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역사이야기 – 이간전술이 적용된 고조선-한 전쟁

 

안광획

 

(그림: 고조선-한 전쟁 당시 결사항전을 벌인 애국명장 성기와 고조선 민중들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책 『성기와 고조선 백성들』(조선출판물수출입사, 2001) 표지)

 

B.C. 109 년~B.C. 108년 근 1 년간에 걸쳐 벌어진 고조선-한 전쟁은 민족의 존엄과 명예를 걸고 나라의 자주권을 위하여 우리 인민이 벌인 대규모적인 반침략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일명 만조선-한 전쟁이라고도 한다.

 

“고조선인민들은 전쟁 첫 시기에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밀려드는 한나라 침략군의 대규모적인 공격을 성과적으로 물리쳤습니다.”

 

(지도: 고조선-한 전쟁)

 

만조선과 한나라사이의 전쟁은 한나라통치자들의 끊임없는 영토팽창야욕에 의하여 일어난 침략과 반침략, 정의와 부정의의 전쟁이었다.

※ 고조선 역사는 전조선(단군조선), 후조선, 만조선의 3개 왕조시기로 구분한다. 만조선은 B.C. 194년경에 만(滿)이 후조선을 정변의 방법으로 뒤집어엎고 세운 국가이다.

전쟁의 직접적인 동기로 된 것은 B.C. 109 년 만조선에 한나라의 사신으로 파견된 섭하(涉河)라는자가 만조선의 비왕(裨王: 제후왕) 장(長)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국가의 존엄을 훼손한 이러한 도발행위는 만조선 정부를 격분시켰다. 하여 그 보복으로서 만조선정부는 료동군(遼東郡) 동부도위(東部都尉) 소재지*를 기습하고 섭하를 처단했다. 이것은 응당한 자위적 조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조선에 대한 침략의 구실을 마련해 보려고 꾀하던 한무제(漢武帝)는 이것을 좋은 기회로 여기고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秦皇島市) 산해관(山海關) 인근.

B.C. 109 년 가을 한무제 류철(劉徹)은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으로 하여금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제(齊, 산동성)로부터 공격하제 하였으며,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로 하여금 료동지방에서 출발하여 육로로 침입하게 하였다.

한나라의 침략을 반대하여 거의 1 년간에 걸쳐 벌어진 전쟁은 크게 4단계로 나누어볼수 있다.

첫째 단계는 한나라침략군의 수륙양면공격을 저지·파탄시킨 시기이고, 둘째 단계는 한나라와 강화교섭을 진행한 시기이며, 셋째 단계는 한나라 침략군의 왕검성(부수도) 포위공격을 분쇄하기 위하여 싸운 시기이고, 넷째 단계는 왕검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최후결전을 벌인 시기이다.

전쟁 첫 단계에서 적아쌍방이 벌린 큰 격전은 패수(浿水)*계선에서 2차, 왕검성** 밖에서 1차 있었다.

* 오늘날 료서지방에 소재한 대릉하(大陵河).

** 중국 료녕성 개주시(蓋州市) 일대. 이곳은 부수도로, 평양에 있던 본수도와는 다르다.

당시 한나라 침략군의 전략적 기도는 좌장군 순체의 육군이 패수 계선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료하(遼河) 하구에 도착하면 대기하고 있던 양복의 수군과 합동하여 왕검성을 포위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림: 고조선군 재현도)

 

만조선정부는 적들의 기도를 꿰뚫어보고 패수계선과 왕검성에 기본방어집단을 배치하고 패수계선에서 적의 공격을 좌절시킴으로써 적의 수륙병진기도를 분쇄하는 전략을 세웠다.

패수계선을 지키던 만조선의 방어군은 첫 전투에서 완강하게 싸워 좌장군 선봉부대의 공격을 물리치고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중국의 역사기록인 『한서』 에서는 이때의 패전상황에 대하여 “좌장군 순체가 료동지방 출신 군사들을 거느리고 먼저 공격하였으나 패하여 흩어지고 졸정(卒正, 소대장격의 군관) 다(多)는 도망쳐 돌아왔으므로 법에 따라 목을 베었다.”고 전하고 있다.

