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백산은 땅을 지키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역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이 사회를 만들고 사람들의 변화가 시대를 만든다. 오늘 가보는 곳은 김제 백산면이다. 임진왜란 이순신 장군의 선봉장 안위 장군이 있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대군에 맞서 쌍령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한 백선남과 윤영임이 태어난 곳이다. 또한, 조선 말기 실학과 근대철학자인 석정 이정직과 현시대의 물질문명의 이기에 맞서 우리의 전통을 지켜오는 부거리 옹기 마을이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선봉장 안위 장군 묘

안위(1563년~1644년)는 조선 중기의 무관이다. 안위 장군은 이순신 장군이 가장 총애하고 신임했던 부장으로, 군함 12척으로 10배가 넘는 왜군 전함들을 상대로 승리를 이끈 주역이다.

명량해전 당시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선봉에서 왜선들을 맞아 싸우는 동안 다른 군선과 함께 뒤로 물러나 싸울 엄두로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위는 곧 정신을 가다듬고 이순신 장군이 영하기와 초요기를 세워 군선들을 부르자, 중군장 김응함과 함께 앞으로 나섰고 가장 먼저 대장선에 다가갔다. 이때 이순신이 “안위야, 네가 억지를 부리다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치면 어디로 가서 살 수 있을 것 같더냐?”라며 호통을 쳤고 안위는 전장의 한복판으로 돌진하였다.

안위의 군선이 앞장서서 싸우다 왜선 세 척에 포위되어 배 위에서 백병전이 벌어졌고, 통제사 이순신이 달려 들어가 그를 구원했다. 두 배가 함께 협공해 왜선을 모두 격침 시키는 사이 다른 전선들도 하나둘 전투에 합류하였다. 왜선은 31척의 배가 격침되고 울돌목의 물살마저 불리하게 돌아서자 결국 전의를 잃고 후퇴하였다. 그는 지척에서 충무공을 받들며 진격명령에 목숨 걸고 선두에 나가 공을 세웠고 이후 수군 재건의 근거지인 고하도와 고금도를 담당하는 전라 우수사로 보직됐다.

명량해전 이듬해 왜군과의 마지막 결전인 노량해전에 참전해 그는 또다시 전공을 세우게 된다. 노량해전에서 최후를 맞는 이순신 장군의 뒤를 이어 전후 생존자로서 60대에 이르기까지 전라 병마사, 경상 수군절도사, 전라 수군절도사 등 서남해안 일선에서 왜구의 침략을 막는 부대장으로 복무했다.

칸트와 베이컨의 서양 철학을 조선에 최초로 소개한 이정직 생가

19세기 중엽, 정세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인 면에서 볼 때 말할 수 없이 퇴폐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 침입한 외세는 침략의 야욕이 발동하고 있었다. 이에 외세의 봉쇄를 주장하는 쇄국주의(보수파)와 외세를 수용할 것을 주장하는 개화 주의(신진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호남지역에서는 김제에서 태어난 석정과 만경에서 태어난 해학 이기, 그리고 구례에서 태어난 매천 황현 등은 도학과 과학의 절충조화를 주장하면서 신진파의 문류를 형성하며 호남삼걸이라 불리었다. 그중에서도 이정직은 27세 되던 해 중국 연경에 가는 사신단에 동행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동서양의 많은 책을 접하면서 동서 사상을 아우르는 새로운 학문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정직의 학문적 탐구는 성리학뿐 아니라 서양 학문과 철학, 그리고 천문, 지리, 의학의 범위를 넘어 넓고 깊게 펼쳐졌다. 또한 칸트(Kant)와 베이컨(Bacon)의 서양 철학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한 근대 철학자이고, 1905년 ‘강씨(칸트)철학설대약’이라는 우리나라 첫 칸트 해설서를 펴냈고, 칸트 철학을 주자학과 비교 분석한 『칸트철학 연구평론』이라는 저작을 남겼다.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시문학은 시경주해, 시학증해, 소여록, 간오정선, 소시주선 등이며 성리학에서는 연석산방미정문고가 있고 이 밖에 어음학, 천력학, 술수학 등에 관한 책이 여러 권이 있다. 이 가운데 시문의 일부를 간추려 석정집 3권이 현재 전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부거리 옹기가마

부거리 옹기가마는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부거리 875번지에 있는 조선 시대의 옹기가마다. 이 옹기가마는 조선 시대에 천주교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이 살아남으려는 방편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조선 시대 옹기장이들은 철저하게 신분질서가 지켜지던 향촌 사회에서 천시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옹기장이들은 국가와 사회, 가문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신분을 숨기고 고향을 떠나온 천주교 신자들의 처지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을 거부하지 않고 옹기점에 머물게 해 주었다.

당시에는 6개의 옹기가마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는 오직 한 개의 옹기가마만 남아 있다. 200년 정도의 역사를 갖는 옹기가마는 철제 기둥으로 되어있는 지붕에 의해 덮여 있다.

이 지붕은 옹기가마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장작을 피워 사용하는 전통방식의 가마로, 구릉지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가마가 놓일 자리를 마련하고 전통적인 수제 흙벽돌을 쌓아 가마를 구축하였다. 측면 구멍을 통하여 불을 땔 수 있어 가마 전체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으며 긴 형태의 가마임에도 균일하게 굽기가 가능하다.

근대문화유산으로 가마의 형태, 옹기제작 방식, 작업 도구까지 100년 전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옹기가마의 바로 앞에는 오래된 토담집이 있다. 그곳에서 옹기장 안시성 선생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마치며….

백산면에 있는 문화재를 보면서 정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안위 장군의 무덤에는 안위 장군의 삶에 대한 기록과 임진왜란 당시의 선봉장으로 역할조차도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석정 이정직 선생의 생가는 사실상 행사를 위한 생가보존이지 그의 삶과 예술품, 학문적 탐구의 기록도 없다. 백산면 부거리 옹기가마는 들어오는 입구도 정비가 안 되어있고 보존에도 옹기장에게만 맡겨 놓은 것같이, 주변 정리가 부실하다.

백산 일대를 돌면서 역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말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고, 유적지가 ‘있다’가 아니라 그 시대 생활과 기록, 시대정신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지자체가 역사를 보존하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명량해전 : 명량해전은 순우리말로 알려진 울둘목인데 지명의 뜻을 옮겨 적은 것이다. 애초의 앞의 밝은 명이 아니라 울다 (鳴)자에 들보 (梁)자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