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술의원 가지 마오
안광획
(자료사진: 북의 고려의학. 『조선의 오늘』)
“죽음이 슬프기보다 재주가 애석하니 그대 좋은 명망 무덤에 남아 있으리”
– 옛 시 중에서-
고려 말엽 어느 한 고을에는 허씨 성을 가진 의원이 있었다. 사람들은 한뉘(한 평생)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느라 애쓰는 그에게 내로라하는 명의일지라도 얻기 힘든 ‘인술의원(仁術醫院)’이란 유별난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는 사람의 신체라든가 병을 다스리는 비방(방법)들을 논하는 데서는 그리 신통한 재주가 없는 보통 의원에 불과했지만, 의술이 뛰어난 명의들도 어쩌지 못하는 병자들도 맡아 가지고 친 혈육과도 같은 정을 베풀어 기어이 고쳐주니 그래서 인술의원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어 취중에서도 몇 가지 병쯤은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다고 으스대는 일부 명의들과 달리 인술의원은 늘 재주가 박하다고 자기를 탓하였다. 사실, 그는 사람들이 흔히 앓는 병에도 자신만이 백발백중 고칠 수 있는 특별한 비방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병자가 찾아오면 이 약을 써보고, 그 약이 듣지 않으면 또 다른 약을 쓰기를 병이 나을 때까지 지성스레 거듭했다. 그렇게 애쓴 끝에 병자가 병을 털고 나면 한숨을 지으며 ‘한 가지 병에 약은 천 가지란 말이 나 같이 무능한 의원을 두고 하는 소리로구나’ 하고 탄식할 뿐이었다.
정말 그는 병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주 힘들게, 그리고 많은 품을 들여 고치고는 하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인술의원이라 칭찬하니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송구스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허씨 의원이 다른 의원들과 달리 병자들에게 친 혈육의 정을 기울이는 데는 깊은 사연이 있었으니 그는 자나 깨나 그 사연을 잊지 않고 분발하는 것이었다.
젊었을 적에 농사꾼이었던 허씨는 배가 자꾸만 아픈 병에 걸려 일손을 놓게 되었다. 그래서 의술이 그중 낫다는 의원을 찾아갔더니 그는 병을 보고 나서 탄식하는 것이었다.
“아, 한창 나이에 팔방망이 신세가 되겠으니 참 애석한 일이구로구나.”
허씨가 글 한 자 쓸 줄 모르는 꼭자무식쟁이(일자무식)라고는 하지만 그쯤 한 말뜻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팔방망이라면 열여섯 사람이 메는 상여를 가리키는 말인데 팔방망이 신세가 되겠다고 했으니 이 병은 고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온 집안이 허씨한테 의지해 사는데 그가 쓰러지면 야단이었다. 허씨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물었다.
“제 병은 어떤 병이오이까?”
의원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임자의 병을 숨겨 무엇 하겠나? 임자는 위에 혹이 생기는 ‘적취(積聚)’*라는 병인데 엎친 데 덮친다고 간에도 혹이 있네. 이런 병은 내 재간으로는 어림도 없네.”
* 적취: 배나 옆구리에 덩어리가 생긴 질병을 한의학에서 이르는 말.
여느 사람 같으면 그 말에 맥을 놓고 주저앉았겠지만, 허씨는 이를 깊게 고민하여 질문하였다.
“의원님! 사람이 이런 병을 가려보는 이상 이 병을 고치는 의원도 있지 않겠소이까?”
허씨가 하도 간청하니 의원은 나라의 도읍에 가면 그 병을 다스릴 만한 명의가 있다면서 소개신(추천장)을 써 주었다. 고황에 들었다는 이 병을 명의에게 보이는 일은 한시가 바쁜 일이어서 허씨는 그 길로 개경(開京, 개성)으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아픈 배를 그리 않고 불원천리 개경 명의를 찾아갔더니, 그 사람은 돈이 없는 가난뱅이 허씨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제서야 허씨는 손맥이 탁 풀렸다. ‘이제는 죽는 길만 남았으니 집에 가서 죽자꾸나.’
개경 성을 나선 허씨는 날이 저물자 길가 마을의 어느 한 집에서 하룻밤 묵기를 청했다. 홀로 사는 노파는 배를 몹시 아파하는 허씨를 아랫목에 눕혀 놓고 끌끌 혀를 찼다.
“원 세상에, 이렇게 앓는 사람이 혼자 나다니다니…”
밤은 소리 없이 깊어가건만, 허씨는 너무도 배가 아파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가는 앓음 소리를 금할 수 없었다. 끙끙 신음소리를 내는 허씨를 측은한 눈길로 지켜보던 노파가 그의 배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런 몸으로 내일 꽤 떠날 수 있을까?”