만조선의 패수 서군은 순체가 직접 거느린 한나라침략군을 또다시 격파하였다. 만조선의 방어군은 패수와 같은 자연의 험한 지형에 의거하여 방어전을 벌림으로써 한나라 육군의 공격을 두차례나 좌절시키고 그들의 수륙병진기도를 분쇄하였다.

한편, 양복은 순체가 지휘한 륙군이 패하여 수륙군의 합동공격을 계획대로 실현시킬 수 없게 되자 공명심에 들떠 단독으로 왕검성을 공격하였다. 그는 제나라 지방의 침략군 병졸 7,000명을 거느리고 왕검성을 공격하다가 만조선군의 호된 반격에 부딪쳐 겨우 목숨을 건져가지고 산 속으로 도망쳐 10여일이나 숨어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쟁 첫 시기 한나라침략군의 육군과 수군이 연속 패하자 한무제는 위산(衛山)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강화교섭을 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쟁은 두 번째 단계인 일시적인 휴전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만조선군의 강경한 자세로 하여 강화담판은 막을 울리기도 전에 결렬되었고 한무제는 담판을 성립시키지 못한 죄로 위산을 처형하였다.

강화담판이 파탄된 후 전쟁은 세 번째 단계에 들어섰다. 만조선정부는 한편으로는 부수도 왕검성을 고수하기 위한 방어전을 완강히 벌렸고 다른 편으로는 적진내부에 알륵을 조성하기 위한 이간활동을 적극 벌렸다.

강화담판 결렬 후 좌장군 순체의 부대는 패수중류지역으로 에돌아 올라가 만조선의 패수방어군을 격파하고 남진하여 왕검성의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패잔병을 긁어모아 겨우 재편성된 양복의 부대는 왕검성 남쪽을 포위하였다. 적들은 발악적으로 성을· 공격하였으나 만조선군민의 완강한 항전으로 하여 여러 달 동안 패전만 거듭하였다.

만조선 정부는 두 적장의 약점을 포착하고 이간전술을 썼다. 좌장군 순체나 누선장군 양복은 다 같이 흉노(匈奴)와 남월(南越, 베트남 북부 하노이 일대)을 치는데서 ‘공’을 세웠고 ‘전투경험’ 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단독으로 먼저 왕검성을 점령하고 고조선을 ‘멸망’ 시킴으로써 명성을 떨쳐보려는 공명심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결국 이것으로 하여 두 적장사이에 불화가 조성되게 되었다.

한편, 왕검성 군사들에 의하여 큰 참패를 당한 양복의 부대에서 졸병들은 모두 싸움을 두려 워 하였고 장수들은 마음속으로 심히 부끄러워 하였으며 포위만 하고 화친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적들의 이러한 약점을 꿰뚫어 본 만조선 정부는 한편으로는 화친만을 원하는 양복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그와 관계를 가졌으며 다른 편으로는 좌장군 순체의 공격을 완강하게 물리쳤다. 어지간히 힘이 빠진 순체가 양복에게 함께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양복은 강화교섭에만 기대를 걸고 그에 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좌장군 순체 역시 사람을 시켜 만조선과 강화교섭을 이루어보려 하였으나 만조선정부는 일방적으로 양복과만 관계를 맺는 책략을 세웠다. 

사태가 이쯤 번져지자, 좌장군 순체는 누선장군 양복이 전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고 지금 만조선과 사사로이 좋아하고 있으니 혹시 반역하려는 계책이 있지 않는가 하고 의심하게까지 되었다. 한무제 역시 두 장수가 성을 포위하고도 사이가 벌어지고 뜻이 달라서 오래도록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을 터놓았다.

