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청동 가공 기술의 중요특징
박경순
우리 민족은 인류역사의 가장 이른 시기부터 이 땅에서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켜온 지혜롭고 슬기로우며 근면한 민족이다. 특히 우리나라 민족사상 첫 고대국가인 고조선이 성립되어 민족경제가 형성된 첫 시기부터 우리 선조들은 당당히 국가 시대의 역사를 개척해나가면서 자기의 슬기와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여 자연을 개조 변혁하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는 과정에 우수한 민족문화유산들을 수많이 창조하였다.

1.

고조선은 B.C. 30세기 초에 단군에 의하여 세워진 우리 민족의 첫 고대국가이다. 고조선 인민들은 건국 첫 시기부터 역사에 빛나는 청동기문화를 더욱 발전시켜 동방 문화를 꽃피웠다.

우리나라에서 청동기 생산은 국가성립 이전 시기인 B.C. 4000년기 후반기부터 시작되었으나 기술 수준도 낮았고 제품의 가지 수도 많지 못하였으며 생산량도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고조선 시기에 와서는 청동 가공 기술이 점차 높은 단계에 올라섰으며 청동 제품의 종류와 생산량이 급속히 늘어나고 주조기술이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최근년간 평양 일대에서 발굴된 대표적인 청동기들만 보아도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표대유적과 평안남도 덕천시 남양리유적의 집터에서 드러난 비파형 창끝과 청동단추, 황해북도 상원군 룡곡리의 4호, 5호 고인돌무덤들에서 발굴된 비파형 창끝과 청동단추, 상원군 장리1호고인돌 무덤에서 나온 청동 끌과 청동방울, 청동2인 교예장식품 등으로서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여기에 종래에 발굴된 초기 및 중기 비파형단검, 청동 도끼를 비롯한 유물들을 합치면 고조선 첫 시기에 생산된 청동제품의 가지수와 량은 대단히 많았다.[《조선단대사》(고조선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10년 123페지]

고조선 청동가공 기술의 중요특징은 무엇보다 먼저 청동 제품들의 실용성과 예술성을 잘 결합한 우리 식의 고유하고 독특한 기술이라는데 있다. 비파형단검과 비파형창, 버선코모양의 도끼, 수레부속, 치레거리 등 청동제품들은 고조선사람들의 실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남들이 좀처럼 모방할 수 없는 기발한 형식과 무늬장식을 갖춘 독특한 공예미술품이기도 하였다.

여러 청동 제품 가운데서도 비파형단검은 실용성과 예술성이 결합된 우수한 청동유물이다. 칼날의 윤곽이 옛날 악기의 일종인 비파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 이름을 따서 붙인 비파형단검은 그 생김새가 독특하고 조형적이다.

비파형단검의 형태상 특징을 보면 첫째로, 조립식으로 되어있다. 단검은 검몸, 손잡이, 검자루맞추개 돌 등으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데, 그것들은 하나로 결합할 수 있게 되어있다. 그 형태상 특징은 둘째로, 양날로 된 검몸 가운데 부분에 도드라진 부분이 있고 그 아랫부분은 둥글게 처리되었다. 그 형태상 특징은 셋째로, 검몸의 세로 중심선에 뿌리로부터 검끝까지 등대가 있고 도드라진 부분 아랫부분에는 흔히 등 날이 서 있다. 그 형태상 특징은 넷째로, 단검의 길이가 30~40㎝정도이며 40㎝넘는 것이 거의 없다.

이러한 형태상 특징으로부터 비파형단검은 전반적으로 세련되고 균형이 잡혀있으며 날이 예리하면서도 그것이 조화로운 곡선미로 처리되너 부드러운 감을 붐다. 이것은 당시 고조선사람들의 진취적인 기상과 은근한 성격상 특성을 그대로 조형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파형단검은 조선반도를 비롯한 넓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쓰이는 과정에 그 실용적인 효과, 고대 조선사람들의 미적감정에 맞게 변화 발전하였다. 즉 후세로 내려오면서 검날의 굴곡이 완만해지고 도드라진 부분가 미미해졌으며 도드라진 부분 아래 둥근 동체가 훨씬 작아짐으로써 보다 더 실용성을 띠게 되었다. 검자루도 나무로 만들던 것을 청동으로 만들게 되었는데 그 생김새는 《ㅗ》형이고 그 전면에 정교로운 기하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처럼 후기의 비파형단검은 찌르기에 알맞는 날씬한 검몸, 쥐기에 편리한 청동검 자루 등 어느모로 보아도 초기의 비파형단검보다 더 세련된 것이다.