허씨는 노파가 병든 자기를 꺼려 어서 떠나길 바라는 것으로 오해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인차(곧) 땅 속에 들어가야겠는데 남의 신세를 지겠소이까? 이제 날이 밝으면 떠나겠으니 염려 마소이다.”
했더니 노파는 성을 냈다.
“이 사람,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닐세! 더욱이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젊은이가 죽겠다니 그게 무슨 망발인가! 그런 나약한 마음을 가지면 죽지 않을 병에 걸렸어도 죽지 않을 수 없네!”
노파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에게도 끌날(금쪽)같은 외아들이 있었다네. 그런데 성 쌓는 부역장에 나갔다가 병에 걸려 돌아왔겠지. 이 어미가 그 애 병을 고쳐주려고 올려 뛰고 내리뛰며 약을 지어왔지만 이미 맥을 놓은 그 애한텐 백약이 무효였네. 자네도 내 아들처럼 되지 않으려거든 마음을 든든히 가져야 해. 의지가 강한 사람에게는 보잘 것 없는 약도 명약이 되는 법일세.”
허씨는 노파의 일깨움에 감동하여 눈물이 글썽해졌다. 그러는 허씨의 손을 잡은 노파는 나직하나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임자를 만난 것이 인연 같아. 외아들을 잃은 후로 어느 하루도 쓸쓸하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임자를 보니 내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만 같다니까. 내 의술은 없지만 아들의 병구완을 하느라 숱한 약을 지어보았으니 자네가 기어이 살아서 처자를 돌볼 마음만 가진다면 반드시 효험을 볼 걸세.”
코마루(콧등)이 찡해진 허씨는 노파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부르짖었다.
“어머님!!!”
이튿날부터 노파는 사방을 뛰어다니며 두릅나무 껍질이며 미나리 같은 약재들을 구해다 약을 지어주었다. 노파의 지성(至誠)을 생각해서라도 병과 싸워 이겨야겠다고 생각한 허씨는 달가운(고마운) 마음으로 그가 지어주는 약들을 받아먹었다. 낮이면 약재를 구해다 약을 지어주는 바쁜 속에서도 입에 맞는 반판을 만들어주고 밤에는 밤대로 병자의 머리맡을 지켜 잔시중도 들어주고 팔다리도 주물러주는 노파의 정성에 허씨는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
옛말에 저 하늘나라 북쪽의 태을성(太乙星)*에 사는 태을선녀(太乙仙女)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겨 극진히 돌봐주었다는데, 그 태을선녀라 해도 노파의 지성에는 비기지 못할 것이었다. 노파야말로 진정 친어머니의 모습이었다.
* 태을성: 동양 천문학에서 북쪽 하늘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별로 가장 존귀한 별로 여겼으며 이에 따라 ‘천제(天帝, 옥황상제, 하느님)’ 별이라고도 했다. 원래는 북극성(北極星, Polaris)을 태을성과 동일한 것으로 보았으나 지구의 세차운동을 통해 위치가 바뀌며 북극성과는 분리되었다.
노파의 지극한 정성이 불사약이 되어서인지, 마침내 허씨의 병세는 기세가 수그러들어 바깥출입을 할 수 있었다. 두 달 만에 원기를 되찾은 허씨가 그동안 자신이 먹은 약의 가짓수를 헤아려보니 무려 수십 가지나 되었다. 노파는 자신이 알고 있던 약방문 외에도 여러 의원들은 물론, 골병을 이겨낸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이 쓴 비방을 알아다가 약을 지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귀인을 만나 병을 고치고 집에 돌아온 허씨는 그 이듬해 노파를 찾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올 적에는 미처 생각지 못하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귀인을 어머니로 모셔다 그의 여생을 남부럽지 않게 돌봐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파의 집을 찾아가니 그는 이미 몇 달 잔에 급병을 만나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땅을 치며 통곡하던 허씨는 의술을 배워가지고 가난한 집의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도 노파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여 의술을 닦는 길에 나섰는데, 그 길을 간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제 이름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까막눈으로서 의원들을 찾아가 제자로 받아주기를 청하면 그들은 의술은 글눈이 밝은 인재들만이 배울 수 있다면서 거절하였다.
할 수 없이 항간에서 제 손으로 병을 고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비방을 배우고 부끄러워도 어린 아이들이 다니는 글방에 가서 글도 배웠다. 그렇게 제 나름대로 의술을 닦으면서 의원 노릇을 하려고 하니 사람들은 그를 비웃으며 병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어쩌다 찾아오는 병자가 있어 약을 지어주면 별로 효험이 없었다. 병이 낫지 않는 사람들을 대할 때면 너무도 창피하여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른 의원들은 같은 비방으로 척척 병을 고치는 것 같은데 나만은 왜 안 되는 것일까?’
