 가져다가 양부 대신들에게 보이게 하였다. 대신들은 그 글을 읽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선황께서 남기신 뜻이 이같이 절절하신데 어찌 적에 대한 복수를 잊을 수 있으리까.”라고 결의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이어 “선황의 뜻을 이어 여진을 토벌할 것을 청원하나이다.”라고 상소하였다.

예종왕은 우물쭈물하면서 결심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후 점을 쳐보고 ‘길한 점괘’가 나오자 출병을 결정하였다. 윤관이 원수로, 지추밀원사 오연총(吳延寵)이 부원수로 임명되었다.

윤관은 왕 앞에서 서약하였다.

“신이 일찍이 선황(숙종왕)의 밀지(비밀지령)를 받았고 지금 다시 폐하의 엄명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3군을 통솔하고 적의 보루를 격파하여 우리 강토를 개척하고 지난날의 치욕을 씻지 않으리까.”

윤관은 가슴속결의를 가다듬으며 성공을 의심하는 오연총을 꾸짖었다.

“당신이나 내가 아니면 누가 능히 죽음의 땅으로 가서 나라의 치욕을 씻을 수 있단 말이오. 국책이 이미 결정 되었으니 무엇을 의아쩍어하겠소.”

예종왕은 유구한 고도 서경(평양)에 가서 위봉루(威鳳樓)에 올라 장수의 권한의 징표인 부월을 수여하였다. 윤관은 동부지방으로 가서 군대를 장춘역에 집결시켰는데 대략 17만 명의 대군이었다. 그는 원정에 앞서 고라를 비롯한 400여명의 여진 추장들을 유인하여 처단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것은 여진의 지휘체계를 마비시키고 혼란시키기 위한 원정의 서막작전이었다.

이어 고려군은 원정을 개시하였다. 이리하여 1107년 윤관의 유명한 동북지방원정이 단행되었다. 윤관은 고려원정군을 좌, 중, 우의 3군으로 편성하였다. 3군의 총 병력 수는 11만 4,400명이고 여기에 총지휘관인 윤관이 직접 거느린 5만 3,000명과 수군 2,600명이 있었다.

12월 14일 윤관이 군대를 거느리고 동부의 장성을 넘어 대내파지촌을 지나 동북으로 행진해나갈 때 군세가 매우 성대하여 이것을 본 여진 사람들은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 고려원정군은 동음성에 의거하여 저항하는 적들을 맹렬히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다음날인 15일 오후 석성에 도달한 원정군은 여진족이 투항을 거부하며 발악하는 조건에서 좌군과 윤관의 휘하 대군이 합세하여 격전을 벌려 적들을 섬멸하였다. 이 석성전투는 고려군의 진격을 저지시키고 사태를 역전시켜보려던 완안부 여진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준 섬멸전으로서 그 후 고려군의 진격에 유리한 국면을 열어놓은 의의 있는 전투였다.

고려원정군은 계속 진격하여 이위동(伊位洞)에 집결한 적들을 들이치고 역습해오는 적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려 1,200명을 죽이는 전과를 거두었다.

사실 이 이위동 전투는 힘겨운 싸움이었다. 이위동 즉 이위계는 병목과 같은 요해처(要害處: 전략 요충지)가 있는 곳으로서 천험의 요새였다. 오늘날의 마천령에 위치한 이 천험의 요해지에 웅거하여 저항하는 적들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은 것은 조상의 땅을 기어이 되찾으려는 고려의 애국적 장병들의 희생적 투쟁의 결과였다.

중군병마사 좌복야 김한충(金漢忠)이 거느린 중군은 고사한 등 35개 촌락을 격파하여 380명의 적을 죽이고 23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우군병마사 병부상서 김덕진(金德珍)이 거느린 우군은 광탄 등 32개 촌락을 격파하여 적 290명을 죽이고 300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거두었다. 좌군병마사 좌상시 문관(文冠)이 거느린 좌군은 심곤 등 31개 촌락을 격파하여 적 250명을 죽이었다. 그리고 윤관은 휘하 부대를 거느리고 대내파지 등 37개 촌락을 격파하여 2,120명을 죽이고 500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거두었다.

