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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지] 구월산구월산(九月山, 해발 954m, 총면적 110㎢)은 황해남도 은률군, 삼천군, 안악군, 은천군 일대에 위치한 산이다. 이전에는 궁홀산(弓忽山), 아사달산(阿斯達山), 방홀산(方忽山), 금미달(今彌達) 등으로도 불리웠으며,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칠보산, 지리산 등과 함께 '조선의 6대 명산'으로 꼽히는 아름다운 산이다. 사진: 구월산 전경 구월산은 정상인 사황봉(四皇峰)을 비록하여 주가봉, 단군봉, 인황봉 등 99개의 수많은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려한 산세와 계곡, 폭포가 잘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또한, 구월산에서 바라보는 서해바다와 드넓은 연백평야의 황금들판도 아름답다. 그래서 조선후기의 방랑시인 김삿갓은 2년 동안 9월 달에 구월산을 보고 왔다면서 그 아름다움을 시로 남겨놓았다고 한다. 또한 구월산은 600여 종의 식물들과 노루, 살쾡이, 꿩, 꾀꼬리, 부엉이 등 진귀한 동물들도 많이 살기에, 북에서는 구월산을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잘 보호하여 오고 있다. 사진: 구월산 삼성사와 삼성사에 모셔진 환인, 환웅, 단군 영정 구월산은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산의 옛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구월산은 단군 및 고조선과 관련된 일화가 많다. 가장 유명한 것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이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을 떠나 아사달로 와서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비록 북 학계에서 단군릉을 발굴하여 아사달-태백산-백악산을 단군릉이 위치한 평양의 대박산임을 입증하면서 빛이 바래긴 하였지만, 구월산에는 우리 민족의 3대 시조인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사당인 삼성사(三聖祠)가 존재하고, 단군이 타고 앉았다던 '단군대'라는 벼랑이, 그 아래에는 단군이 무술훈련을 했다는 쿵쿵바위가 남아있어서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오는 단군과 구월산과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또한, 구월산은 민중의 투쟁사와도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명종 시기에 임꺽정(林巨正), 숙종 시기에 장길산(張吉山)이 각각 지배층의 수탈과 폭정에 시달린 민중을 이끌고 농민전쟁을 벌였던 근거지인 청석골이 구월산에 위치했다. 조선후기에는 홍경래(洪景來)가 봉건정부의 세도정치와 차별, 그리고 각종 폭정에 시달린 평안도 농민, 천민, 몰락양반, 아전들을 조직하여 조선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이곳 구월산에서 격문을 발표하여 평안도 농민전쟁(1812년 1월 31일 ~ 1812년 5월 29일)의 서막을 열었다. 그리고 근대에는 의병들과 독립군도 구월산을 근거지로 삼아 일제에 맞서서 치열하게 싸웠다. 사진: 구월산 산성혁명사적지 구월산은 현대사에서도 중요한 산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21년 11월에 김형직 선생이 구월산에서 황해도 반일조직대표 회의를 소집하여 무장투쟁 노선 방침을 정한 장소가 현재 산성혁명사적지로 잘 보존되어 있다. 또, 한국(조선)전쟁 시기에는 미군과 국군의 학살에 맞서서 황해남도 주민들이 구월산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여 유격투쟁을 벌인 장소로도 유명하다. 사진: 월정사, 구월산성 이외에도 구월산에는 후기신라 때 창건되었다는 패엽사(貝葉寺) 터를 비롯하여 월정사, 흥률사, 락산사, 달마사 등의 수많은 사찰이 위치해 있으며, 구월산성(九月山城), 고려시대 청자 가마터, 오경루(五更樓) 등 다양한 역사유적이 존재한다. 그리고 구월산 골짜기 속에 구슬같이 맑은 물이 흘러내려 물안개에 무지개빛이 영롱한 룡연폭포를 비롯하여 수많은 폭포가 있고 부연(釜淵)·마연(馬淵)·요연(腰淵) 등의 수려한 계곡, 7년 동안의의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석담(石潭)·고요연(高腰淵) 등의 연못, 신라 때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황해남도의 유명한 온천인 달천온천이 있다. 이렇듯, 구월산은 비록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오랜 역사와 여러 이야기가 서려있고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멋진 산이라 하겠다. 그랬기에 선조들은 백두산, 금강산, 지리산, 묘향산, 칠보산 등과 더불어 6대 명산으로 선정하고 극찬하였던 것은 아닐까.역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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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지] 울림폭포울림폭포는 강원도(북) 천내군 장흥리 산속에 위치한 폭포로, 원산에서는 서쪽 내륙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져 있다. 벼랑에서 떨어지는 폭포 소리가 수십 리 밖에까지 울린다고 하여 '울림폭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며, 억만구슬을 날리며 흘러내리는 폭포의 장엄한 모습과 병풍처럼 둘러선 기묘한 절벽들, 울창한 숲이 한데 어울려 조화를 이룬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 따로 없다. 울림폭포의 전경. 폭포는 2단폭포*형태를 지녔고 높이는 75m에 달하며, 마식령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초당 20~25㎥의 물이 쏟아져 내린다고 한다. 폭포 아래에는 깊이 1.5m, 반경 30m 되는 소(沼)가 있으며, 소 안에는 칠색송어(무지개송어), 버들치 등을 비롯한 여러 민물고기들이 살고 있다. 2단폭포: 상단에서 한 번 물이 떨어진 다음 다시금 하단으로 물이 떨어지는 2중 구조를 지닌 폭포. 울림폭포, 구슬폭포, 비단폭포, 6담 또한, 폭포 앞에는 깊은 골짜기에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구슬폭포와 비단폭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슬폭포와 비단폭포 두 폭포가 합쳐져 6단 폭포와 6개의 담소를 이룬 6담(潭)은 울림폭포 주변의 경치를 더욱 돋궈준다고 한다. 