이처럼 만조선 정부는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이 합동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왕검성 방어에 유리한 국면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화가 동한 한무제는 전국을 수습하기 위하여 제남(齊南) 태수 공손수(公孫樹)를 새로 파견하였다. 그는 양복을 모해하는 순체의 말을 믿고 양복을 구속하였으며, 그의 군대를 좌장군 휘하에 편입시킴으로써 결국 적의 한쪽 날개는 꺾이고 적들의 수륙병진계획도 파탄되게 되었다. 제남태수 공손수 역시 일을 잘못 처리한 것으로 하여 죽음을 당했다.

양복의 부대까지 통합하고 군사지휘권을 독차지한 순체는 왕검성에 대한 총공격에로 넘어갔다. 그리하여 전쟁은 네 번째 단계에 들어섰다. 만조선의 애국적 장병들은 임기응변의 전술로 잘 꾸려진 성에 의거하여 적들의 공격을 걸음마다 짓부셔 버렸다. 적아간의 공방전은 B.C. 108년 여름까지 계속됐다.

그런데 싸움이 지속되게 되자 아군의 신념이 없고 나약한 자들 속에서 배신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조선상(朝鮮相) 로인(路人), 상(相) 한도(韓陶), 장군 왕협(王唊)과 같은 고위관료들은 비열하게도 적진으로 넘어가 투항하였다. 니계상(尼谿相) 참(參)이란자는 자객을 시켜 우거왕(右渠王)을 살해하고 적들에게 투항하였다. 이때 왕자를 비롯한 일부 왕족들과 고위관리들도 그의 뒤를 따라 투항하였다.

귀족관료들의 배신행위로 하여 성은 위험에 처하였다. 하지만 왕검성 방위자들은 동요하지 않고 대선 성기(成己)를 지휘자로 내세우고 성을 지켜 굴함 없이 싸웠다.

무모한 공격으로써는 성을 점령할 수 없다고 타산한 침략군 지휘부는 저들에게 투항하였던 우거왕의 아들 장(章), 로인의 아들 최(最) 등 비열한 무리들을 다시 성안에 침투시켜 투항을 설교하는 한편 경계가 소홀한 틈을 이용하여 대신 성기를 암살하게 하였다.

 

(지도: 전쟁 이후 고조선 본토(평양 일대)에는 설치되지 못하고 료동지역에 설치된 한사군)

 

결국 성은 함락되었다. 하지만 만조선 민중들이 근 1년간이나 벌인 정의의 전쟁은 적들에게 큰 손실을 주고 고조선 전 지역을 병탄하려던 한무제의 침략야망을 꺾어버렸다.

적들의 패전상은 한무제가 전쟁에 동원시켰던 4명의 장수들 가운데서 3명의 목을 자르고 나머지 한명도 장군의 벼슬을 떼어 평백성으로 만들어버린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때 양군(兩軍), 즉 육군과 수군은 다 곤욕만 치르고 장졸들 중에 표창을 받은 자는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전쟁에서는 기록상에 보이는 것으로서는 처음으로 여러 가지 군사전법들이 적용되었다. 전쟁에서는 적들의 수륙병진계획을 분쇄할 전략을 세우고 험한 지형을 효과적으로 싸움에 적용하였으며 합리적인 역량배치와 각개격파의 전술로 수적으로 우세한 적들의 공격을 좌절시켰다. 특히 적장들 사이의 모순을 정확히 포착하고 이간활동을 벌려 특별히 자객을 쓰지 않고 적장들의 목을 땀으로써 침략군의 지휘체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싸움을 지연시킨 것은 고대에 보기 드문 훌륭한 정보전의 실례이며 우리나라에서 그것이 싸움에 도입된 역사가 매우 오래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변절자들의 배신행위로 만조선-한 전쟁은 좋은 결실을 남기지 못하였지만 전쟁을 통하여 만조선의 애국적 장병들은 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우리 인민의 뜨거운 애국심과 불굴의 완강성, 슬기와 지략을 크게 시위하였다.

 

출전: 한효성·림호성, 『력사로 본 전장』, 금성청년출판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