원정군의 일부 부대는 멀리 두만강이북 공험성, 선춘령까지 진격하였으며 오늘의 간도지방에서 반격해오는 완안부 여진군과 격전을 벌렸다. 이처럼 고려원정군은 12월 14일 출병을 개시 한이래 고려 동북방의 장성계선에까지 침입한 완안부 여진군을 쳐 몰아내면서 북으로 진격하여 이해 말에는 갈라전 지역 즉 오늘의 함흥계선으로부터 두만강 이북 간도지방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원정군 총지휘관 윤관은 전과를 종합하여 조정에 보고하는 한편 새로 차지한 지역을 공고히 하고 국경선을 획정하는 사업들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윤관은 몽라골령 아래에 950간의 성곽을 쌓고 영주라고 하고 화곳령 아래에는 992간의 성곽을 쌓아 웅주라고 하였으며 오림금촌에는 774간의 성을 쌓아 복주라고 하고 궁한이촌에는 670간의 성을 쌓아 길주라고 하였다. 이것은 윤관이 새로 개척한 지역에 제일 먼저 쌓은 4개의 성(영주, 웅주, 복주, 길주)으로서 그때는 1107년 12월 말이었다.

완안부 추장 오아속은 연속되는 패배에 기가 질려 싸울 생각을 못하였다. 그런데 군대를 다시 발동시키지 않으면 갈라전 지역을 회복할 수 없다는 아골타(阿骨打, 후의 금나라 태조)의 강력한 주장에 의하여 오아속은 할 수없이 1108년 1월 초 말새를 두목으로 하는 10개의 대부대를 편성하여 갈라전에 다시 투입하였다.

그리하여 두만강이북 공험성 , 선춘령*까지 진출하였던 원정군의 한 부대는 완안부여진군의 편대인 훈단이 거느린 적들과 목리문전, 갈라수(해란강) 등지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 공험성은 오늘의 동녕현성(흑룡강성 녕안시 동녕현) 근방에 있었다고 보이며 선춘령은 로흑산(흑룡강성 목단강시)이라고 비정되고 있다.

1월 14일에는 가한촌 병영에서, 26일에는 영주성에서 고려군과 적 대군과의 격전이 벌어졌다. 영주성 싸움에서 고려군은 2만여 명의 적을 물리치는 전과를 거두었다. 윤관은 적들의 침입이 본격화되는 조건에서 이를 타개할 목적 아래 여러 장수들을 인솔하고 중성대도독부(길주)로 갔다. 중성대도독부에서 장수들의 회합이 있은 후 윤관은 방비를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하여 1108년 2월초에 두만강이북의 공험진과 길주 이남의 함주에 성을 쌓게 하였다. 그리고 공험진, 선춘령에는 비석을 세워 고려의 경계임을 명백히 하였다.

윤관은 아들 언순을 시켜 정부에 이러한 사실을 전하면서 축하하는 글을 올렸다.

“폐하의 성덕이 천지와 같이 장하시여 정의의 군사가 이미 오랑캐를 평정하고 장병들이 환희에 들끓고 있사옵니다.”

이렇게 시작된 글에서는 여진 사람들이 고려의 은혜를 입어왔으나 점차 승냥이 같은 탐욕으로 반심을 품고 노략질을 일삼으니 선대 황제(숙종왕)가 분노하여 정벌하려 하였고 폐하(예종왕)께서 그 뜻을 이어 기회를 보아가며 준비하다가 비로소 출병을 명령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윤관은 원정군이 거둔 전과를 개괄하고 나서 이렇게 계속하였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이 땅을 얻고자 하면서도 얻지 못하고 있던 것을 이제 하늘이 우리에게 주어 차지하게 되었으니 우로는 선조들의 영혼에 감사를 드릴만 한 경사요 아래로는 우리나라의 여러 해 쌓인 치욕을 씻어버린 대승리였나이다.……”