이것은 고조선에서 끊임없는 반침략 투쟁이 벌어졌던 사회적환경이 그대로 반영되어 형성된 검 형식으로서 실용성과 예술성이 더 높은 수준에서 결합되었다는 사실을 말하여준다.

비파형단검은 조선반도에 널리 분포되어있을 뿐아니라 송화강 이북 및 목단강 이북을 제외한 중국 동북지방의 거의 모든 지역에 분포되어있다. 이 단검의 발원지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유역 일대였으나 점차 료동, 료서, 길림, 장춘지방 및 남부조선 일대로 보급되었다.

보는 바와 같이 비파형단검은 고조선사람들이 창조한 고유한 무기이다. 그러한 생김새의 단검은 고대의 어느 나라 청동 무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당시 내몽골 장성 지대에서 보급된 《따가르식단검》은 검날과 손잡이가 동시에 주조된 것이며 중국 관내에서 나타나는 고대 단검은 날부분이 청동이고 자루는 나무로 이루어진 것이다. 또 그것들은 형태에서도 비파형단검처럼 조형적으로 매력있게 생기지 않았다. 이것은 비파형단검이 고조선의 고유하고 독특한 단검이라는 것을 말하여준다.

비파형 단검 외에도 고조선 첫시기부터 청동으로 만든 창, 방패, 투구, 방울, 단추, 거울, 대롱구슬과 방울달린 수레굴대끝마구리, 구리실 등 다양한 청동 제품이 제작되었다. 이것들은 제작 수법이 비교적 정교하고 일정한 무늬장식을 가하여 예술성을 표현한 공예품이기도 하였다.

특히 모양이 첫시기의 비파형단검과 기본적으로 같은 비파형 놋창은 아래 부분이 뿌리로 되어있지 않고 창대를 끼울 수 있게 주머니로 만든 것인데 그것은 고조선 첫 시기의 중요한 무기이면서 형태 및 균형이 잘 잡히고 굴곡이 맵씨있게 처리된 일종의 조형품이다. 이렇게 놓고보면 확실히 고조선사람들은 실용적인 무기를 만드는 경우에도 반드시 거기에 자기들의 정서, 진취적 성격을 반영하면서도 조형 예술성이 충분히 보장되도록 하는 데 커다란 주목을 돌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강상무덤에서 나온 직경이 약 0.25㎜의 가는 구리실로 배게 짠 그물이라든가 오금당무덤에서 나온 방울달린 수레굴대끝마구리 같은 것은 고조선 인민들의 우수한 예술적 재능과 당시 청동가공기술의 독특한 발전 모습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여러가지 청동제품의 무늬 장식 역시 고유하고 창발적인 것이 주목된다.

고조선 첫시기의 청동제품들의 공통적인 무늬는 길고 짧고 굵고 가는 각종 줄로 이루어진 섬세한 기하무늬이다. 비파형단검자루에 보이는 정밀한 번개무늬, 연속삼각무늬, 치레거리로 쓰인 패쪽에 보이는 삼각, 사각무늬들, 수레굴대끝마구리에 보이는 삼각형, 긴사각형무늬들은 모두 이웃나라의 무늬들과는 다른 고조선의 특유한 장식무늬들이다.[《조선공예사》(원시ㅡ중세편) 사회과학출판사 2012년 27~30페지]이처럼 고조선의 청동가공기술은 실용성과 예술성, 우리 민족 고유의 독특한 성격으로 발전하였다.

2.

고조선청동가공기술의 중요특징은 다음으로 높은 섬세성과 정교성을 이룬 기술이라는데 있다.

청동기시대를 개척한 우리 선조들은 일찍부터 청동가공에서 동, 석, 연, 아연 등 금속재의 합리적인 비율로 청동합금술과 곱돌, 모래거푸집, 밀랍형주물법과 같은 높은 주조기술, 아말감 합금에 의한 수은도금법, 판금술, 뚫음무늬수법, 금실박이 기술 등 우수한 기술들을 발휘하여 청동제품들을 섬세하면서도 정교하게 가공하였다.

