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살린 웅치전투 · 조선 태조의 산성 위봉산성
– 웅치 전적지와 위봉산성
바람과 햇빛이 물들어가는 봄,
전주 사람들이 봄볕을 맞이하기 위해 가장 많이 가는 곳이 소양면 일대이다. 소양면 일대에는 길가의 숲과 아름다운 길, 그리고 이쁜 카페와 식당이 많은 곳이다. 소양면은 송광사, 위봉사, 위봉산성 등의 지정문화재가 산재하여 있다. 오늘 소개하는 역사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는 웅치·이치 전투의 웅치 전적지와 조선의 어진을 지키기 위한 위봉산성이다.
조선을 살린 웅치 전적지
웅치는 전라북도 진안과 전라북도 전주를 연결하는 고개이다. 1592년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1592년 5월 3일에 한양을 점령하고, 1592년 6월 14일에 평양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비록 한양을 점령했으나 전쟁이 장기화하는 조짐을 보이자, 임진강에서 작전 회의하고 조선을 분할통치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한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1592년 5월부터 전라도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금산을 점령한 왜군은 전주로 진격하고자 했다. 이를 막기 위해 1진에 의병장 황박, 2진에 나주판관 이복남, 3진으로 김제군수 정담 등이 연합하여 웅치의 험한 지형을 이용, 적을 막고자 했다.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관군과 의병 그리고 지역민 등 3000여 명이 1만여 명의 왜군에 맞서 왜군의 대공세를 수차례에 걸쳐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새벽부터 본격적인 공격이 이루어져 저녁 무렵에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해 황박과 이복남 등은 안덕원으로 후퇴했다. 해남현감 변응정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그러나 정담은 아군들의 후퇴를 돕기 위해서 웅치 정상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정담 외에도 종사관 이봉, 강운 등 많은 관군과 의병들이 전멸했다. 웅치를 점령한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죽은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큰 무덤을 만들어 그 위에‘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표목을 세워놓고 전주성으로 향하다 결국 금산으로 후퇴하였다.
갑오년 농민군에 도망간 태조 어진이 있었던 위봉산성
이 산성은 조선 숙종 원년(1675)에 쌓은 것으로, 둘레가 약 16km에 이르는 대단한 규모이다. 숙종 1년 중수를 시작하여 숙종 8년 동안 인근 고을의 수많은 백성이 동원되었다. 벽 둘레는 약 8,539m, 성벽 높이는 1.8~2.6m이고 성문 4개소, 암문지 6개소, 장대 2개소, 포루지 13개소, 추정 건물지 15개소, 수구지 1개소가 있다.
이 산성의 목적은 백성의 피난도 있지만,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과 조경묘에 있던 태조의 초상화와 그의 조상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피난시키기 위해 이 성을 쌓았다. 실제 갑오년 농민군에 쫓기어 전주가 함락되었을 때 초상화와 나무패를 이곳으로 가져왔다. 성안에는 위봉사와 전주 팔경의 하나인 위봉폭포가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진 민족혼
웅치 전적지는 오랫동안 역사 속에 묻힌 채 조명받지 못했다. 웅치전투는 비록 패배한 전투이지만 전라도 침공의 최전선에서 왜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힘으로써 뒤이은 전주전투를 승리로 끌어내게 했다. 한반도의 곡식 창고인 전라도를 지켜낼 수 있었고 군량미를 확보한 조선군은 결국 임진왜란을 승리로 맞이할 수 있었다. 또한, 최선두에 의병은 농민군이었다.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이 한양과 평양을 포기하고 조선의 백성을 포기하였으나 일본의 침략전쟁에 맞서 이 땅과 민족을 지키기 위한 농민군이 최선두에 있었다.
그러나 웅치 전적지에는 아무도 오지 않고 있다. 기억이라고는 1979년 세운 웅치전적비 하나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위치: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산18-1) 전적비에 그려진 조각은 무엇을 설명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엉망이었다. 전주에서 전적비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위험한 비포장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조선의 왕의 어진을 지키기 위한 위봉산성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2006년 4월 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71호로 지정되었고 주민 소득 창출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명분으로 많은 예산과 지원이 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조선 시대를 바라보는 데 있어 민초들이 지키고자 했던 웅치 전적지와 왕의 조상을 지키고자 했던 위봉산성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움이 흐른다. 위봉산성 만큼 웅치 전적지를 보존하고 발전시켰으면 좋겠다. 역사는 왕이 아닌 백성이 만들어 왔다.
Social Li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