울림폭포가 알려진 것은 현대의 일이다. 위치에서도 알 수 있듯이 험한 산골짜기 한 가운데에 울창한 숲 속에 위치하다 보니, 이 폭포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세상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 사람들도 이곳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를 신기한 힘의 분출로만 여기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이 폭포는 세상에 드러내게 되었으니, 바로 1999년에 천내-마전간 도로를 건설하던 와중에 인민군 장병들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당시 천내군에서 도로건설을 도맡아 측량사업을 전개하던 인민군 장병들은 땅에서부터 울려오는 폭포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소리를 따라 숲속으로 들어가 보니, 절벽과 숲속에 가려져 있던 울림폭포의 웅장한 광경과 메아리쳐 나아가는 경쾌한 폭포소리가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울림폭포가 발견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곳을 명승지로 개발할 데 대한 교시를 내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교시를 받은 인민군 건설자들은 천내-마전 도로에 이어 울림폭포 탐방로와 전망대, 휴양봉사시설, 주차장 등을 건설하였다. 험한 절벽으로 이뤄진 산속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하면 보다 쉽게 도로를 닦고 휴양봉사시설을 건축할 수 있었으나, 인민군 장병들은 울림폭포와 그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해치지 않고자 일일히 정과 곡괭이로 돌을 까 가며 건설하였다고 한다. 하나의 명승지를 개발함에 있어서도 자연을 해치지 않고자 공을 들인 건설자들의 노고가 느껴지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림: 선군8경-울림폭포의 메아리 그렇게, 인민군 건설자들의 노고를 통하여 울림폭포는 2001년 8월에 명승지로 개건되었다. 8월 26일에 현지지도에 나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인민군 건설자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90년대 말~2000년대 초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승리한 인민들에게 안겨줄 폭포라 칭하고 폭포가 떨어지는 중간 부분 우측 절벽에다 개건 년도인 '2001' 이라고 크게 새겨서 울림폭포 개건을 기념할 것을 교시하였다. 또한, 얼마 뒤에는 앞서 소개한 구슬폭포와 비단폭포, 6담까지 주변에 발견되었고, 울림폭포와 주변 경관들은 '울림명승지'라는 하나의 명승지로 함께 구성되어 더욱 훌륭하게 꾸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울림폭포에서 휴식을 즐기는 북 동포들(ⓒ 진천규) 울림폭포는 개성 박연폭포, 묘향산 비선폭포/룡연폭포/만폭동 금강산 구룡폭포/비봉폭포/만폭동, 해주 수양산폭포, 동림폭포, 칠보산 육단폭포/용소폭포, 백두산 사기문폭포/백두폭포 삼지연군 리명수폭포 등과 더불어 북에서 자랑하는 주요 폭포로 꼽힌다. 또한, 울림폭포 발굴 및 명승지 개건 일화를 통하여 북에서 선군시대를 대표하는 풍경인 '선군 8경'에도 '울림폭포의 메아리'로 선정될 정도로 유명한 폭포이다. 그리고 울림폭포와 그 주변의 명소들은 오늘 북 동포들에게 훌륭한 문화 휴식터로 되고 있다고 한다.역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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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김책공업종합대학김책공업종합대학은 평양시 중구역 교구동 대동강기슭에 위치한 북의 최대 공과대학이자 과학기술인재양성기지이다. 김책공업종합대학은 1948년 7월 1일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제시된 「공업대학창립방침」에 따라 김일성종합대학의 공학부와 운수공학부를 분리하여 창설되었고, 1948년 9월 27에 '평양공과대학'이란 이름으로 정식 개교하였다. 개교 당시 광산지질학부, 기계공학부, 금속공학부, 전기공학부 등 9개 학부에 80명의 교원, 1,500명 학생으로 구성되었고, 1949년 2월에 첫 졸업식이 거행되어 60명의 졸업생들이 사회에 배출되었다. 창립된 지 2년 후인 1950년에는 9개의 학부와 22개의 강좌, 110여명의 교원, 2,200여 명의 학생들로 증원되었다. 그리고 전쟁 시기였던 1951년 1월 31일에 항일무장투쟁과 해방 후 새조국 건설 과정에서 큰 공로를 세우다가 서거한 김책을 기리고자 김일성 당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내각결정 제201호」를 발표함에 따라, 학교 이름은 김책공업대학으로 바뀌었다. 또한, 김일성 최고사령관은 전쟁 도중(1952년 6월 16~17일)에도 김책공업대학(당시 평북 운전군 월현리 소재)를 현지지도하며 학생 및 학자들의 연구와 학습에 많은 관심과 배려를 돌렸다. 이후, 김책공업대학은 나라의 과학기술발전 방침에 따라 당과 내각의 적잖은 지원 속에 꾸준히 과학기술인재양성기지로 성장하여 갔으며, 1988년 5월에는 김일성 주석 개교 40주년을 기념하여 김책공업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며 학교 이름을 현재의 김책공업종합대학으로 바꾸었다. 김책공업종합대학 본교사 김책공업종합대학 혁명사적관 김책공업종합대학 1호교사 김책공업종합대학 2호교사 김책공업종합대학 3호교사 미래과학기술원 김책공업종합대학 전자도서관 김책공업종합대학 체육관 현재 김책공업종합대학은 북의 최대 과학기술인재양성기지로서, 당과 국가의 커다란 관심 속에 나라의 경제를 지식경제로 확고히 전환시키고 나라의 과학기술을 세계적 수준에 올려세울 수 있는 학술형 인재, 실천형 인재들을 더 많이 육성해내기 위한 교육 사업에서 자기의 사명과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김책공업종합대학 강의실 내부 미래과학기술원 원격 학습 김책공업종합대학 연구자 및 학생들 학습 중인 김책공업종합대학 학생들 전자도서관 컴퓨터실 전자도서관 열람실 체육관 내 체육실습(탁구) 체육관 내 체육실습(농구) 김책공업종합대학은 2개의 단과대학 아래에 기계과학기술학부, 정보과학기술학부, 광업공학부, 전자공학부를 비롯한 총 19개의 학부가 있다. 교내에는 교원 2천 명과 1만여 명의 학생들이 과학기술을 연구 및 학습하고 있으며, 각종 연구소와 전자도서관, 실습공장, 출판사, 체육관, 기숙사, 식당, 병원 등과 기타 봉사시설들이 있다. 현대적인 전자도서관에는 전자열람실들과 원격강의실, 신간도서 열람실 등이 있다. 