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왜군 14만 명에 맞선 1만 명의 항쟁과 죽음 – 남원성
인간은 역사 앞에 냉정하고 진실하여야 한다.
민족과 조국의 위기 앞에 놓여 있을 때, 도망을 치거나 회피하기 위해 핑계를 수없이 대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싸움에서 최후까지 항쟁하는 분들을 보면 어떠한 생각이 들까? 우리는 그들을 영웅이라 하고, 역사서는 고귀한 삶을 살았던 분들로 기록하고, 역사는 역사투쟁을 하신 분들로 남기어진다. 역사는 산 자와 죽은 자가 아니라 민족과 조국, 인간 앞에 고귀한 삶을 살았는가에 대한 끝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남원 읍성
남원시 자료에 따르면, 사적 제298호인 남원 읍성은 통일신라 시대 신문왕 11년(691년)에 처음 축조된 후, 1597년에는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성을 크게 다시 쌓고 수리하여 담을 높였다. 그해 8월 조·명 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왜군에게 크게 패했고, 이때 싸우다 죽은 군인과 주민들의 무덤이 만인의총이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많이 허물어져 약간의 성터 모습만 남아 있다.
북문지는 협축식(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을 쌓는 일)으로 조성돼있었고, 기단석(지대석)은 외벽과 개구부인 측벽 전체에서 확인됐으며, 내벽은 각각 동서로 3m 정도까지만 확인됐다. 특히 기단석 위로는 길이 1m 내외의 대형 석재를 사용, 면석을 쌓은 부분이 확인됐다. 현재는 1~2단 정도만 남아 있지만, 문지의 성벽 폭은 8.6m 내외이다. 조선 시대 읍성의 가장 전형적인 구조를 하고 있으며, 규모가 크고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네모반듯한 구성과 성내의 가로가 직선으로 구성된 점이 흥미롭다.
남원성 전투
(문화재청)
임진란에서 이순신과 의병들에게 혼이 난 일본군은 선조가 이순신을 쫓아내고, 원균의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섬멸당한 후, 일본은 호남을 점령하는 것이 전쟁을 일본군의 승리로 만드는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칠천량 해전에서 참전한 일본 수군은 사천에 상륙하였고, 지상군은 서생포에서 출발해 밀양, 합천을 거쳐 황석산성으로 진격하여 전주를 공략할 계획이었다. 1597년 병력 14만 명이 호남을 점령하기 위해 전주로 향하였다. 일본군이 호남을 공략하려면 남원을 통과해야 했다. 남원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남원이 함락되면 호남의 도성 전주 공략이 쉬워진다.
남원에는 읍성과 교룡 산성이 있었다. 당시 조선에는 평상시에는 읍성에서 정무를 보다가 외적이 침입하면 산성에서 피난과 전투를 벌였다, 1596년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였던 시기에 승병장 처영이 관의 협조를 얻어 남원 주민을 동원하여 교룡산성을 보수하고 양곡을 산성에 비축하고 주민들을 성안에 들어와 살게 했다. 교룡산에는 우물이 많이 있어 장기전이 가능하였다,
조선 장수들이 읍성을 버리고 교룡산성에서 방어할 것을 종용했으나, 명나라 장수 양원은 이를 거절하고 교룡산성 병력을 읍성으로 이동시키고 1597년 5월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남원성에 들어와 성벽에 성가퀴를 올리고 성 주위에 참호를 파는 등 방어 준비를 시작했다. 남원성 안에는 주민 7천 명과 명군 3천 명 그리고 남원 부사 임현, 예조참판 정기원 등 관리 12명이 있었다.
1597년 8월 7일 구례가 함락되었다. 현감 이원춘이 남원에 들어왔다. 양원은 일본 수군을 방어하기 위해서 순천에 있는 전라 병사 이복남에게 전 병력을 이끌고 남원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8월 9일 일본군은 둔산령을 넘어 남원읍 근처에 당도했다. 이복남은 천여 명의 병력과 함께 남원성으로 접근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나팔과 태평소를 물고 북을 치면서 행진하게 했다. 성을 호위하고 있는 일본군 사이를 그대로 통과했다. 일본군이 조선인 포로에게 “저 사람은 누구이기에 저렇게 당돌하냐?”고 물었다. 포로들은 “전라 병사 이 아무개이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이복남은 무사히 남원성 안으로 들어갔다.
