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공세로 적군을 물리친 28년 고구려후한 전쟁

 

안광획

 

28년 7월에 있은 고구려와 후한(後漢) 나라 사이의 전쟁은 자기 겨레의 옛 강토를 되찾으려고 시종일관 투쟁해 오던 고구려와 어떻게 하나 그것을 저지시켜 보려는 후한나라 사이에 벌어진 정의(正義)와 부정의(不正義) 간의 전쟁, 침략과 반침략 전쟁이었다.

 

중국에서 후한 왕조가 신(新)나라 말기의 혼란된 정국을 수습하고 있을 무렵 료동(遼東) 지방에 둥지를 틀고 있던 후한통치배들은 주변 나라들과 민족들에 대한 침략 책동을 버리지 않았으며 28년 7월에는 후한 왕정의 비호 밀에 고구려를 반대하는 새로운 침략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들은 빼앗긴 동족의 땅을 되찾기 위한 고구려 인민들의 정당한 투쟁을 ‘죄’로 몰아붙이면서 그에 대하여 ‘추궁’하려 한다는 것을 침략의 구실로 삼았다.

 

당시 고구려는 영역을 부단히 확장하고 겨레의 옛 땅을 모두 되찾으며 이에 따라 정연한 통치체제를 확립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형편에서 고구려 측으로서는 후한나라의 불의의 침공에 대처할 준비를 잘하지 못하고 있은 것으로 보인다.

 

적의 대군이 침공해온다는 소식을 접한 대무신왕(大武神王)은 곧 어전회의를 열고 대책을 토의하였다. 기본은 적군을 맞받아나가 싸우는가 아니면, 성에 의거하여 지키는가 하는 것이었다.

 

우보(右輔) 송옥구(松屋句)의 계책은 적군은 변방 군사이고 명분이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 따라서 적을 맞받아나가 험한 지형을 먼저 차지하고 적을 일단 저지시켜놓은 다음 적들이 생각지 못했던 곳으로 불의에 습격하면 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진: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성의 산성인 오녀산성(五女山城). 중국 료녕성 본계시 환인만족자치주 소재.)

 

물론 타당성은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은 자연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험한 지형은 혼자서 길을 막고도 만 명을 당해낼 수 있는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림: 북의 역사인물이야기 만화 󰡔을두지󰡕(김광수 글, 변철혁 그림, 금성청년출판사, 2014) 표지)

 

하지만 좌보(左輔) 을두지(乙豆智)는 그와 견해를 달리하였다. 그는 군사가 적은 쪽은 강하더라도 적의 대군에게 포로가 된다고 하면서 고구려는 수적으로 불리하니 힘이 아니라 지혜로 물리쳐야 한다고 하였다.

 

결국 그는 옛 병법의 문구를 인용하여 수성전을 벌일 것을 은연중에 암시한 것이었다. 병법에서는 적에 비하여 적으면 퇴각(방어)하며 적에 비하여 약하면 싸움을 피해야 한다. 때문에, 소수인 군대로 버티기만 하면 대군에게 포로가 되기 마련이다.”라고 하였다.

 

물론 송옥구의 의견 가운데서 적 정탐 결과에 관한 판단은 비교적 정확하고,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불의의 기습전을 조직하면서 맞받아 공격할 것에 대한 계책도 영 그른 것은 아니었지만 완벽한 대책은 아니었다. 비록 후한나라 한 개 변방 지역 군대의 군력(軍力)이라고 하더라도 당시의 역량 대비로 보아 고구려군보다 강대하였던 것만큼, 이를 힘으로 이기기보다는 꾀로써 치는 편이 더 나았다. 그렇기에 공적 있는 군사 전문가이기도 하였던 대무신왕은 을두지의 계책에 더 홍미를 가졌다.

 

을두지는 구체적인 계책으로서 지금 적들의 군사가 멀리 나와 싸우고 있으니 그들의 서술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 고구려군은 성문을 닫고 군사를 튼튼히 하면서 적들의 군사가 피로하여지기를 기다렸다가 칠 것을 제기하였다. 이것은 청야수성(淸野守城)* 전술로 적들의 예봉을 꺾어놓고 그들이 피로하고 지치기를 기다려 반격하자는 책략이었다.

 

* 청야수성: 벌판의 곡식을 싹 비우고 성을 굳게 방비하는 방어책.

 

 

적들은 자기 본거지로부터 멀리 진출하여 싸움판을 벌여 놓았으므로 속승(速勝), 즉 속전속결을 하고자 할 것이었다. 때문에, 맹렬한 공격을 노릴 것이며 그 서슬 또한 간단치 않을 것이었다. 이러한 적과는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싸움을 오래 끌어 적을 지치게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병법에도 싸움을 오래 끌면 군대들이 피로하고 사기가 낮아지며 성을 공격하여 역량이 소모되고 대군이 오랫동안 외국에 있으면 국가재정의 부족을 초래한다고 되어있다.

 

을두지는 바로 이 원리를 창조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그는 후한나라 침략군이 신속히 기동하여 깊이 침입한 조건에선 후방 공급이 제대로 따라서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해당 지역에서의 약탈로 해결하려 할 것으로 예측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고구려사람들이 적들에게 먹을 것을 남기지 않는다면 적들은 굶주리게 될 것이며 완강한 수성전에 맞부딪혀 지치게 될 것이었다.

