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혈 동맹으로 왜적을 몰아내겠다.

– 고창 흥덕 남당회맹단

3월부터 봄날은 사라지고 여름날이 되었다. 오늘 방문하는 곳은 임진왜란 시기 민병 활동지역으로 서해안 곰소만에 위치에 있는 고창 흥덕면 용반리 일대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흥덕면 일대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삽혈 동맹으로 의병소를 설치하고 활동을 시작한 남당회맹단과 훈련을 하였던 배풍산의 유적지가 있다. 오늘 글에는 없지만, 갑오 농민군, 항일운동과 독립투사의 의기를 보여주었던 반외세 깃발을 올렸던 지역으로 많은 기록과 유물이 남아있다.

남당회맹단

남당회맹단은 혈맹단이라고도 하며, 채홍국 등 고창 지역 300여 명의 지역민이 구국의 기치로 호남 의병을 창의하고자 삽혈 동맹을 하고 쌓은 맹단이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채홍국, 고덕붕 등이 격문을 돌려 창의하여 92명의 의사와 500여 명의 의병이 모여, 단을 쌓은 뒤 백마(白馬)의 피를 마시며 다섯 가지의 맹약을 내걸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혈맹하였다.

이들은 관군참여 없이 민병이었으며, 혈맹단 앞과 배풍산에서 훈련을 하였다. 남당회맹단은 29개 군사조직으로 구성되었고 체계적인 군사훈련도 진행하였다. 또한, 야수실기에 의하면 권율의 행주 진영과 곽재우에게 군량을 보내었고, 서해안으로 출병하여 사수하고, 1593년에는 전남 순천을 지나 석보창(여수)까지 적을 추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 모충사  ]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유 재침을 일으키며“전라도는 빠짐없이 공격하고 충청경비는 가급적 공략하라”라는 명령을 하달하며 전라지역 초토화 작전에 돌입하였다. 바다와 산맥으로 좌우가 차단된 전라도의 특성으로 고창·부안은 전주·정읍과 남도를 연결하는 길목으로 왜병들은 해로를 이용해 줄포에 상륙하여 부안으로 진격했다.

그러자 채홍국이 다시 뜻있는 의사 33명을 추가하여 모두 126명의 의병이 배풍령, 장등원을 거쳐 부안 호벌치에서 23일간 왜병을 맞아 싸웠으나, 수적인 열세에 밀려 많은 의병이 전사했다. 특히, 4월 중순 이후 약 1주간에 걸쳐 계속된 호벌치 전투에서는 의병장 채홍국 삼부자, 김영년 부자는 물론, 의병 대부분이 전사하는 일대 혈전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부안·흥덕 일대는 결국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의병이 적을 격퇴하지는 못했으나 무명의 향촌 선비들과 농민·천민·승려계층이 하나로 결합, 최후까지 침략군에 대항하여 싸운 의병항쟁이었다. (호벌치 – 우리 역사 2022년 11월 통권 25호)

배풍산 유적지

배풍산은 산의 형상이 배가 뒤집힌 형태라 하여 배풍산이라 부르고 있다. 배풍산 주변은 무거운 짐을 싣게 되면 위험하다 하여, 신분과 관계없이 지붕에 기와를 얹지 않고 초가지붕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배풍산은 마을 행정단위에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더 동헌이 있던 곳으로 높이는 110m 정도뿐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낮은 산으로 주변 마을 분들이 저녁에 마실을 가는 산이다. 산을 걷다 보면 바람개비가 유독 눈에 들어오는 산자락이 보인다. 바람과 함께 돌고 있는 풍경이 제법 운치가 있다. 삽혈 동맹으로 뭉친 의병들이 의병소를 설치한 유적지이고 1597년 배풍산까지 쳐들어온 왜군을 맞아 줄포의 장등까지 적을 몰아낸 출발지이다. 낮은 산자락 작은 유적지는 92명의 의사의 이름 한분 한분을 적혀 있다. 또한, 그 앞에는 바람개비를 설치하여 임진란 의병들의 소리를 전달할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 흥덕향교 ]

[ 당간지주 ]

흥덕면 문화재

배풍산에서 동헌길을 지나 걷다 보면 임진왜란 때 불탄 흥덕향교가 나온다, 1406년(태종 6)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 흥덕현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1621년(광해군 13)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또한, 흥덕향교 100M 앞에는 당간지주가 있다. 당간지주는 속해있던 사찰이‘갈공사’라는 것만 전할 뿐 구체적인 내용은 남아 있지 않다. 당간지주의 형태는 기단부(基壇部)와 당간 받침이 모두 사라진 채 모서리 끝을 둥글게 처리한 네모진 좌 ·우 두 기둥만 남아있다. 기둥 안쪽 맨 위에는 당간을 고정하기 위한 구멍을 두었고, 바깥쪽에는 한 면에 3구씩 연꽃무늬를 새기었다. 특히 이 연꽃무늬는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희귀한 것이다.

나가며

남당의병은 관군참여가 없는 민병이었으며, 조선 시대 지배계급이 아닌 양반과 평민, 노비 등으로 구성되었고 주도계층인 양반 역시 당시 조선사회의 주류와는 거리가 먼 향리의 소외된 양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 등 관변기록에서는 누락 되었다. 200년이 흐른 정조시기에 편찬된 호남절의록에 남당의병이 기록되었다.

남당회맹단은 민족이 외세에 침략을 받고 절체절명에 빠졌을 때 민중들은 어떠한 마음으로 역사를 대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위정자들을 보면서 분노가 치민다. 관변기록에서 누적된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도 한반도 남쪽에서는 일제 식민지 시기 항일운동 중 사회주의 무장투쟁을 기록하지 않는 이유와 같을까? 이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 정려 – 남도회맹단 옆 ]

[모충사 내부 ]

[ 흥성 동헌 (홍덕의 예 지명) ]

[ 배풍산 풍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