원격강의를 통하여 여러 과목의 지식을 공고히 하거나 새로운 지식을 얻고 있다.역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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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관] 만수대의사당만수대의사당은 북의 국가의사당이다. 1984년 10월에 완공되었으며 연 건축면적은 4만 5,000㎡에 지하 1층, 지하 4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수대의사당은 남측의 국회의사당에 해당하는 기관으로, 북의 최고주권기관인 최고인민회의가 여기에서 열린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통해 전국 각지와 부문별로 선출된 대의원(2019년 14기 기준 687석. 조선로동당 607석, 조선사회민주당 60석, 천도교청우당 22석, 재일본조선인총련합 6석, 무소속 2석) 들이 정기/비정기적으로 소집되어 국무위원장 및 국무위원 선출, 내각총리 선출, 법령 개정, 조약 비준 등 나라의 중요한 사안에 대해 의결한다. 만수대의사당 전경(낮) 만수대의사당 전경(밤) 만수대의사당의 봄 만수대의사당 로비 또한, 만수대의사당에는 해외 국가 정상들과의 정상회담과 세계 각국의 정계 및 사회계 인사들과의 회담도 진행되며, 2000년에는 6.15 남북공동선언의 단초가 된 남북정상회담이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북의 최고인민회의 장면. 2018년 9.19 평양공동선언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 수행단으로 함께한 남측 국회 여야 3당 대표단과 북측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회담 장면. 독특한 건축형식으로 품위있게 세워진 의사당의 좌우 양쪽에는 조선혁명박물관과 만수대 분수공원, 인민대학습당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주변 경치와 조화를 이루면서 평양의 중심부를 더욱 웅장하게 해주고 있다.역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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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기관] 인민대학습당인민대학습당은 북 최대의 중앙도서관으로, 평양 중심부에 위치한 김일성광장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인민대학습당은 1980년 7월 김정일 당시 조선로동당 비서의 발기로 착공되었으며, 1년 9개월만인 1982년 4월 1일에 태양절(4월 15일, 김일성주석 탄생일) 70주년을 맞아 개관하였다. 연면적은 10만여㎡에 달하며, 건물 형태는 전통 기와집 형태를 계승한 석조건물로서 총 10개 층(지상 6층, 지하 4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민대학습당의 운영시간은 북의 국경일 및 명절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다. 당초에 인민대학습당이 위치한 자리에는 정부청사를 지으려 했으나, “인민대중을 위한 도서관을 짓자”는 김일성 주석의 제안에 따라 인민대학습당을 세웠다고 한다. 북에선 인민대학습당을 ‘김 주석의 이민위천(以民爲天, 백성을 하늘같이 대하다)의 애민정신이 어린 대표 사례’로 자랑한다. 인민대학습당 중앙홀 열람실 열람실을 방문한 외국인관광객 문답실 인민대학습당 중심에는 큰 홀에 종합목록도서실과 3개 층으로 구성된 서고(서적 3천만 권 이상 수용 가능)가 있으며, 부속시설로 대형 강의실과 대열람실, 개별학습실, 음악감상실, 자료통보실, 문답실, 외국어강의실, 800석 종합강의실 등을 비롯한 600여개의 방들이 꾸려져 있다. 컴퓨터열람실 음악감상실 국제학술토론회 국제학술토론회 인민대학습당에는 매일 평균 1만 명 이상의 평양시민과 북 인민들이 방문하여 공부하며, 내부에는 방문객들을 위하여 외국어(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등),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의 다양한 강의가 정기적으로 열린다. 또한, 김일성종합대학이나 김책공업대학 등에서 은퇴한 노교수들이 문답실에 상주하며 방문객을 상대로 질의응답과 개별학습을 진행하며, 컴퓨터 자료나 음악감상을 할 수 있는 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이외에도 해외동포들이 기증한 서적 및 자료(책 61만 7,900여부, 특허자료 303만 5,500여건, 과학기술자료 161만 2,100여건) 등을 소장하여 열함할 수 있는 애국도서열람실과 국제교류를 통하여 교류한 책들을 소장하고 각종 국제학술대회가 열리는 국제기구위탁도서관이 있다. 인민대학습당 6층에는 전망대가 위치하여 대동강변과 평양 시내를 한눈에 관람할 수 있다.역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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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김일성종합대학김일성종합대학은 평양시 대동강변 룡남산 언덕에 위치한 북의 최대 종합대학이다. 김일성종합대학의 설립 과정은 다음과 같다. 조선이 해방을 맞은 해인 1945년 11월 3일, 김일성 당시 북조선림시인민위원장이 나라 교육의 모체 기지 역할을 하는 종합대학을 먼저 세울 데 대한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11월 18일에 민주인사와 교육관계자들이 평양에 《대학건설기성회》를 조직하였고, 1946년에는 5월 25일 학교 창립을 위한 《종합대학창립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7월 8일에는 대학 창립을 위한 법령인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결정 제40호》가 채택되며 학교 이름을 김일성 위원장의 존함을 올려 《김일성종합대학》으로 명명하였다. 마침내, 9월 1일 종합대학에서의 첫 수업(창립 당시 7개 학부(력사문학부, 경제법학부, 물리수학부, 공학부, 농학부, 의학부, 운수공학부), 학과 24개, 학급 30개, 학생 1,500명, 교원은 68명)이 시작되고, 9월 15일 개교식을 열어 김일성종합대학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학교창립기념일은 1947년 10월 1주년 행사 때 10월 1일로 채택) 종합대학엔 차례로 대학도서관, 농장, 인쇄공장, 연구원 등이 새롭게 지어졌으며 1948년 9월에는 대대적인 단과대학 개편을 단행하여 공학부와 운수공학부는 평양공업대학(현 김책공업대학), 농학부는 평양농업대학(현 원산농업대학), 의학부는 평양의학대학으로 분리하였고 김일성종합대학엔 5개 학부(력사문학부, 경제법학부, 물리수학부, 화학부, 생물학부)가 남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1949년 12월 28일엔 제1회 졸업식(물리수학부 19명)이 진행되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전쟁 기간(1950~1953년)에는 전시교육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전쟁 와중에도 2회(1950.06.30.), 3회(1952.12.05.) 