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한 역사 이야기와 무주 유적지

– 한풍루, 무주 향교, 라제통문

전북에서 험준한 산맥으로 겨울에 눈도 많이 오고 오지라고 부르는 곳 중 하나가 무주다. 무주는 전라북도 동북부에 있는 군으로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가 모두 맞닿아 있다. 또한, 충남 금산군, 충북 영동군, 경북 김천시, 경남 거창군과 연결되어 있다. 삼국시대에는 소백산맥을 사이에 두고 동편은 신라, 서편은 백제에 속했다. 조선 태종 때 신라의 무풍현과 백제의 주계현을 합병하여 무주현, 고종 때 무주군이 되었다.

무주읍 한풍루 – 일제강점기에 수난당한 문화재

1층은 정면 3칸, 측면 4칸,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건연대는 자세하지 않으며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관아에 달린 건물로 보이고 (현 우체국 근처인 남대천가에 있었다 함),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599년 임권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중건하기 시작하였으나 끝을 보지 못하고, 다음 현감 남복시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또한, 1783년 부사 임중원(林重遠)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강점기 때에는 불교포교당으로 쓰여왔고, 그 뒤 안국사(安國寺) 승려 이철허(李澈虛)가 불하받았으나 일본인에게 넘겼으며, 일본인은 다시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에 살던 이명주에게 팔아넘겼다. 1936년 이 건물을 양강가로 옮겨 지어 금호루라 불렀다.

이후, 귀중한 문화재를 어떻게 해서든지 되찾고자 하는 무주 사람들과 이유야 어떻든 합법적으로 사들인 누각을 내줄 수 없다는 영동 사람들 간의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무주 유지들로 구성된 ‘한풍루 복구추진위원회’가 영동군민들이 어떠한 요구 조건을 내걸어도 따르겠다고 하면서 1971년 무주의 현 위치로 되돌려지게 되었다. (영동군민들이 요구한 조건이 무엇인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현 위치는 충혼탑, 참전비 등 많은 각종 비가 있고, 어수선하게 주변 경관이 구성되어 있어 다소 어울리지 않아 안타깝다

무주 향교 – 왜 다를까 ?

무주 향교는 관아 북쪽에 있었는데, 1692년 호랑이 피해가 커 향로산 서쪽으로 옮겼다가 터가 습하여 1834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현재의 향교는 그 후 몇 차례 보수가 있었다.
무주의 향교는 일반적인 향교와는 동떨어지게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인 향교는 낮은 산을 이용해 층이 지게 건물 배열을 하고 위삼문을 들어서면 학생들이 묵는 동재와 세제를 두고 명륜당이 있고, 뒤편으로 현인들을 모시는 제각 형태로 되어있다. 무주 향교는 외삼문의 우측 담벼락 옆에 명륜당 전면이 있다. 후면이 대성으로 향한 마당과 내삼문을 지나 동무와 서문이 있고, 그 안쪽에 대성전이 있다. 이러한 건물 배치는 앞에 생긴 도로로 인하여 담장이 안으로 들어오면서 생긴 현상이라 한다.

라제통문 – 거짓과 진실

라제통문은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굴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뚫은 굴이다. 역사학자 “오재성”씨는 이 굴의 원래 이름은 “기미니 굴”로 1910년경 일본인들이 인근 금광에서 채굴된 금을 옮기기 위하여 뚫은 굴로 당시 김천과 거창을 잇는 길이였다고 한다. 이 굴의 명칭이 바뀐 것은 1963년 무주구천동 33경을 만들면서 부터다.

당시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군부대의 정훈장교가 무주구천동 33경의 이름을 붙이면서 라제통문이란 이름으로 둔갑해 교과서에 등장했고 삼국시대의 신라 백제의 국경이고 석모산의 기암절벽을 뚫고 동서로 통하는 길을 내었다는, 웃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국사 교과서 때문에 학생들의 수학여행 필수코스가 되었다.

현재는 무주군 설천면과 무풍면을 가르는 경계지점이다. 높이 3m, 길이 10m의 자연 암석을 인위적으로 관통시킨 인공동굴이다. 석굴 위에는 ‘羅濟通門’ 석판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나가며

라제통문의 부실한 역사 기록과 지형과 조건에 의한 인한 향교의 특이성·식민지 시기의 상처 입은 한풍루를 둘러보는 과정은, 역사를 바라보는데 주체적인 눈과 생각의 깊이를 높이는 사고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오류의 역사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라제통문에서 배웠고, 식민지 시기나 현재에도 역사의 유물을 힘 있는 자에 의해 사고, 팔 수 있다는 생각이 무서웠다.

무주 유적지에서 역사를 기억하고 보존하는 데 있어 객관적인 진실을 기록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문화재는 박물관이나 관광을 위해 임의적으로 장소를 결정하지 않고 처음 있었던 곳으로 가야 한다는 이 단순한 사실과 생각이 머릿속에 인식되어 졌다.

무주 구상 화강편마암의 둥근 무늬인 구상은 지름이 5-10cm이고 색깔은 어두운 회색이거나 어두운 녹색이거나 일부는 주변에 흰색의 외연 부를 보여주기도 한다. 대부분의 구상암은 화성작용 때문에 만들어진 데 비해 무주 오산리 구상암은 변성작용으로 만들어져 구상암 중에서도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하며, 학술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무주 오산리 구상화강편마암 (천연기념물 2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