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포에서 만난 최무선과 백제 문화
6월의 햇볕을 따라 길을 걷고 싶어질 때 주변 사람에게 추천하는 곳이 웅포다. 금강이라는 물길을 따라 짙은 노을이 내려앉는 낙조가 아름다운 곳, 백제 고분이 있는 입점리 고분군, 고려 시대 왜구 침략에 맞서 화포 전투를 했던 진포대첩, 천년고찰 숭림사 등 걷다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웅포라는 지명은 “옛날 금강의 빼어난 경치에 반한 큰 곰 한 마리가 이곳에 살면서 맑게 흐르는 강물을 보면 하늘에 있는 해가 금강 위에도 또 하나가 생기는 것을 보고 무척 신기해하며 이를 갖고 싶어 궁리 끝에 물을 다 마시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머리를 내밀고 강물을 마셨는데, 전혀 줄지 않고 그대로 있어서 곰이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고 해서 ‘곰(熊) 개(浦) 나루’라고 부른 데서 연유했다. 순수한 우리말인 ‘곰개’를 한자화 하면서 웅포가 됐다.
[웅포의 덕성창과 진포대첩]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에는 고창리가 있다. ‘옛 창고’라는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창리는 옛날 조운창이 있던 곳이다. 조운창에는 각 지역에서 받은 쌀이 항상 쌓여 있었다.
고려 시대에는 조운창의 쌀을 강과 바다를 통하여 도읍인 개성으로, 조선 시대에는 한양으로 운반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덕성창에는 쌀을 운반하는 조운선이 63척이나 있었다. 하지만 덕성창의 중요도와는 달리 겨우 병사 몇 사람이 덕성창을 지키고 있었고, 수호부대 또한 따로 없었다. 이런 이유로 웅포의 덕성창은 늘 왜구의 표적이 되었다.
1350년부터 1399년까지 우리나라 해안에 왜구가 출몰하며 노략질을 한 것은 그 횟수가 369회이며 606개 지역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1380년 8월 추수철에 500여 척의 대선단을 이루어 진포로 쳐들어온 것은 거의 전란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이들 왜구는 진포에 닻을 내려 배가 흩어지지 않게 밧줄로 결박하여 놓고 상륙하여 노략질을 시작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나세를 상원수로 최무선, 심덕부를 부원수로 임명하여 80여 척의 병선에 최무선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화약 병기인 화통, 화포를 갖추고 출전시켰다.
나세 장군이 두 명의 부원수와 함께 진포에 이르러 왜적의 선단에 근접하여 일시에 화포를 쏘아대자 적선은 서로 엮어져 있어 일시에 불타 가라앉고 연기는 하늘을 덮었으며 왜구들은 대부분이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고 <고려사>의 기록은 전한다. 이를 역사에서는 ‘진포대첩’이라 부르고 있다.
[ 입점리 고부군 ]
1986년 전라북도 익산시 입점리의 한 주민이 칡을 캐다가 우연히 금동제 모자를 발견해 알려지게 된 입점리 고분은 해발 240m의 함라산에서 금강변을 따라 뻗어 내린 산 능선에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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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점리 고분군의 유형은 수혈식 석곽묘(구덩식돌관무덤) 11기, 횡구식석곽묘(앞트기식 돌곽무덤) 2기, 횡혈실석실분(굴식돌방무덤) 7기, 옹관묘(독무덤) 1기로 여러 가지 유형의 고분이 뒤섞여 나타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곳에서는 금동제, 장신구류, 금동제 신발, 말 재갈, 철제 발걸이, 토기, 청자 항아리 등의 유물들이 출토됐다.
이중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은 일본의 후나야마 고분에서 비슷한 유물이 출토되어 일본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나야마 고분이 6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므로 입점리 고분이 후나야마 고분보다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제 청자는 5세기경 중국에서 작위를 수여할 때 함께 내리던 품목으로 백제의 대외교류뿐만 아니라 익산지역의 정치세력이 독자적으로 중국과 교류를 하였을 가능성도 높여주고 있다.
입점리 고분전시관 내부에는 구덩식 돌덧널무덤 모형, 굴식돌방무덤들의 모형과 함께 출토된 유물들을 1층과 2층으로 나눠 전시해 백제 사비와 웅진 시대 고분 양식을 익히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또한, 전시관 뒷산에 있는 고분군들을 돌아볼 수 있다.
[ 숭림사 ]
대한불교조계종 금산사의 말사이다. 1345년(충목왕 1)에 창건하였는데, 창건주는 미상이다. 중국의 달마대사가 숭산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좌선을 기리는 뜻에서 절 이름을 숭림사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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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임진왜란 때 보광전만을 남긴 채 불타버렸고, 10년 뒤에 우화루만을 중건한 채 뚜렷한 사적 없이 내려오다가, 1923년에 보광전을 중수하고, 나한전과 영원전 등을 새로 지었다. 면모를 일신하였다.
보물 제825호인 보광전을 비롯하여 우화루·정혜원·영원전·나한전·요사채 등이 있다. 유물로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된 청동은입인동문향로와 비로자나삼존불, 목사자 2점, 법고 등이 있다. 보광전 안에 있는 비로자나삼존불은 1613년(광해군 5)에 조성한 것으로 절의 보물로 삼고 있으며, 절 입구에는 부도군이 있다.
나가며.
길을 걷다 보면 사진으로도 남길 수 없는 풍경이 있다. 사람의 눈은 참으로 오묘하고 깊다. 곰개나루터에서 본 풍경은 사람의 눈으로만 느낄 수 있는 풍경이다. 곰개나루터에서 700년 전에 벌어졌던 진포대첩을 생각하면 무수한 상상을 할 수 있다.
왜구의 함선과 고려군의 함선은 차이는 있겠지만, 단순 숫자로는 이 진포대첩 당시 양쪽의 전력은 1 대 5의 수준이었고, 그렇다고 이전 몇십 년의 전투에서 고려 수군이 왜구를 족족 격파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작도 전투 등에서 왜구에게 수전에 밀려 당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사상 최대의 위기에서, 꾸준히 화약 제조에 관심을 보이고 화포를 만든 최무선에 의하여 화포가 처음으로 고려 수군의 함선에 장착되었고, 신병기 화포의 힘을 빌려 500척의 왜구 함선을 거의 괴멸시키는 일대 반격을 가한 것이다.
웅포의 저녁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에는 농민들의 수탈했던 쌀을 보관했던 덕성창, 최무선의 당당함, 그리고 백제의 문화가 있던 고분군 함께 있다. 아름다움만 취할 게 아니라 역사도 함께 취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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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의 일대기를 보면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화포를 왕권의 위협으로 판단하고 경비 절감이라는 핑계로 화통도감을 폐지하고 군기감에 병합시키고, 기술개발도 중단시켰다. 참 비통을 넘어서 울분이 쏟아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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