졸업식을 진행하였다. 전후복구시기였던 1955년 7월 1일에는 김일성 당시 수상이 대학을 현지지도하여 대학 복구사업과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의 과학연구 및 인재양성 방향에 대한 지침을 마련하였다. 1960년 9월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여 다양한 사상이론 연구사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1964년 3월 18일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졸업논문《사회주의건설에서 군(郡)의 위치와 역할》을 발표하였고, 4월 졸업 후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당중앙위원회에서 사업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로도 김일성종합대학은 북의 교육정책에 따라 꾸준히 확대발전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사회과학(경제학부, 력사학부, 철학부, 법학부, 조선어문학부, 외국어문학부, 재정금융학부) 및 자연과학부문(수학부, 물리학부, 에네르기과학부, 정보과학부, 화학부, 생명과학부, 지구환경과학부, 지질학부, 력학부, 재료과학부, 전자자동화학부, 산림과학부), 기타부문(원격교육학부, 교육학부) 등의 학부, 연구소(사회과학연구원, 자연과학연구원, 첨단기술개발원, 교육과학연구소)들, 수많은 보장 단위(도서관, 기숙사, 체육관 등)들을 가지고 있다. 1호교사 2호교사 3호교사 4호교사 화학부교사 산림과학부교사 전자도서관(옛 본관 건물을 본땀) 전자도서관 내부 과학도서관 자연박물관 첨단기술개발원 학부 강의 전자도서관 내 컴퓨터실 컴퓨터 수업 석양이 진 전자도서관 전경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학부생 시절 지은 것으로 유명한 노래 《조선아 너를 빛내리》 시비 앞의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 김일성종합대학 사회과학지도부와 자연과학지도부, 교무부를 비롯한 행정관리부서들은 교원, 연구사들의 교육과학사업을 장악・지도하면서 대학에 정연한 사업체계와 교육규율을 확립하고 있다. 사회과학부문과 자연과학부문의 학부들은 과학의 종합적 발전 추세와 나라의 사회경제 발전의 요구에 맞게 서로 긴밀히 연계하고 협동하여 새로운 경계과학을 개척하면서 유능한 인재들을 키워내고 있다고 한다. 김일성종합대학 교내에는 여러 분야의 연구소들이 창설되고 강화되어 교육과 과학연구, 생산의 일체화를 실현하기 위한 사업에서도 많은 성과를 이룩하고 있다고 전한다. 14호 기숙사 15, 16호 기숙사 기숙사 내부 체육관 해외유학생 숙소 해외유학생 숙소 내부 해외유학생 숙소 식당 해외유학생 숙소 체육관에서 체력단련을 하는 유학생들 수영관 수영관에서의 수영 실습 교내 병원 교육자 주택 교원, 연구사들이 달성하고 있는 교육과학 성과에는 후방 및 관리부서(병원, 정양소, 식당 등)들, 출판사, 인쇄공장을 비롯한 보장 단위 종업원들의 노력도 깃들어 있다. 오늘날, 김일성종합대학은 북에서의 교육과 과학 연구를 밀접히 결합시키고 창조형 인재 육성과 첨단 과학 이론, 기술 창조를 기본으로 하는 대학으로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고 있다.역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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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주체사상탑주체사상탑은 동평양 대동강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탑은 김일성 주석이 북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을 창시한 것을 기념하여 건립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당시 조선로동당 비서)이 발기하여 1980년 4월 30일에 착공하였고, 1982년 4월 태양절(김일성 주석의 생일) 70돐을 맞아 준공되었다. 주체사상탑은 건립 과정에서 전통적인 조선식 석탑건축양식을 살려 흰색 화강석을 쌓아 올렸으며, 세계적으로 알려진 석탑들 가운데서 가장 높은 탑이다. 탑은 탑신(높이: 170m(탑신 150m, 봉화 20m))과 봉화로 이루어졌으며 그 주변에 3인 군상과 부주제 군상들, 정각과 2개의 대형 분수(150m)가 있다. 탑신은 김일성 주석이 주체사상을 창시한 사상이론적 공적을, 봉화는 인류가 나아갈 앞길을 밝게 밝혀주고 있는 주체사상의 위대성과 진리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탑의 정면에 위치한 3인 군상 동상은 북의 근로인민대중 3대 계층인 노동자, 농민, 근로인텔리(지식인)가 각기 망치와 낫, 붓을 들어서 조선로동당 마크를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탑 주변에는 총 6개의 부주제 석상이 있는데, 노동자, 농민, 근로인텔리, 인민군대 등 북의 근로인민대중을 형상화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북의 사회주의 교육제도 아래서 꿈을 키워나가는 청년학생 및 문학예술가들과 사회주의 무상의료 및 무상보육제도 아래서 행복한 삶을 사는 인민들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탑 뒤켠에는 해외의 여러 나라 국가 및 정부 수반과 인사들, 주체사상 신봉자들이 기증한 진귀한 기념판 돌들을 전시하였다. 탑 내부에는 승강기가 있고, 승강기를 타고 탑 전망대에 오르면 평양시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역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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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유원지] 시중호시중호는 천연기념물로 등록된 넓이 2.36㎢, 둘레 15㎞의 호수이다. 호수의 이름은 동남쪽에 위치한 ‘시중대’라는 정자의 이름에서 따왔다. 원래 동해안의 작은 만이었으나 연안흐름의 작용을 받아 모래가 쌓이면서 석호로 형성되었다. 푸른 동해를 왼쪽에 끼고 금강산을 향해 남쪽으로 약 52㎞정도 내려가면 흰 파도가 철썩이는 바다와 대조를 이루는 잔잔한 시중호가 펼쳐진다. 원산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가운데 위치한 이곳은 중간휴식장소로 인기가 많다. 