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의병 투쟁의 최초의 승리 운암 전투, 운암 3대 운동 기념비

 

 

전주를 벗어나 30분 정도 달리다 보면 아름다운 운암면 옥정호가 보인다. 현재의 옥정호는 시끄럽다. 정읍 시민들의 식수원이자, 농업용수로 기능을 하는, 옥정호를 임실군에서 관광 활성화라는 핑계로 개발이 진행하면서 정읍과 임실이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오늘 돌아 볼 곳은 정읍과 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툼이 소재가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벌어졌던 운암 전투와 관련되어 역사 기행을 하고자 한다. (사진 – 군청 자료)

 

 

임진왜란의 조선육군은 의병이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조선육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하였다. 조선 해군은 당항포 해전, 율포 해전에서도 연이어 승리를 거두나, 선조는 전쟁을 책임지고 수행하기보다 피난길에 나서면서 평양까지 함락되었다. 호남지방에서는 전라도 순찰사인 이광에 의해서 근왕병을 모집하였고 2번의 북상을 진행하였으나 용인 전투에서 무모한 작전으로 왜군에게 무참한 패배를 당하고 무너졌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의병들이 조정의 명령을 받고 일어난 것 같이 말하고 있으나 관군조차 도망가는 상황에서 선조의 명령이 아닌 조선 민중들의 자발적인 항쟁이었다. 우리 의병들은 관권에 의한 강제징집으로 무능한 장군의 지휘를 받아 전국의 전선을 전전하며 싸우기보다, 평소 잘 알고 신뢰할 수 있는 의병장과 자기 지역을 방어하고 왜적을 통로를 끓어내는 싸움을 하면서 맞서왔다.

 

호남 최초의 의병 승리 – 운암 전투

1592년 6월 11일 담양에서 출전한 고경명이 이끄는 담양 회맹군이 태인, 금구를 거쳐 6월 14일에 전주에 이르렀을 때, 임진강을 지키고 있던 군사가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우부장 양대박은 추가 의병 모집을 제의한다. 6천 명의 군사로 수만 명의 왜적을 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의병을 더 모아 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전주의 본진으로부터 남원에 돌아온 직후 남원, 순창, 임실 등 인근 지역을 돌며 열흘 만에 약 1천 명의 의병을 모았다. 6월 24일 1천 명의 양대박 군대는 임실 관내 갈담역에 도착하였다. 다음 날인 6월 25일 새벽에 율치를 넘어 전주로 향할 채비를 하였다. 그런데 앞서가던 척후병들이 돌아와 운암에 적의 대군이 나타났다는 급보를 전하였다. 왜적은 운암천의 장곡, 용산 일대에 벌 떼처럼 엉켜 무질서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은 무주, 진안 방면에서 전부로 향하던 고바야카와의 왜군이었다.

급보를 받은 양대박은 군사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양대박 자신이 인솔하여 정면에서 적을 공격하고 나머지 한 부대는 차남 형우가 지휘하여 산중에 잠복하여 있다가 적진의 측방을 급습 협공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양대박의 지시에 따라 둘째 아들 형우가 이끄는 부대는 율치의 산허리 서쪽을 따라 내려와 백운암 동편 골짜기에 잠복하여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대박 자신은 아침에 운암 천변에서 왜적에게 기습공격을 하였다. 양대박 부대가 왜적과 싸우는 가운데 다시 양형우 부대가 급습하여 왜적의 허리 부분을 끊음으로써 일시에 양면에서 적을 협공하였다. 마침내 급습을 당한 왜적은 궤멸 상태에 빠졌다.

그 전과 기록을 보면 일본군 1,207인, 일본군의 철의 43부, 대환도 31구, 소환도 86구, 대소총 79병, 단창 230개, 장창 112개, 전마 95필을 획득하고, 포로 김수현, 박재현 등 214명을 구해내었는데, 아군의 피해는 의병 40명이 전사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양대박은 부근 작은 고개의 큰 나무를 베어 깎아 “만력 임진 6월 25일 의병장 양모가 이곳에서 왜적을 무찔렀다.”라고 전공을 새겼는데, 후일 사람들이 이 마을을 벌 정(伐亭)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참조 – 임실군 군지)

운암전투 승전비는 운암면 벌정 마을에 세워졌으나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고 벌정마을은 물속에 잠겼다. 지금의 운암면 입석리 미암 마을에 있는 승전비는 2006년 임실군민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운암 3대 운동 기념비

운암초등학교 앞에는 세 개의 기념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갑오동학혁명 기념비, 기미삼일운동 기념비, 무인멸왜운동 기념비가 그것이다. 이 기념비들은 임실지역 주민들이 1983년 함께 세운 것이다. 이처럼 성격이 서로 다른 기념비가 함께 세워져 있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갑오농민전쟁 당시 최봉성, 최승우, 김영원, 한영태 등 동학 지도자들은 갑오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임실에서 봉기하여 남원으로 나가 줄곧 활동하였다. 그러나 11월 말 남원성 전투 패전 뒤, 임실로 돌아온 농민군 지도자들은 순창의 회문산으로 피신하여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6년 뒤 임실로 돌아오고 나서 동학 재건에 성공하여, 순창, 진안 등지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들과 그의 제자들은 재건한 세력을 기반으로 동학 교단(후의 천도교)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김영원의 제자인 박준승은 3.1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으로 참여하는 등 3.1운동과 1928년 멸왜운동을 어느 지역보다 활발히 펼쳤다. 3대 기념비는 이러한 일련의 운동과 그 운동의 지도자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나가며

 

옥정호는 아름답다. 옥정호는 전라북도 임실군과 정읍시에 걸쳐 있는 인공호수이다. 1918년에 시작해서 1926년에 완공했는데 이때는 운암호라 불렀다. 그러나 일제는 인공호수를 만들면서 벌정 마을에 있던 승전비를 파괴하고 정읍시 산내면과 임실군 운암면·강진면·신평면·신덕면 일대 2만여 세대를 쫓아내고 그 자리에 만들어진 것이 인공호수다.

먹고 살기 어려운 지역이다 보니 관광 활성화를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을 파헤치고, 사람들의 이기적인 자극을 중심으로 활성화 방향으로 컨테츠를 잡으면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독이 될 것이다. 당장의 눈앞의 이익보다, 자연을 아끼면서 운암호 주변의 역사와 사람들의 기억,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관광활성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운암전투는 임진왜란의 물줄기를 바꾸는 중요한 출발이고 호남의병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중요한 전투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머릿속에 운암전투는 사라지고 기역조차 없어지고 있다. 승전비는 단출하게 있다. 관심이 있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저 세월의 기록만으로 주변에 떠돌 뿐이다.  옥정호 주변에 운암 전투와 운암 3대 운동, 그리고 옥정호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사람들 머릿속에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