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이란 말 그대로 쇠붙이와 돌에 새겨진 글을 말한다. 금석문은 넓은 의미에서 종이를 제외한 그 밖의 재료에 씌여진 것을 다 포괄한다. 금석문은 해당 시기 사람들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하여 당시의 역사와 문화를 정확히 이해하게 하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의 금석문은 수십 개인데 그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광개토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이다.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의 발전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계기를 열어놓은 광개토왕의 공적을 찬양하여 세운 기념비이다.
릉비는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의 동쪽언덕에 서있는데 414년에 세워진 것이다. 비석의 높이는 6.34m이며 총 글자수는 약 1 800자가량 된다. 거대한 4각추의 응회암통돌로 된 광개토왕릉비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비석들가운데서 그 규모가 제일 크고 웅장한 것으로 되고있다.
릉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부분에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이 나라를 세운 경위와 그후 역대 왕들의 계승관계, 광개토왕이 나라를 잘 다스린 공적에 대한 총평, 왕릉의 축조와 릉비 건립의 목적을 썼다. 둘째 부분에는 광개토왕이 나라의 령토를 크게 넓힌 공적, 외적격퇴의 사실 등이 년대별, 사건별로 구체적으로 기록되여있다. 셋째 부분에는 왕릉의 관리, 수호를 위한 수묘인 연호의 구성과 그것을 항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규정들을 밝혀놓았다.
광개토왕릉비문 내용에는 문헌 사료들에 없는 많은 사실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의 역사는 물론 당시 동아시아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체계화하는 데서 없어서는 안될 자료로 되고 있다. 뿐만아니라 릉비문의 서체가 매우 세련된 것으로 하여 당시 고구려의 높은 문화 수준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있다.
중원고구려비는 5세기말-6세기초에 세워진 고구려의 기념비이다.
중원고구려비는 충청북도 충주시(옛 중원군)에서 발견되였다. 비석은 높이 2.03m 되는 화강석을 4각기둥모양으로 다듬고 그 네면에 글을 새긴 비이다. 비록 비문은 오랜 세월이 흘러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가 많지만 그 내용을 통하여 5세기말 고구려, 백제, 신라 세나라의 상호관계와 고구려가 삼국통일위업을 본격적으로 추진시켜 강토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였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즉 고구려가 신라를 속국으로 취급하고 있었다는 것과 고구려의 영토가 당시 중원(충주시)일대까지 포괄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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