시중호은 바다 관광, 호수 관광, 치료 관광을 동시에 할 수 있는 특별한 관광지이다. 해수욕, 담수욕을 할 수 있는 장소들과 낚시터, 보트장 등 여러 문화시설들이 마련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위해 찾는다. 이 호수는 3면이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동쪽은 소나무 숲과 넓은 흰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장관을 이루는 해수욕 명소이다. 동쪽의 바다에서 큰 파도가 치면 호수로 물이 넘어오기도 한다. 또한 물오리·도요새·기러기 등의 철새가 찾아들고 잉어·붕어·뱀장어·가물치·초어·황어 등 다양한 어류가 서식한다. 호수의 북쪽에는 소동정호와 천아포가 있고, 남쪽에는 관동팔경의 하나인 총석정이 있다. <시중호의 남쪽에 위치한 총석정> 호수의 앞바다에는 천도, 우도, 송도, 석도, 백도7개의 섬이 있으며 호수 바닥에는 4~5m 두께의 질이 좋은 감탕이 깔려있다. 감탕에는 유화철, 칼슘염, 마그네슘 등이 섞여있어서 신경통·위장병·기관지염·피부병 등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다. 그래서 이곳에는 감탕을 활용하여 치료하는 요양소들과 주민들이 쉴 수 있는 휴양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시중호요양소> 평양의 문수기능회복원에는 시중호의 감탕을 활용한 치료실도 있다. 주로 골관절통, 신경통, 수술후유증을 치료하는 곳이며 효과가 좋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문수기능회복원>역문협
북녘 유적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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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라선시 해양동 초도 청동기유적최근, 북의 잡지 《금수강산》10월호(통권 제398호)에 라선시 초도에서 새로운 청동기시대 유적 및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이 실렸다. 다음은 기사 전문이다. 청동기시대의 새로운 유적 발굴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라선시 민족유산 보호관리소를 비롯한 민족유산보호부문의 일꾼들과 연구사들이 최근 라선시 라진구역 해양동의 초도에서 조선 사람(우리 민족)의 형성 과정과 이 지역 청동기시대 문화를 잘 알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역사유적을 발굴하였다. 유적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묻힌 무덤으로서 장방형의 구덩이 안에 나무관(木棺)을 묻어 놓은 것인데, 여기에서는 두 명분의 사람 뼈와 20 여점의 유물들이 발굴됐다. (초도에서 발굴된 사람 머리뼈) 사람 뼈는 머리뼈 봉합상태와 관절 부위의 특징으로 보아 20~30세 되는 남성과 여성의 것으로 인정되며, 우리나라에서 신인(Homo Sapiens) 단계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조선 사람의 고유한 특성이 신석기시대 조선옛유형사람을 거쳐 청동기시대 조선옛유형사람으로 련면히(꾸준히) 이어져 내려온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머리뼈의 형태를 보면, 남자는 단두형(短頭型)이고 여자는 단두형에 가까운 중두형(中頭型)이다. 머리뼈의 인류학적 특징들을 보면 이마가 아주 곧고 얼굴뼈가 중간 얼굴형이며, 콧마루가 낮고 중간코형에 속한다. 눈확(눈구멍)은 높은 눈확형에 해당되며, 입천장이 아주 넓은데 이것은 청동기시대 조선옛유형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고유한 특징들이다. 이것은 이 무덤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청동기시대에 우리 나라에서 살고 있던 조선 사람의 직계 선조이며, 같은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 생활하던 사람들과 구별되는 자기의 고유한 인류학적 특징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초도에서 발굴된 간석기와 질그릇 유물들) 무덤에서 나온 곰배팽이, 도끼, 자귀, 활촉, 창끝, 찌르개살과 같은 석기들은 여러 가지 재질의 돌들을 잘 다듬고 정교하게 갈아 만든 것들이다. 그리고 질그릇은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에 쓰인 대표적인 붉은 간그릇(붉은 간토기)으로서 조화로운 균형미와 섬세한 제작기술을 보여주는 것으로 하여 하나의 공예품을 방볼케 한다. 이번에 초도에서 발굴된 사람뼈와 유물들은 조선 사람은 먼 옛날부터 우리 조국 강토에서 하나의 핏줄을 가지고 자기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빛내면서 독자적으로 살아온 단일민족이라는 것을 확증해 주는 또 하나의 물질적 자료로 된다. 원문: 「청동기시대의 새로운 유적 발굴」, 《금수강산》 주체111(2022)년 10월호(통권 제398호), 오늘의 조국사, 2022.10.역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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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영통사(靈通寺)▷지정번호 : 국가지정문화재 국보유적 제192호 ▷1027년(고려 현종 18년) 창건, 2005년 개건 ▷총면적 6만여 m², 연건평 4천여 m², 전각 29채 영통사는 개성 시내에서 북쪽으로 12km 떨어진 오관산 령통골에 자리 잡고 있는 고려시대 사찰이다. 1027년(현종 18)에 왕실 원찰로 건립되었으며 화엄종(華嚴宗)의 중심 사찰이기도 하다. 원래 영통사는 태조 왕건이 건립한 숭복원(崇福院) 자리에 새롭게 지은 사찰인데, 숭복원은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의 외조부 보육(寶育)이 살던 암자를 확장한 사찰이라고 전해진다. 영통사 전경 영통사 보광원과 5층석탑 ⓒ 진천규 영통사는 우리나라 불교교단에서 처음으로 천태종을 널리 퍼뜨리고 그 시조로 명성이 높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이 활동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대각국사는 1055년 9월 개성 만월대에서 고려 11대 국왕 문종(재위 1047~1082)의 넷째 아들(속명: 왕후)로 출생해 1065년 10살 때 영통사에서 승려생활을 시작했다. 대각국사는 '교관겸수(敎觀兼修, 교종과 선종을 아울러 수양해야 한다)'를 바탕으로 개성 흥왕사(興王寺)에서 교단통합운동을 벌여 우리나라 불교 교단에서 처음으로 천태종(天台宗)을 크게 퍼뜨리고 그 시조가 됐다. 