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역사를 가진 야금기술
박경순
《조선민족은 예로부터 한 강토에서 하나의 피줄을 이어받으며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 유구한 력사와 문화를 창조하며 화목하게 살아온 지혜롭고 애국심이 높은 민족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우수한 과학기술 유산들 가운데는 오랜 발전역사를 자랑하는 야금기술도 있다.
슬기롭고 근면한 우리 선조들은 국가성립이전시기인 B.C. 4000년기 후반기에 벌써 청동야금기술을 상당한 수준에서 활용하였다. 당시 청동제품들로서는 도끼, 단검, 활촉, 끌 등의 무기류, 노동도구들은 물론 가락지와 방울, 팔찌, 귀걸이, 단추 등 치레거리에 이르기까지 그 가짓수와 형태가 다종다양하였다.
고조선의 건국이후 청동야금기술은 더욱 발전하였는데 이 시기 우리 선조들은 그 이전의 3원소합금(동, 석, 연)기술을 계승하면서도 제품의 용도에 따라 보다 세밀하게 합금비율을 조절하는 법을 터득하여 활용하였다.
B.C. 2000년기 말엽부터 고조선에서는 철이 대량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지혜롭고 탐구심이 강한 우리 선조들은 제철제강 및 금속가공기술발전에 힘을 넣어 무기와 노동도구, 마구류 등 다양한 철제품들을 생산하였다. 황해북도 황주군 고연리유적 2호집자리에서 발굴된 쇠쪼각과 철광석슬라크, 함경북도 무산군 범의구석유적에서 나온 B.C. 1000년기 전반기의 선철로 만든 쇠도끼, 자강도 시중군 로남리유적에서 나온 B.C. 1000년기 후반기의 강철로 만든 쇠도끼 등은 그 대표적 유물들이다.
고대국가시기에 이어 삼국시기에 우리 선조들의 야금기술은 더욱 세련되었다. 그중에서도 고구려의 야금기술은 높은 수준에 있었는데 고구려에서는 건국초기부터 질좋은 강철제 및 주철제무기, 공구, 농기구들을 많이 만들었다. 그러한 유물들은 자강도 시중군 로남리유적을 비롯하여 많은 유적들에서 발굴되었다. 철제품들가운데는 가마, 화로, 널못 등 여러가지 일용생활도구들도 많았는데 평안북도 운산군 룡호리 1호무덤에서 나온 철제화로, 평양 부근에서 나온 쇠로 만든 자루달린 세발솥 등은 정교한 주물품으로 유명하다.
특히 압록강류역에서 발굴된 쇠로 만든 패쪽갑옷은 고구려의 높은 주강기술과 단조기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고구려 첫 시기의 한 유적에서 나온 철제품은 오늘날의 강철제품에 비해볼 때 그 조성과 단조기술에서 별로 큰 차이가 없었다.
고구려시기의 유적들에서 발굴된 철제유물들가운데서 주목을 끄는 것은 주조한 선철제품보다 단조한 강철제품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말에게까지 갑옷을 입힌 개마무사군단이 있었다.
– 개마무사 –
이것은 고구려의 철생산기술이 높은 수준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의 질좋은 철제품들은 이웃나라들에도 많이 수출되었다.
금, 은 및 동제련술도 매우 발전하였다. 한 역사기록에는 《하나의 은광에 수백가호가 달라붙어 은을 캐어 국용에 쓴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 고구려의 광업규모를 엿볼수 있게 한다. 고구려사람들은 광석을 제련하여 1차가공한 금과 은, 구리를 가지고 주조, 압연, 도금, 합금, 조금기술을 배합하여 훌륭한 금, 은, 동 세공품들을 만들었다.
발해는 고구려의 야금기술을 계승 발전시켰다. 발해의 유명한 특산물가운데는 위성의 철과 부주의 은도 있었는데 국내외시장들에서 그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특히 동은 주요 수출품중의 하나로서 그 수요가 대단하였다.
고려시기에 들어와 광물채취 및 야금기술은 더욱 발전하였다. 자료에 의하면 고려말기-조선봉건왕조초기에 전국각지에 철생산을 하는 고을이 67개나 있었는데 그중 20개 고을에서는 강가에 많은 사철로 철을 생산하였으며 나머지 고을들에서는 땅속에서 철광석을 캐어 철을 생산하였다. 이 시기 동제련기술도 급속히 발전하여 많은 동이 생산되었다. 959년에 이웃나라에 2차에 걸쳐 황동을 수출하였는데 그 량은 한번에 5만근이나 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왔던 이웃나라의 사신들은 고려에는 동으로 만든 그릇류가 많다고 부러워하면서 그것을 많이 구해가지고 돌아가곤 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 금속광물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탐사가 적극 추진되고 제철, 제강, 제련업이 더욱 활발해졌다. 1428년 충청도지역의 5개 철장들의 철생산량만 해도 10만여근에 달하였는데 이것은 이 지역의 인구비례로 놓고 볼 때 매우 높은 수준이였다. 은제련술에서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여 은생산량도 늘어났다. 종전의 방법은 실수률이 높지 못하였는데 첨가제를 넣는 새로운 방법으로 실수률을 3배로 높이였다는 자료도 있다.
19세기 말엽 우리 나라에 와서 금속생산 및 가공실태에 대한 조사를 한 러시아의 루벤쪼브라는 우리나라의 솥을 하나 구입하여 1 000여km거리를 5개월이나 여행하였는데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만일 유럽의 선철로 만든 솥이라면 아마 깨어져 나간지도 오래 됐을것이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우리 선조들의 야금기술은 나라의 국력을 높이고 인류과학기술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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