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과 귀신사 그리고 회한

모악산 일대는 미륵사상에 대해 오랜 기간 면면히 연관을 이어가고 있는 산이다. 젊은 시절 금산사에서 모악산 서쪽 고개를 통하여 전주로 넘어가는 길을 걸으면서 미륵신앙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귀신사를 알게 되었고 모악산과는 어울리지 않는 절 같다면 웃음으로 넘긴 적 있다.

귀신사는 미륵신앙과는 다르게 “왕권 국가의 율령정치체제(형벌 법규인 율과, 일반 행정 법규인 영, 그리고 시행 세칙인 격식을 일컫는 것)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하였고, 대립보다는 서로 조화하고 포용하는 관계, 특히 신라가 외세와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 침공을 마무리한 후에 지역적, 계층적 갈등과 모순을 종교를 통해 승화시키면서 백성의 단결심을 배양하는데 앞장서는 화엄사상을 표방하는 절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금산사와 청도리 지역은 미륵사상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금산사는 신라로부터 나라를 빼앗긴 백제 유민의 안식처였으며, 미륵사상의 요람이기도 하다. 이는 백성들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정여립의 대동계, 지배층의 부당한 세금착취에 항거했던 금구민란, 외세를 몰아내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갑오농민전쟁에 영향을 주었다.

 

더욱이 귀신사 절의 입구에 있는 김창석비(조병갑과 함께 악행의 대명사로 알려진 인물로 1890년 균전어사로 임명되어 농민들에게 면세를 받아야 할 땅에 세금을 부여하고 개인 땅을 자신의 사유지로 둔갑시키는 악행을 저질렀고, 고종에게 신임을 얻어 승지까지 오른 인물이며 재산을 빼앗아 귀신사에 시주한 공덕으로 비가 세워짐)를 보면서 모악산과는 어울리지 않는 절로 그 당시 민중들이 느끼는 분노와 울분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귀신사는 민중에게 상처를 줬던 과거의 영욕이 사라지고, 이름에 비해 보잘 곳 없는 절이지만 양귀자님 소설 ‘숨은 꽃’에서“우선 이름으로 나를 사로잡고,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 귀신사의 분위기에 흠뻑 취해 있다가 보면 이곳을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람 속에서 실려 올 것 같기도 하고 숨결이 살아서 달려 오는듯한 착각에서 사로잡히게 한다.”라는 구절을 느낄 수 있는 절이기도 하다.

귀신사 어떤 절 ?

그럼, 귀신사는 어떤 절인가? 신라 문무왕 16년 의상대사가 신라 왕실의 지원을 받아 세운 화엄십찰 (외세를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의 접경지역에 정치적인 이유로 세운 절) 중의 하나로 백제 속에 세워진 신라계 절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백제 왕실의 내원사찰(자복 사찰: 백제왕실의 복을 비는 절)로 처음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그 이유로는 대적광전 뒤편에 놓여있는 석수와 남근석을 근거로 하고 있다. (남근석을 설치하는 것은 백제 왕실의 자복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 자복 사찰이건, 화엄사찰이건 금산사와는 대척점에 있는 사찰이 분명하다. 그러나 전자가 인정을 받고 있다.

귀신사는 금산사의 위세에 눌리고 지금은 작은 절처럼 보이지만, 한때는 금산사가 말사이기도 한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귀신사의 위용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고려 말에는 이 지역에 쳐들어왔던 왜구 300여 명이 주둔했을 만큼 사세가 컸으며 임진왜란 때 승병의 양성지이기도 했다. 절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것은 귀신사를 들어오기 전에 논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귀신사 부도와 귀신사에서 서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청도리 3층 석탑이 있다. 한때 8개의 암자를 거느렸다고 하니 청도리 3층 석탑은 귀신사에 딸린 암자에서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절 내부의 경우 대적광전과 명부전, 요사채 등의 건물, 대적광전(보물 826호)과 이 근래 들어 새로 지은 몇 채의 건물이 있다. 정면 5칸에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집으로 양옆에 풍판을 달은 귀신사 대적광전은 양쪽 처마는 겹처마이고 뒤쪽 처마는 홑처마로 된 것이 특징이다.

대적광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그 뒤에 복구했는데, 법당 안에는 어울리지 않게 1980년대 금불을 입힌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삼신불인 비로자나불(지혜를 상징하는 비)과 노사나불을 모셨다. 바로 그 뒤편에 고려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백제계 삼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62호)은 그 높이가 4.5m이다. 바로 그 옆에 엎드려 앉은 사자상 위에 남근석이 올려진 석수는 풍수지리에 따르면 이곳의 지형이 구순혈(狗脣穴)이므로 터를 누르기 위해 세웠다고 알려져 온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 “귀신사”

귀신사는 전주와 김제 유역에서 제일 큰 절에서 망해버린 절처럼 보이는 흥망성쇠를 느낄 수 있는 절이기도 하다. 귀신사의 처음 느낌은 양귀자 님이 말한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처럼 아늑하지만, 이 절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특성과 감추어져 있는 역사적 사실을 배우다 보면 그 시대 민중의 삶과 가진 자들의 변하지 않는 추악함을 느낄 수 있다.

겨울이라는 공간은 몸의 움직임을 최소화 시킨다. 몸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다 보면 뭔지 모를 허전함과 내 마음의 영원조차 쉬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럴 때 허전함과 지친 영혼을 쉬고 싶을 때 한 번쯤 가고 싶은 흙이 있는 절‘귀신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