윤관은 축하 글의 마지막부분에서 고려군의 승리는 옛날 제왕들이 거둔 승리에 비길 수 없는 대승리로서 역사에 이 사적을 기록하여 영원히 후세에 빛내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윤관은 임언에게 지시하여 영주의 관청벽에 이번 원정사적을 남기게 하였다. 거기에는 여진은 본래 고구려의 한 부락으로서 개마산 동편에 모여 살면서 대대로 우리나라에 조공하여왔고 선대왕들의 깊은 은혜를 입어왔는데 일조에 배반하였으므로 정벌하였다는 것, 죽인 적이 6,000여명이고 항복한 자가 5만여 명이며 점령한 지역은 면적이 사방 300리 이고 동쪽은 큰 바다, 서북쪽은 개마산이며 이곳은 원래 고구려의 영토로서 오늘날 되찾은 것은 천명이라는 것, 새로 설치한 여섯 개 성에 방어사를 두고 정호를 배치한다는 등의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것은 당시 고려 사람들이 옛 고구려의 강역을 되찾은데 대하여 응당한 것으로 강조하면서 몹시 기뻐하였으며 그곳을 영원히 나라의 영토로 지켜가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세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적들은 1108년 2월 11일 영주성에서의 패배를 만회해보려고 각종 병차까지 동원하여 웅주성을 포위공격 해왔다. 웅주성을 지키고 있던 고려군은 일제히 4개 성문을 열고나가 싸워 수많은 적들을 살상포로하고 병차 50여량, 중차 200여량을 비롯한 많은 무기무장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웅주성에서 퇴각한 적들은 이해 3월말에 다시 영주성에 침입하여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이곳을 지키던 고려군의 맹렬한 반공격을 받아 수많은 주검을 남기고 북쪽으로 도망쳤다.

이 시기 고려군은 영주, 웅주성에 의거하여 대병력으로 침입해오는 적들을 일단 격퇴하였으나 적들의 발악이 계속될 것을 예견하여 이미 수복한 판도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여야 하였다. 그런데 넓은 지역에 축성한 6개 성 상호간에는 거리가 멀고 서로 지원하기가 어려웠던 것만큼 이 여섯 개 성을 가지고서는 적의 준동을 성과적으로 물리칠 수 없었다.


(지도: 고려의 동북9성)

윤관은 이러한 실정을 고려하여 1108년 3월 평융진과 통태진을 새로 설치하고 성이 없던 의주(덕원, 북강원도 원산시)에 성을 쌓았다. 그리하여 되찾은 동북부의 넓은 판도에는 아홉 개 성이 완전히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북계 9성’이라고 하였다.

새로 설치한 아홉 개 성들에 남쪽지방 인민들을 이주시켜 수복한 지역을 공고히 하기 위한 사업도 진행되었다. 이 지역에 이주된 호구 수는 도합 6,466정호*이었다.

* 6만 9,000호라는 기록도 있는데 원래 계획되었던 숫자였다고 보인다.

고려정부는 윤관의 공로를 평가하여 추충좌리평융척지공신(推重佐理平戎拓地功臣) 칭호와 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지군국중사(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의 관직을 수여하였다. 그 후 1109년 4월 완안부 여진은 사현을 파견하여 정화를 요청하였고 같은 해 6월에는 요불, 사현 등을 파견하여 이렇게 맹세하였다.

“옛날 우리 태사 영가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상은 큰 나라(고려)로부터 나와 자손에 이르기까지 의가 맞아 귀속되어왔습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 역시 큰 나라를 부모의 나라로 삼아왔습니다. 최근 궁한촌 사람들이 스스로 나쁜 짓을 하였는데 그것은 태사가 지휘하여 한 것이 아닙니다. 고려에서 변경을 침범한 죄를 토벌한 후 다시 통교를 허락하여 우리는 그것을 믿고 조공을 끊지 않았습니다. ……아홉 개 성을 쌓으니 외로운 백성들은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태사가 우리들을 파견하여 옛 땅을 되돌려주도록 요청하게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불쌍히 여겨 아홉 개 성을 반환해주어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해주면 우리들은 하늘에 맹세하건대 대대손손 공손히 공물을 바치며 감히 귀국의 변경에 기와조각하나 던지는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고려정부는 여진 사람들의 맹세를 믿고 아홉 개 성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고려 앞에 자기의 서약을 공포하는 의식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7월 고려정부는 문관을 파견하여 서약의식을 시찰하게 하였다. 여진 사람들은 함주문 밖에 높은 단을 설치하고 ‘지금부터 나쁜 마음을 먹지 않고 대대로 조공을 바치며 이 맹세를 어기는 경우에는 멸망할 것이다’라는 맹세를 하늘 앞에 다졌다.