대각국사 의천의 영정(전남 순천시 선암사) 고려시대의 금속화폐 대각국사는 생애의 전 기간 불교의 학설을 깊이 탐구하여 수많은 불교 경전들을 집성하고 방대한 규모의 대장경을 간행하여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등 당시 아시아 불교계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 또한, 형이었던 고려 15대 국왕 숙종(재위 1095~1105)에게 화폐 사용을 건의하여 건원중보(乾元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 해동통보(海東通寶), 은병(銀甁) 등의 다양한 금속 화폐를 제작하고 보급에 힘썼다. 한편, 『고려사』에 따르면 영통사에는 세조(왕건의 아버지 왕륭)와 태조, 문종, 인종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며, 『동국여지승람』에도 이 절에 문종의 화상과 고려 후기의 재상이자 충신으로 이름난 홍자번(洪自藩)의 화상이 있었다고 전하여 온다. 그리고 고려시대 역대 왕들이 자주 행차하여 연등회, 팔관회 등 각종 불교행사를 베풀었다. 영통사 보광원 내부의 불상. ⓒ 진천규 영통사는 고려 초기에 건설되어 16세기까지 존재하였다. 이후, 2003년에 북측의 조선불교도련맹과 남측의 대한불교천태종이 남북협력사업으로 함께 복원을 추진하여 2005년 10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훌륭하게 개건하였다. 개건 이전의 영통사터 사진 (『조선고적도보』) 영통사 대각국사비 ⓒ 진천규 영통사 당간지주 ⓒ 진천규 영통사 중각원 영통사는 대법당인 보광원(普光院)과 왕의 숙소로 사용된 숭복원, 중각원 등 29채의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내에는 영통사 대각국사비(북 국보유적 제155호)와 령통사 5층석탑(북 국보유적 제 133호), 령통사 당간지주(북 보물급 문화재 제37호) 등 고려시대 석조조각기술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 위치해 있다.역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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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정릉사(定陵寺)▷지정번호 :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174호 ▷1974년 발굴, 1993년 개건 ▷남북 길이 132.8m, 동서 너비 223m, 총면적 3만m² 정릉사는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동명왕릉 앞쪽에 위치한 고구려시대의 절이다. 고구려의 절터는 정릉사를 비롯하여 청암리에 위치한 금강사터, 원오리절터, 상오리절터 등이 존재하는데, 정릉사는 현존하는 절터 중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상태 역시 우수하다. 1974년 발굴 당시 동명왕릉과 정릉사터 정릉사 가람배치도 구글어스를 통하여 본 동명왕릉과 정릉사 위성사진 ⓒGoogle 정릉사 복원도 정릉사의 규모는 남북 길이 132.8m, 동서 너비 223m, 총면적 3만m²이며, 창건 당시 총 18개의 건물로 구성되었다. 절의 중앙엔 8각 7층목탑(기단 너비 20.4m, 높이 약 60~70m)과 그 주변으로 3개의 금당과 중문, 강당을 두어 전형적인 고구려식 가람배치형태인 1탑 3금당 형식을 따르고 있다. 또한, 중앙동 좌우로 부속건물들이 조성되었으며 건물 둘레를 회랑으로 둘러쌓았다. 그리고 절의 뒤켠에는 8각형 형태의 우물이 온전하게 발굴되었는데, 우물에서는 투구, 방패 등을 비롯한 철제품과 정릉사의 머리글자인 ‘정(定)’, ‘고구려(高句麗)’, ‘정릉(定陵)’, ‘릉사(陵寺)’ 라고 새겨진 질그릇 조각들이 출토되어 북 학자들이 동명왕릉의 수호 사찰인 ‘정릉사’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정릉사 입구 문에 높이 달린 현판은 출토 당시 그릇에 새겨진 글씨 원형을 살려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그뿐 아니라 토제품, 목제품, 석제품을 비롯해 동식물류들의 유골이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됐는데, 특히 동물뼈 중에는 당시 고구려인들이 사냥하여 제사를 지낸 것으로 추정되는 호랑이, 사슴, 노루, 너구리 등 11종이 발굴됐고 총 35종에 1,130점이나 되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정릉사는 동명왕릉과 함께 1974년 5월부터 11월까지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교수 채희국 박사가 1,500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발굴하였다. 그리고 1993년 5월 14일에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당시 조선로동당 비서의 현지지도를 통하여 동명왕릉과 함께 고구려 양식으로 일부 건물(8각 7층석탑, 보광전, 용화전, 극락전, 중문, 강당)이 개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만 개건 당시에 8각 7층 목탑이 온전히 복원되지 못하고 8각 7층석탑으로 대체된 것은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정릉사 전경 정릉사 경내 전경 정릉사 중문 정릉사 보광전 정릉사 8각7층석탑 정릉사보광전 불상 정릉사 보광전 내부 천장 단청 정릉사 주지스님 정릉사 용화전 정릉사 극락전 정릉사 뒤켠의 붉은기와 조각과 우물 정릉사 우물역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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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중흥사당간지주 (重興寺幢竿支柱)▷지정번호 :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147호 현재는 폐사되어 당간지주만 남아 있는 중흥사(重興寺)는 고려의 태조(877~943)가 창건한 절로 알려졌으나, 1590년(선조 23년)에 편찬된 『평양지(平壤誌)』에서는 그 창건연대를 광개토대왕 시기(391~412)라고 설명한다. 이를 입증하듯, 최근 중흥사 터에서 고구려의 기와 조각들이 다량 출토되어 절의 창건연대를 고구려대로 추정하고 있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불화가 그려진 당(幢)이라는 깃발을 걸던 깃발대인 당간(幢竿)을 지탱하기 위해 당간 좌·우에 세운 기둥(支柱)이다. 철제·금동제·목제인 경우도 있으나, 보통은 돌로 제작된다. 