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과 역사가 만나는 정읍 무성리
– 상춘곡 둘레길에서 만나는 무성서원, 삼층석탑, 석불입상, 필양사, 송정,
여름의 더위가 사라지기 시작한 9월 역사유적지 탐방은 정읍 칠보면 무성리 일대를 돌아보기로 했다. 마을 속에 있는 역사는 그 지역의 삶을 이해할 수 열쇠이다. 전형적인 농촌 공간에서 만들어진 무성리 일대 문화재는 화려하지도 않고 소박함이 있다. 또한, 서원인 있는 마을 중 유독 무성서원은 서원을 알리는 홍살문이 주민들이 거주하는 길에 버티고 있고 마을 한가운데에 무성서원이 있다. 마을 자체가 무성서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이하다.
무성리 일대에는 무성서원과 삼층석탑, 석불입상, 필양사 (항일의병을 하다 체포되어 옥중단식 중 순국한 김영상 사당), 송정 (칠광십현 – 인목대비 유폐를 반대하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머물렀던 정자), 또 가사문화의 효시인 상춘곡(정극인-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사임)의 무대가 되었던 상춘곡 둘레길이 있다.
무성서원
서원은 조선 사회를 유지하는 유교 교육의 사립학교로 볼 수 있다. (서원 역사가 오래된처럼 느끼지만 1543년 중종 38년 때 백운동서원이 최초임) 무성서원은 통일신라 최초 유학자 고운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원래는 태산현 군수를 지내면서 많은 업적을 남긴 최치원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태산사(泰山祠)를 태산 서원이라고 불렀는데 숙종 22년(1696)에‘무성’(武城) 이라는 사액을 받아 무성서원이 되었다. 또한, 일본이 러일전쟁에 승리
하고 을사늑약을 맺어 외교권을 박탈하자.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하여 서원을 전진기지로 (서원을 전진기지로 삼은 것은 유일하다) 하여 호남 최초의 항일 의병운동을 일으켰다. (벽오창의 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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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대부분은 자연경관이 수려한 산이 어우러진 수변공간을 선택하여, 마을에서 떨어진 자연 속에 공부하는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무성서원은 마을 (원촌) 안에 만들어져 있다. 또한, 건물이 규모가 있거나 군집을 이루지 않고 건축물의 높이가 같으며 제향 공간과 강학 공간, 기숙 건물 하나만 있을 뿐이다. 일반적인 동재와 서재가 없으며 부속 건물도 없다. 가르치는 데도 특별한 사람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신분 차별 없이 수학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한다.
무성리 삼층석탑
무성리 삼층석탑은 전북유형문화재 제158호로 고려 후기에 세워진 석탑으로 무성리 석불입상과 함께 미륵사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칠보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였다. 층 탑 몸보다 2, 3층은 그 규모와 높이가 작다. 지붕돌(옥개석)은 완만하게 수평으로 처리되었으며, 그 폭이 두텁지 않아 경쾌한 모습을 보여준다.
탑의 꼭대기 장식 부분이 일부 남아있으나, 이는 훗날 보완한 것이다. 1층으로 줄어든 기단, 3단의 지붕돌 받침, 형식적인 기둥 조각 등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이 옛 백제지역이었던 만큼, 지붕돌의 곡선에서 백제 탑의 양식이 살짝 보여 지역적인 특성을 담고 있다
무성리 석불입상
작은 암자(슬레이트 집)의 어두컴컴한 방안 법당 안에 불상이 있다. 사람이 관심 있게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 불상은 무릎 아래는 땅에 묻혀 있으며 땅 위로 드러난 부분도 불단(佛壇)에 의해 상당 부분이 가려져 있다. 불상은 민머리이며 머리에 마치 두건을 쓴 것처럼 보이고, 얼굴은 긴 타원형이며 입은 불룩하게 튀어나오게 조각되었다.
귀는 길어 목 부분까지 이어지며, 목은 짧게 표현되어 있다. 목에 있어야 할 3줄의 삼도(三道)는 가슴 부분에 표현되어 있으며, 양어깨에 걸쳐진 옷자락은 U자형의 주름을 만든다. 왼손은 손등을 보이며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고, 오른손은 가슴 부분에 대고 있는데 손 모 양이 분명하지 않다. 불상의 드러난 높이는 2.4m이고 하복부의 폭은 1.15m이며, 고려 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나가며
정읍 무성리 일대를 돌면서 마을 속에 문화재가 남아있다는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마을 속에 살아있는 문화재는 사람들과 친숙하고 동네를 이루는데 출발점이다. 무성서원, 삼층석탑, 석불입상, 필양사, 송정, 상춘곡 둘레길을 하나의 거대한 마을이고 이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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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양사 |
송정 |
남천사 |
마을을 유지하는 것은 미래를 지키는 힘이다. 가을 하늘에 딱 맞는 마을이기에 여러분들에 한 번 들려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실망스러운 것은 보존하는 방식이 여전히 시멘트 방식으로 한다는 것이다. 자본이 들더라도 자연 친화적인 방식과 함께 전통방식으로 보전하는 방식으로 보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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