B.C. 3000년기 전반기의 유적인 황해북도 상원군 장리1호고인돌무덤에서 나온 청동2인교예장식품은 높이 4.8㎝, 너비 5.1㎝의 크기를 가진 작은 청동주조품이지만 두 사람의 교예사가 어깨를 겯고 양쪽 손에 둥근 환을 쥐고 환우에 올라서서 재주를 부리는 장면을 생동하게 형상하고 있다. 또 이 무덤에서 나온 청동방울 역시 높이 3.6㎝, 아구리직경 1.7㎝, 추(혀)의 길이가 2㎝밖에 안되는 원추형의 종처럼 생긴 작은 제품이지만 울림통과 고리, 추 등이 정확히 주조되어있고 울림통을 세로 크게 네 등분하여 구멍을 길게 낸 솜씨 역시 상당히 세련돼 있는 우수한 공예품으로서 청동주조기술의 높은 발전수준을 보여주고있다.

또한 당시 청동기를 주조하는 데 쓰인 거푸집도 청동주조기술의 발전 모습을 보여준다.

평안남도 덕천시 남양리유적 22호 집자리에서는 돌을 가지고 만든 성냥갑만한 모양의 청동방울거푸집이 발굴되였는데 중심에 방울 생김새의 우묵한 홈과 한쪽 면에 녹인 청동을 부어넣을 수 있게 홈을 내었다. 우묵하게 패인 방울 주형부분은 길이 5.4㎝, 너비 3.5㎝이고 깊이가 1.8㎝였다. 이와 같은 청동방울거푸집은 함경남도 금야군 읍유적에서도 발견되였다.[《조선단대사》(고조선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10년 124~125페지]

특히 고조선청동가공기술의 섬세성과 정교성은 고조선의 가장 특색있는 공예품인 잔줄무늬거울을 통하여 찾아볼수 있다.

잔줄무늬거울은 뒤면에 원과 여러가지 삼각형을 배치하고 그가운데에 수많은 잔줄을 채워놓은 거울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잔줄무늬거울에는 줄과 평행선들이 굵직굵직하게 표현된 것과 잔줄이 원과 부정형의 삼각형, 사각형 속에서 정밀하게 표현된 것이 있다. 그러나 어느 거울이나 몇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평면이 원형이며 둘째로, 반사되는 거울면이 오무라든 오목거울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셋째로, 재료가 대부분 백동이지만 일부 청동이 있으며 넷째로, 변두리의 가로자름면이 반원형이며 더러는 삼각형에 가까운 것도 있으며 다섯째로, 거울을 달아매기 위한 고리가 원의 중심에서 좀 벗어난 곳에 2~3개, 드물게는 4개가 붙어있으며 여섯째로, 무늬구성에서 삼각형과 사각형이 원형 속에서 잔줄의 평행선으로 새겨져있는 것이다. 이러한 거울은 오직 고조선과 그 인접지역에서만 찾아볼수 있다.

잔줄무늬거울의 비단무늬같은 아름다움, 삿자리 무늬같은 입체감, 한점에서 사방으로 빛을 뿌리는 듯 한 방사선무늬 등은 모두 환하고 맑게 비치는 거울 그 자체의 기능에 완전히 맞는 장식구상이다. 결국 잔줄무늬거울의 잔줄은 새김무늬 그릇의 새김무늬에서 기원하여 고조선 주민들의 미적감정과 융합되어 완성된 무늬로서 그들의 명랑하고 맑고 깨끗한 심리적 특성을 상징한 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때문에 거울에는 삼각과 잔줄이 수백 수천이나 되지만 복잡하고 번잡스러운 감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간소하고 소박한 맛으로 일관돼 있다. 여기에서 고조선사람들의 고유한 예술적 감정과 그들의 생활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난 독특한 조형미감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잔줄무늬 거울은 고조선의 고유한 거울이다. 거울 뒤면처리(일부 양각의 선으로 처리한것)에서 잔줄무늬 거울과 비슷한 것으로 중국 전국시대 거울인 《세지문경》을 들수 있는데 이 거울은 와문(渦紋)과 직선무늬로 된 것으로서 잔줄무늬와 다른 모습을 띠고있다. 또한 잔줄무늬거울은 중국 한나라시대의 괴물과 같은 신비스러운 회화적 무늬를 돋친 거울과는 전혀 다르다.

잔줄무늬의 정교로운 기하학적 무늬는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의 새김무늬 그릇을 쓰던 때부터 전승되여온 무늬이며 고조선 초기의 질그릇 뿐아니라 청동기 전반에서 볼 수 있는 고유한 무늬이다.[《조선공예사》(원시ㅡ중세편) 사회과학출판사 2012년 34~38페지]

이처럼 고조선 청동가공 기술은 우리 선조들의 창조적 재능과 근면한 노동에 의하여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선민족 고유의 특징을 가지고 발전되어 왔으며 청동가공 기술에 의하여 창조된 수많은 청동 제품들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대대손손 물려갈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으로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