 

(사진: 고구려 국내성의 산성인 위나암성 성벽과 위성사진)

 

대무신왕은 결국 을두지의 계책을 받아들였다. 임금은 모든 관료와 수도 안의 백성들, 군사들을 거느리고 수도 방위성인 위나암성(尉那巖城)*에 들어갔다.

 

* 지금의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

 

적들은 기를 쓰고 성을 공격하였으나 수십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특히 높고 험한 산성에 의거하여 싸우는 고구려 군민(軍民)을 당해낼 수 없었다. 성은 유리한 자연 지형을 잘 이용하면서 방위력을 최대한으로 높일 수 있게 쌓아진 전형적인 고구려 산성인 고로봉식 산성*이었다. 성은 북쪽으로 가는 두 개의 옛길을 지켜선 관문과도 같은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이 성을 지켜내느냐 못 지키느냐 하는 것은 전쟁의 국면을 바꾸는 데서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 고로봉식 산성: 고구려에서 많이 축조된 산성의 형식으로 안에 골짜기와 평지를 가지면 주위의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연결하여 둘러막아 쌓은 산성.

 

하기에 적들은 큰 손실을 보고 고구려군 부대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식량 보급로가 차단되는 등 곤경을 겪으면서도 위나암성에 대한 포위를 풀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대무신왕을 비롯한 고구려군 상층부에서도 몹시 초조해졌다. 고구려군도 적들의 맹공격을 막아 싸우면서 어지간히 지쳤던 것이다.

 

적들이 곤경을 겪으면서도 한사코 포위를 풀지 않는 것은 고구려의 산성이 암석 지대에 자리 잡은 것으로 하여 물 원천(源泉)이 없을 것이며 설사 있다고 해도 한여름에는 물소비량이 더욱 많을 것이므로 이제는 다 말라버렸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위나암성 내부의 식수용 저수지들. 각각 양어지와 음마지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재능있는 고구려사람들은 산성을 쌓으면서 언제나 물 원천을 확보하는데 깊은 주의를 돌렸다. 그것을 증명해주듯 옛 성터에는 ‘음마지(飮馬池, 말이 물을 마시는 연못)’, ‘양어지(養魚池, 물고기를 기르는 연못)’라는 저수지 자리들도 남아있고 지금도 물이 솟아 나오는 샘이 두 곳에나 있다. 이 샘물들을 적당한 곳에 끌어가서 성안 사람들의 물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여러 개의 못을 만들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을두지는 적들의 꿍꿍이속을 포착하고 반대로 적들에게 심리적 타격을 가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대무신왕에게 연못 속에 있는 잉어를 좀 잡아서 물풀로 싸고 또한 맛 좋은 술을 약간 구하여 한나라 군사들을 먹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오판하고 있는 적들에게 성안에 물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걸고 있던 실낱같은 희망마저 허물어버리는 것은 일종의 심리적 공세라고 할 수 있었다.

 

 

물고기인 잉어를 성안에 있는 못에서 잡은 것임을 확인시켜 주려는 듯 물풀로 싸고 맛 좋은 술까지 보냈으니 행여나 해서 가까스로 포위를 유지하고 있던 적들이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보급로가 끊겨 식량난을 겪는 데다 한여름에는 전염병이 퍼질 수 있으므로 군사를 동원하지 않는다고 병법에도 쓰여있지만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킨 자기 장수들을 원망하며 땡볕 아래서 굶주리고 지쳐있던 적들인지라 이러한 심리적 공세의 효과는 더욱 컸다.

 

모든 것은 을두지가 예견한 대로 되어 갔다. 고구려조정은 다른 한편으로 우호적인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이것은 물러가고 싶으나 ‘100만 대병’을 끌고 왔다가 체면 때문에 망설이는 적들에게 퇴각의 구실을 만들어주려는 목적이었다. 병법에도 한쪽 길을 틔워주어 퇴각할 수 있게 해주어야 저항을 줄일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 계책은 도리에 맞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적장은 성안에 물이 있으니 졸연히(손쉽게) 함락시킬 수는 없다.” 말하며 고구려가 우호적인 태도로 나왔다는 것을 퇴각의 구실로 삼아 군사를 끌고 황급히 물러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28년에 고구려와 후한 침략자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고구려 인민들의 빛나는 승리로 끝났다.

 

침략군은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었으며 고구려가 되찾은 지역들에 대해서는 한나라의 군현이 더는 시비를 걸지 못하게 됐다. 여기에 위나암성 전투의 승리가 가지는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이 전쟁은 청야수성전술과 심리적 공세를 능숙하게 배합하여 승리한 전쟁이다. 특히 전쟁에서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전법은 심리적 공세이다. 아마도 잉어라는 물고기 몇 마리로 적들의 심리에 결정적 타격을 주어 물러가게 한 이러한 전쟁은 역사에 그 유례가 많지 않을 것이다.

 

심리적 공세로 대적(大敵)을 물리친 고구려-후한 전쟁은 고구려 인민들의 뛰어난 용맹과 지략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전쟁의 하나이다.

 

원본: 한효성・림호성, 󰡔력사로 본 전장󰡕, 금성청년출판사, 2015

참고영상: 신통방통 우리역사 – 연못 속의 잉어와 을두지의 심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