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초기 봉건 국가들의 왕호와 관련한 기본사료는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에서 찾아볼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첫 봉건국가로 등장한 고구려에서는 독자적으로 왕호를 사용하였다. 고구려에서는 나라가 세워진 초기부터 왕들이 죽은 다음에 그가 살아있을 때의 본명과 구별하여 왕호를 제정하여 불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왕이 죽은 다음 호를 주었는데 그것이 곧 왕호였다. 시조왕의 경우를 놓고 보더라도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인데 임금의 자리에 있은지 19년만에 나이 마흔 살로 죽자 룡산에 장사를 지내고 호를 동명성왕이라고 하였다. 동명성왕은 곧 고구려시조왕의 왕호였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고구려왕들이 태어났을 때의 본명을 명백히 밝혀주었으며 죽은 다음에 받은 왕호는 《호》(號),《호위》(號爲),《호왈》(號曰)이라는 표식을 하고 밝혀주었다. 《삼국사기》에서는 류리명왕을 비롯하여 대무신왕, 모본왕, 차대왕, 신대왕, 고국천왕, 산상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왕,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등의 왕호는 《호위》의 표식으로, 동천왕과 중천왕, 서천왕, 봉상왕, 미천왕, 평원왕, 영양왕의 왕호는 《호왈》의 표식으로 기록하였다.
고구려에서 왕호를 짓는 방법은 몇 가지로 제정되어 있었다.
고구려의 왕호는 왕의 업적이나 생애의 특징, 죽어 묻힌 장지와 연관시켜 지어부르거나 《신》(新), 《호》(好), 《성》(聖)과 같은 길상어를 붙여 독특하게 불렀다.
※ 실례로 《대무신왕》은 뛰어난 무예를 평가하여 지은 이름이고 《광개토왕》은 나라의 영역을 크게 넓힌 그의 공적으로부터 불린 이름이며 《장수왕》이란 오랫동안 생존한 임금이라는 뜻이고 《문자왕》이란 문장이 뛰어난 임금이라는 의미이다.
고구려의 왕호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무덤이 있는 고장의 이름을 왕호로 이용한 것이다.
※ 실례로 소수림왕이 죽자 고구려에서는 그를 소수림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소수림왕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고구려의 왕들인 민중, 모본, 고국천, 봉상 등은 다 국왕의 무덤이 있는 고장의 이름들이며 안장, 안원, 양원, 평원 등도 대체로는 그 왕들이 묻혔던 고장의 이름으로 추측된다.
고구려에는 왕의 존호와 살아있는 임금에 대한 칭호가 있었다. 고구려사람들이 남긴 금석문들에 이와 관련한 자료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실례는 광개토왕의 칭호이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은 이름이 담덕이며 죽은 후에 영토를 넓힌 공적으로 《광개토왕》이라는 호를 받았다고 기록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에는 그의 칭호를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왕이 죽은 후 받았던 모든 칭호들을 다 갖추어서 서술한 존호라고 볼 수 있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칭호는 더 간략하여 표현하거나 비슷한 칭호로 통칭되기도 하였다.
비문에는 그 뒷부분에 이 왕의 칭호를 약간 간략하여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라고 쓴 것이 보인다. 광개토왕의 공식적인 칭호는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고구려의 금석문들에도 나타난다. 경주의 신라무덤에서 발굴된 호우에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라는 광개토왕의 칭호가 기록되어있는데 《토지》는 《토경》과 같이 영토라는 뜻이다. 릉비보다 약간 후시기에 제작된 모두루무덤의 벽에 쓴 글에도 광개토왕의 칭호가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이 왕의 칭호를 단순히 《광개토왕》이라고만 하거나 더 간단하게는 《개토왕》이라고 한 것도 있으나 광개토왕릉비를 비롯한 금석문들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공식적이면서도 완전한 존호를 썼으며 그와 비슷한 명칭으로 통칭하였다.
광개토왕은 생전에도 일정한 칭호를 가지고있었다. 광개토왕릉비문에 의하면 광개토왕은 즉위하자마자 곧 《영락대왕》이라고 하였으며 《영락》은 동시에 그 년호로 되였다. 고구려에서 사용한 왕의 존호와 생존시 왕의 호칭법은 그 후 발해에 그대로 이어졌으며 이것은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 관계를 뚜렷이 보여준다.
실례로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묘비에는 이들의 아버지인 문왕의 존호가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대흥》, 《보력》은 모두 문왕의 통치 시기에 사용한 년호인 동시에 문왕의 생존시 왕호였다. 이것은 광개토왕때의 《영락》이라는 년호가 곧 왕의 칭호로 되어 《영락대왕》이라고 불리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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