중흥사의 당간지주는 현재 좌·우 한 쌍으로 세워진 지주(支柱)만 남아 있는데, 그 높이는 약 4m로 현존하는 한반도의 당간지주 중에서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게다가 당간의 높이는 보통 지주 높이의 약 4~5배이므로 중흥사의 장대 높이는 약 16~20m 정도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당시 중흥사의 규모 또한 웅장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당간지주의 외형은 전반적으로 세장형을 띄고 있는데, 모서리를 없애는 모죽임을 하지 않아 전체가 예리하게 보인다. 지주의 표면에는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았고, 당간을 고정하기 위해 아랫부분에는 간공(竿孔), 최상단에는 V자형으로 간구(杆溝)가 뚫려있다. 지주의 하단에는 당간을 받치기 위한 간대(竿臺)가 있으며, 그 아랫부분인 기단석은 현재 매몰되어 상면만 드러나 있다. 중흥사의 당간지주는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당간지주 중 하나이며, 과거 중흥사의 위치와 규모를 짐작 가능케 하고 당시의 석조물 연구에 좋은 예시가 되어주고 있다. (이정훈) <참고문헌> 문화성물질문화유물보존소, 1963, 『우리나라 주요 유적』, 군중문화출판사/ 국립문화재연구소 검색어:중흥사당간지주 (http://portal.nrich.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검색어:중흥사당간지주 (http://encykorea.aks.ac.kr) 중흥사당간지주 전경 Ⓒ국립문화재연구소 중흥사당간지주 평면도 Ⓒ국립문화재연구소 중흥사당간지주 입면도 Ⓒ국립문화재연구소 중흥사당간지주 간대 Ⓒ국립문화재연구소역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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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진주못 (眞珠池)진주못은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동명왕릉의 서쪽에 있는 인공연못으로 고구려사람들이 왕릉을 옮겨올 때 만든 것이라고 전한다. 못은 제(梯)형으로 그 가운데 4개의 섬 모양 흙무지가 쌓여있다. 이 섬들은 모두 원형으로서 그 위에는 버드나무가 심겨 있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던 이 못은 그 깊이와 축조 연대를 알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발굴조사 되었다. 그 결과, 원래의 못 바닥은 현재의 바닥보다 약 4.4m나 더 깊었으며, 크기 또한 원래의 것보다 훨씬 작아진 사실들이 보고되었다. 연못이 원래의 규모보다 작아진 이유에 대해서는 오랜 기간 물과 함께 흘러내린 토사가 못을 메꾸었고, 그 위로 사람들이 논을 경작한 것에 있다고 밝혔다. 한편, 연못의 서쪽 둑 남쪽 끝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주거지 터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고구려의 붉은 기와 조각이 출토되어 이 연못이 고구려 시기의 유적으로 편년이 되는 근거가 되었다. 이 외에도 바닥 조사 중에는 탄화된 연꽃 씨앗이 발견되어 원래 이 연못은 연꽃잎이 무성했던 곳이라고 추정하였다. ‘진주못’이라는 이름은 과거 동명왕릉을 ‘진주묘’라고 부르는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옛날에는 ‘진주지(眞珠池)’라고 불렀다고 동국여지승람에서 전하고 있다. 1986년 북한 정부는 못을 크게 확장하고 정각도 세워 시민들의 문화휴식터로 조성했다. 또한, 연못가의 8각 정자는 못을 발굴할 때 나온 기와 조각에 기초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정훈) <참고문헌> 김일성종합대학, 1976, 『동명왕릉과 그 부근의 고구려유적』,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북한정보넷 검색어:진주못 (http://www.cybernk.net)/ 진주못 실측도 Ⓒ『동명왕릉과 그 부근의 고구려유적』역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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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청계동 고구려 돌칸흙무덤떼 (淸溪洞 高句麗 石室封土墳群)평양직할시 룡성구역 북쪽의 월봉산 남쪽 구릉지역에는 여러 기의 돌칸흙무덤(석실봉토분)과 벽화무덤(벽화분)이 위치한다. 총 9기의 무덤이 보고되었으며, 이 중 돌칸흙무덤으로 보고된 무덤은 1호, 2호, 3호, 6호, 7호, 8호, 9호무덤의 6기이다. 4호, 5호 무덤은 벽화무덤으로서 추후에 ‘청계동벽화무덤’으로 따로 설명하도록 하겠다. 6기의 돌칸흙무덤은 모두 반지하식에 안길(연도)과 주검칸(현실)으로 이루어진 외칸무덤으로 무덤의 축조형식은 대부분 비슷하다. 안길과 주검칸의 벽면은 모두 막돌(자연석) 또는 깬돌(할석)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는데, 중간의 비어있는 이음부분은 회반죽을 채워 넣었고 겉면에는 회미장을 하여 마무리하였다. 바닥도 대부분 회미장으로 마무리하였는데, 1호무덤의 경우 회미장 아래에 숯을 깔아 지하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더욱 효과적으로 차단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9호무덤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들은 안길과 주검칸 사이에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현문이 존재한다. 그 중 1호무덤은 문확시설이 달려있어 현문을 잘 고정시켜주고 있는데, 이는 문확시설이 없어 앞으로 무너져 내린 다른 무덤들의 현문과 비교된다. 평천정을 지녔을 것으로 추정되는 안길과 다르게 주검칸의 천정들은 대부분 무너져내려 본래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1호무덤의 경우, 아직 천정이 온전하게 남아있으며, 그 형태는 ‘평행삼각고임천정(모줄임천장)’이다. 이는 무덤 천정의 네 귀퉁이에 삼각형의 받침돌을 놓아 천정을 올리는 방식으로 평면모습을 보았을 때, 사각형 안에 마름모·마름모 안에 사각형이 들어 있는 모습을 띤다. 평행삼각고임천정은 동서양을 막론한 다양한 곳에서 발견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시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이와 같은 1호무덤의 천정형식을 통해, 1단의 평행고임만 남아있는 2호무덤 또한 평행삼각고임식 천정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청계동 무덤들은 도굴을 당해 남아있는 유물이 거의 없지만, 1호무덤과 2호무덤에서는 소량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1호무덤의 경우, 심하게 삭아서 그 형태가 명백하지 않은 철제 관못과 어디에 붙어있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관모 장식으로 추정되는 나뭇잎형 조각 1점이 발견되었다. 