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늙은 절 화암사를 만나다 

시인 안도현이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 않겠다면서도 구름한테 들켜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이라고 극찬을 했던 화암사를 비가 억수로 퍼붓는 6월 중순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화암사는 전북 완주군 경천면 불명산 시루봉 남쪽에 있는 절로 중창비에 나타난 기록으로는 신라 35대 문무왕 때 창건된 절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화암사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머물러 수도하였다는 곳이라 한다.

화암사 들어가는 입구는‘꽃비 내리는 누각’을 뜻하는 우화루가 있다. 앞쪽은 2층이지만 절 안으로 들어가면 1층 건물로 보이는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우화루는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차밭 양식이다. 1층은 기둥을 세워서 바깥과 통하게 하고, 뒤쪽에는 2층 마룻바닥을 땅과 거의 같게 놓아 건물 앞쪽에서는 2층이지만 안쪽에서는 단층집으로 보이게 한 건물이다. 우화루 안에는 화암사의 백미로 꼽히는 목어도 볼거리이다. 5백여 년을 살고 한 생을 마친 소나무가 다시 목어(木魚)로 태어나서 또다시 5백여 년 동안 오랜 풍상을 겪으며 살아온 목어의 모습이다.

어느 사이엔가 늙은, 누각이 나타난다. 현재의 극락전은 조선시대에 지어졌지만, 그 이전 하앙구조 건축술로 백제시대 건축술로 알려져 있다. 처마를 받치는 서까래를 겹으로 받쳐, 처마 지붕 선을 앞으로 더욱 내미는 하앙식 공법을 사용한 건물로, 유일하게 남아 있다. 한반도에 하앙구조 건축물이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당시 일본 건축물에 대한 연원을 중국 남조에서 곧바로 넘어갔다는 정설(법륭사 등등 아스카시대부터 헤이안 시대까지 백제 건축인들의 기록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을 뒤집는 중대한 발견이다.

옛 건물의 편액은 명칭을 가로로 쓴 형태가 일반적이다. 간혹 화재를 예방한다는 주술적 이유로 숭례문처럼 세로로 건물 이름을 쓴 경우도 있다. 그런데 화암사 극락전 편액은 하나의 나무판에 한 자씩 따로 편액을 만들었다. 우리나라 옛 편액 중에서는 유일한 것이다. 글씨를 가장 크게 담을 수 있도록 테두리도 없이 편액을 만들어 여백이 거의 없게 글씨를 꽉 차게 해서체로 썼다.

극락전에 봉안된 아미타불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정토에 가게 하는 부처이다. 무한한 진리의 빛을 상징하여 무량광불로 불리며, 도교의 불로장생 신앙과 결부되어 무량수불이라고도 한다.

화암사로 올라갈 때는 몰랐던 협곡에는 폭포 절벽에 설치한 147개 철계단과 기묘한 경관 그리고 능산바위를 있는 아름다운 계곡이 어우러져 있다.

한반도 모든 땅에는 땅 일구었던 사람들의 소리가 있다. 사람들의 희노애락과 노동이 묻어 있다. 화암사는 그중 안도현 시인이 말하는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다. 자기 안위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적어도 죄를 짓지 말고‘함께’라는 인간의 공동체에서 살다가, 잠시 한눈을 판 적이 있을 때 늙은 절에 와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빛을 보면 다시 한번 힘을 내고 웃으면서 내려갈 수 있는 곳이다.

불교 사찰에서 아미타불을 모신 건물은 극락전, 무량수전, 혹은 미타전(또는 아미타전)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 극락정토가 말 그대로 서쪽에 있다 하여, 아미타불을 모신 건물 또한 불상을 서쪽에 모시고 문을 동쪽으로 내도록 한 경우가 많다. 아미타불 이름을 열 번만 불러도 극락에 간다고 했으니 그 이유 때문에 누구나 염불할 때 아미타불을 쉽게 부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