허씨가 자기의 무능함을 한탄하던 어느 날 급한 병자를 업은 사람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다. 여러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병을 보였지만 그들마다 ‘이제는 너무 늦어 어쩔 수 없다’고 손을 터는 바람에 그냥 나앉을 수는 없고 마지막으로 허씨의원이나마 만나보자는 심산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맞아들인 허씨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별로 손을 쓰지 않아도 낫는 병마저 제대로 고치지 못하는 내 재산으로 한다하는 의원들이 내버린 환자를 어떻게 고칠 수 있단 말인가?’
송장치고 살인낸다는 그 속된 말처럼 섣불리 손을 댔다가 병자가 죽기라도 한다면 병자가 죽기라도 한다면 의술길에서 영영 쫓겨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생 성한 사람을 죽였다는 누명을 벗지 못할 것이었다. 이런 생각에 병자를 데려가라는 말을 입에 올리려던 허씨는 문득 자기를 살려준 노파가 생각났다.
‘귀인이 다 죽어가던 나를 어떻게 대해 주었던가? 그때 귀인이 의술은 없었지만 정으로 치료했었지. 내 지금 병자들을 제대로 고쳐주지 못한 것은 진정 그들을 친 혈육으로 여긴 마음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가슴을 치는 자책감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던 허씨는 입술을 깨물었다. 귀인이 그러했듯 온갖 정성을 기울이면 세상에 못 고칠 병자가 없을 것이다. 허씨는 그 즉시 병자를 고치는 일에 달라붙었다.
가지가지 약재를 구해다가 제 손으로 달여 먹이고 온 밤 그의 곁에서 떠나지 않고 보살폈다. 낮과 밤을 이어가며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그의 모습은 진정 친 혈육의 모습이었다. 그 정성이 있어 팔방망이 신세였던 병자는 마침내 살아났고 이에 신심을 얻은 허씨는 연이어 또 다른 병자를 맡아 그도 마음껏 대지를 활보할 수 있게 하여 주었다.
여러 의원들이 죽는 사람이라고 제쳐 놓았던 병자들을 살려내는 허씨 의원을 보고 사람들은 뛰어난 지성을 지닌 명의가 났다면서 ‘인술의원’이라고 불렀다. 인술의원의 명성에 반한 젊은이들이 의술을 배워달라고 찾아왔다. 허씨는 그들을 반겨 맞고 제 곁에서 병을 고치는 비결을 닦게 하였다.
그런데 섭섭한 일은 그 젊은이들이 한 달도 넘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만병을 척척 다스리는 신비한 묘방들을 배우러 온 그들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허씨가 쓰는 의술은 대개 의원들이 흔히 쓰는 범상한 비방이었고 그가 병자를 돌보는 일은 다른 의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이 아주 고되고 힘든 일이었다.
남모르는 비상한 의술을 배워가지고 손쉽게 병자를 고쳐 명의라는 좋은 이름도 날리고 돈을 더 많이 벌어 잘 살아보다는 것이 젊은이들의 뜻이고 보면 지성을 의술의 묘술로 여기는 인술의원의 지론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큰 욕망을 품고 왔다가 쓴 오이를 씹은 듯 얼굴을 찡그리고 돌아가는 젊은이들 앞에서 허씨는 허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어이하여 저 녀석들이 의술은 뚝 삐어진(대단한) 비방을 재주를 삼기보다 사람을 아끼는 인덕을 재보로 여겨야 한다는 나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을까?’
유감스럽게도 인술의원은 생전에 제 심정을 알아주는 젊은이를 만나지 못하였고 참된 제자를 둘 수 없었다. ‘오는 백발, 가는 인생’은 그 어떤 힘으로도 막지 못한다더니 늙은 허씨 의원은 어느 날 깊은 방에 급병을 만나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슬픈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밀려와 그의 장례를 치렀다. 허씨를 땅에 묻을 때 사람들은 그의 죽음이 너무도 안타까워 “인술의원 가지 마오!” 라고 소리치며 목 놓아 울었다.
허씨가 죽은 후 골병에든 병자들은 ‘옛적의 인술의원이 살아 있었다면 내 어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탄식하였다고 하니 덕을 갖춘 인재야말로 나라에 제일가는 보배라 하겠다.
원글: 전철호, 「인술의원 가지 마오」, 『야담집 돈항아리』, 평양출판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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