2호무덤은 고구려 무덤에서 흔히 발견되는 버섯갓 모양의 대가리를 지닌 관못과 약간의 금실이 나왔다. 금실은 실처럼 가는 두께로 어떤 장식에 사용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고구려의 금제련술의 일면의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앞서 살펴본 특징들에서 1호무덤은 청계동의 다른 무덤들과 다른 구조 및 유물을 지녔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외에 한 가지 더 눈에 띄는 특징이 나타나는데, 주검칸의 서쪽과 남쪽벽에 남아있는 묵서가 바로 그것이다. 자연풍화와 군데군데 떨어진 회벽으로 인해 서쪽과 남쪽의 묵서는 각각 11자와 10자만 알아볼 수 있으며, 해석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남아있는 묵서와 발견된 유물, 무덤의 형식 등으로 보아 1호무덤은 당시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의 무덤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정훈) <참고문헌>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고구려의 돌칸흙무덤(1)』(조선고고학전서30), 진인진/ 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조선고고연구해제집1 (1986~2000)』, 국립문화재연구소 1호 무덤 Ⓒ『고구려의 돌칸흙무덤(1)』 2호 무덤 Ⓒ『고구려의 돌칸흙무덤(1)』 3호 무덤 Ⓒ『고구려의 돌칸흙무덤(1)』 4호 무덤 Ⓒ『고구려의 돌칸흙무덤(1)』 5호 무덤 Ⓒ『고구려의 돌칸흙무덤(1)』 6호 무덤 Ⓒ『고구려의 돌칸흙무덤(1)』 7호 무덤 Ⓒ『고구려의 돌칸흙무덤(1)』역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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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청계동벽화무덤 (淸溪洞壁畵古墳)평양시 용성구역 청계동에 위치한 청계동고구려돌칸흙무덤떼 중 제4호무덤과 제5호무덤이 벽화무덤에 해당한다. 제4호벽화무덤은 제1호무덤에서 서북쪽으로 약 135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무덤무지는 발굴 당시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무덤무지의 크기는 남북직경 9m, 동서직경 7.8m, 높이는 0.7m 정도였다. 무덤은 능성의 경사면을 평평하게 깎아내어 주검칸, 안길칸, 안길을 마련한 반지하식의 외칸이다. 무덤의 방향은 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이다. 주검칸의 크기는 길이 256cm, 너비 240cm, 남은 벽의 높이는 80cm이다. 주검칸은 정방형의 외칸으로서 바닥에 1개의 관대가 주검칸 중심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 관대시설은 작은 막돌 또는 판돌로 약간 높이고 그 위에 회미장을 하였다. 안길은 주검칸의 남벽 중심에 설치되었다. 안길의 크기는 길이 140cm, 너비 134cm, 벽의 높이 76cm이다. 안길칸은 안길과 같지만 길이와 너비를 안길보다 작게 만들었다. 안길칸의 크기는 길이 40cm, 너비 110cm, 높이 80cm이다. 문시설도 있었으나 파괴되어 없다. 이 무덤은 심한 도굴로 인해 유물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벽화의 흔적은 약간 남아있지만 이마저도 다 떨어지고, 떨어진 벽화들도 매우 희미하다. 제5호벽화무덤은 제4호무덤에서 동쪽으로 약 20m 떨어진 곳에 있다. 무덤은 발굴당시 천장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고, 주검칸 및 안길도 많이 파괴된 상태였다. 무덤은 주검칸, 안길칸, 안길로 된 반지하식의 외칸이다. 무덤의 방향은 동쪽으로 치우친 남향이다. 주검칸의 크기는 길이 286cm, 너비 256cm, 남은 벽의 높이는 172cm이다. 주검칸의 평면은 장방형이며 회벽은 많이 떨어졌는데 남아 있는 회벽과 떨어진 회벽에는 희미하게 벽화의 색소가 남아 있다. 주검칸 바닥에 동, 서벽에 치우쳐 각각 1개의 관대가 놓여 있다. 관대는 작은 강돌 또는 깬돌을 약간 높게 쌓고 회미장을 한 것이다. 안길은 주검칸의 남벽 중심에 설치되어 있으며 크기는 길이 236cm, 너비 97cm, 높이 112cm이다. 안길칸은 안길과 같지만 길이와 너비를 작게 만들었다. 안길칸의 크기는 48cm, 너비 97cm, 높이 112cm이다. 이 무덤도 4호무덤과 같이 심한 도굴과 파괴로 인해 유물이 남아 있지 않으며 벽화도 모두 손상되었다. (정슬주) <참고문헌> 최응선, 2003, 「청계동고구려돌칸흙무덤떼 발굴보고(2)」, 『조선고고연구』2003-2, 사회과학출판사 청계동 제4호벽화무덤 평면도 ⓒ『조선고고연구』2003-2 청계동 제5호벽화무덤 평면도 ⓒ『조선고고연구』2003-2역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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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청운동무덤 (靑雲洞古墳)평양시 삼석구역 장수원동에 위치한 청운산의 남쪽 경사면에 10여기의 무덤이 분포되어 있다. 대부분의 무덤은 파괴되었으며 그 중 서남쪽에서부터 3번째 자리에 놓인 무덤 1기만 발굴하였다. 해당 무덤을 발굴한 당시에 무덤무지는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남은 무덤무지의 크기는 직경 6.5m, 높이 1m 정도였다. 무덤칸은 판돌을 이용하여 돌관처럼 만들었다. 남쪽에 세웠던 판돌은 없어졌거나 넘어져 있었다. 안길 시설은 따로 없으며 무덤칸의 남쪽 벽에 판돌을 세워 문의 역할을 하게 두었다. 무덤칸의 천장은 2개의 판돌을 잇대어 덮은 평천정으로 발굴 당시에는 깨져있었다. 바닥은 평평한 면이 위로 올라오게 막돌을 깔아놓았다. 발굴한 무덤은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이었다. 이 무덤에서 나온 유물로는 회색질그릇조각 1개, 부러진 쇠관못 3개가 있다. 회색질그릇조각은 부드러운 진흙에 가는 모래를 약간 섞어서 만든 것으로 겉면은 회색이다. 쇠관못은 버섯갓 모양의 대가리에 단면이 네모나고 끝이 뾰족한 대가 붙어 있는 것들로, 매우 삭아서 대가리 부분만 남은 2개와 못대부분 조각 1개였다. 못대가리의 직경은 2.5cm, 대의 굵기는 1cm이다. (정슬주) <참고문헌>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고구려의 돌칸흙무덤(1)』(조선고고학전서30), 진인진역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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