여진 사람들은 이 맹약을 지켰다. 그 후 완안부 여진은 세력을 확대하여 중국 북방의 광활한 지역을 차지하고 금나라를 세웠지만 고려에 대해서 큰 마찰은 일으키지 않았다. 그리고 동북지방에서도 비교적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였다.

봉건통치제도의 문란과 군사력의 상대적 약화 등 원인으로 하여 새로 개척한 아홉 개 성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 것은 고려봉건정부의 큰 실책이었다. 그러나 윤관이 조상의 땅을 되찾을 굳은 결심을 품고 힘겨운 싸움을 벌이며 넓은 지역을 수복하고 아홉 개 성을 설치한 것은 큰 의의를 가졌다.

이후 고려와 조선 초기에 걸쳐 조상의 옛 땅을 수복하기 위한 사업은 윤관이 9성을 설치하고 공험진, 선춘령에 ‘고려지경(高麗地境, 고려 영토)’이라는 비석을 세워 경계를 삼은 사실을 근거로 하였다.

1109년 2월 고려 정부는 요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갈라전에 9성을 설치하고 이 지역이 고려경내에 속한다는 것을 통고하였으며 고려 말 철령위 문제를 둘러싸고 명나라와의 관계가 복잡해졌을 때 고려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공험진까지는 자고로 우리나라 땅이다.’라고 단호하게 선포하였다. 그리고 간도지방 여진 사람들을 귀순시키기 위하여 이곳에 보낸 방문에서 ‘속빈, 실적면, 몽골, 개양, 실린, 팔린, 안돈, 압란, 희라올, 올리인, 고리한, 로벌, 올적개(우디거)지역은 본래 우리나라 공험진 경내에 속한 것이다.’라고 강조하였다.

조선 초기 6진 개척 때 세종왕은 함길도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에게 “동북지방의 공험진을 경계로 삼았다고 전해온 지 오래다.……오늘에 이르기까지 선춘참에 윤관이 세운 비석이 있다고 하는데 선춘참이 어느 방면에 있으며 그 비문이 어떠한지 사람을 파견하여 찾아보게 할 것이다.”라고 지시하였다.

이처럼 윤관의 9성 설치는 조상의 땅을 되찾기 위한 성스러운 사업이었고 후대들에게 전해준 애국적인 사적이었다. 9성을 일시 양보해주었다고 하여 강토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윤관의 공적은 지워버릴 수도 말살될 수도 없는 너무도 큰 자욱을 남겼다.

하기에 예종왕은 윤관 등이 명목이 서지 않는 병력을 함부로 동원하여 군대를 패전시키고 국가에 손해를 끼친 죄를 용서할 수 없으니 감옥에 가두자고 떠들어대는 자들을 타이르며 전투에는 승패가 있기 마련이라고 하였다. 간관들의 계속되는 탄핵으로 관직과 공신칭호만 삭탈하였다가 인차 수 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관직과 상주국훈위를 주며 “백리의 국토를 넓히고 9성을 쌓아 국가의 오랜 치욕을 갚았으니 그대의 공로야말로 크다고 할만하다.”고 격려해주었다.

윤관은 새로운 군부대를 조직하여 원정을 지휘하고 9성을 설치함으로써 조상의 땅을 되찾고 고수하기 위한 투쟁에 공헌한 것으로 하여 민족사에 길이 그 이름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 기록에 의하면 윤관이 세운 비석의 4면에는 글이 있었는데 여진 사람들이 그 글자를 깎아버렸다. 후세사람들이 그 비석을 발굴해보니 ‘고려지경’이라는 네 글자가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