– 죽음을 각오한 조선군의 남원진입 |
일본군은 8월13일부터 사대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5일 낮에 시작된 전투는 16일 새벽까지 진행되었다. 8월 16일 새벽 일본군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양원은 50명의 부하와 함께 남원성을 빠져나갔다. (예조참판 정기원은 양원을 따라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성안에 남은 전라 병마사 이복남은 병사와 주민을 독려하여 싸웠으나 중과 부적이었다. 이복남은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구례 현감 이원춘, 남원 부사 임현과 함께 화약창고를 불태워 자폭했다.
광한루를 비롯한 남원의 관아와 누정이 모두 불타고 성안에 즐비하던 민가가 17동만 남고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이렇게 수비군이 전멸하고 난 뒤 왜군은 남아 있는 백성들을 학살하고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코를 베어내기 시작했다. 이때 남원성에서 수집하여 일본으로 보내진 코는 총 3천726개였다.
왜군소속의 의승 케이넨(慶念)이 쓴 조선일 일기(朝鮮日日記)의 남원성 함락 당시의 기록이다. “성안 사람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죽여버려 살아있는 동물이란 하나도 없다. 비참할 뿐이다. 인간이란 모두 죽어 엎드려 있을 뿐이다.” 왜장 오코치 히데모토는 그의 ‘조선물어’에 기록하길, “오늘은 8월 15일, 피로 붉게 물든 손을 합장하여 멀리 일본을 향해 절을 하고, 조선인의 코를 잘라 갑옷 주머니에 넣었다. 판관이나 대장은 머리를 잘랐고 그 외에는 모두 코와 귀를 잘라냈다.”
남원 전투에서 참패하고 전주성까지 점령당하자 곡창 호남이 왜군에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임진년 이후 5년간 발을 들이지 못했던 호남을 철저히 짓밟았다. 그러나 왜적을 5일 이상 막아준 덕분에 이순신의 조선 수군 재건에 시간을 벌었고, 호남과 북상을 조선군이 방어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었다.
맺는말
역사기행을 다니면서 역사 앞에 서 있다 보면, 시대의 감정과 개인의 아픔이 하나 되는 시기가 참 많다는 것을 느낀다. 도망가는 위정자와 외세에 맞서 이 땅을 지키고자 했던 백성들, 백성 중 대부분은 자기 땅도 없는 소작농, 노예, 시골로 쫓겨나거나 몰락한 양반들이었다. 왜 이 땅을 지키고 자 했을까? 그들 마음속 저항과 항쟁을 선택한 본성은 어디서 나왔으며 무엇일까?
인간의 본성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일 것이다. 역사를 배우는 과정은 언제나 진실을 향한 치열함과 역사 앞에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1. 남원지역 정유재란 유적지는 왜군의 잔혹함과 치열했던 전투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안일하다. 관광지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후대에 다시는 잊지 않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추모 형태의 공간에서 항쟁의 의지를 보여주는 역사 공간 사적지로 전환해야 한다. |
2. 종군승 케이넨이 정유재란 당시 남긴 기록인 조선일일기 기록물 중
1598년 8월 4일 – 너나 할 것 없이 남에게 뒤질새라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고 서로 쟁탈하는 모습들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기분이다. 이것저것 죽은 자의 재물을 먼저 탈취하려고 벌떼처럼 몰려들어 떠들썩한 모습이여 8월 6일 – 들판도 산도 전부 불태웠으며 죄없는 사람을 마구 죽였다. 나는 부모를 찾는 아이들의 울부짖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그 비참함은 꼭 지옥의 거리와도 같았다 8월 8일 – 조선인 아이를 왜군이 잡아가자 놓아 달라고 애원하는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이니 다시는 서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살아남은 아이는 귀신이 덥쳐오는 것처럼 공포와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다 8월 16일– 성안의 사람은 남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버려 살아있는 동물이란 하나도 없다. 비참할 뿐이다. 인간이란 모두 죽어 엎드려 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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