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아침에는 바닷가를 향할수록 안개가 짙게 오른다.
– 정유재란 호벌치전적비, 코 무덤, 백제왕국 최후의 항쟁지 개암사 일대.
역사기행을 다니면서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곳은 화려한 곳보다는 사람들의 뇌리에 잊혀 가고 있는 유적지를 돌아보려 한 것 같다. 오늘은 정유재란 때 3천여 명의 의병들이 왜군에 맞서 단호히 항쟁과 죽음으로 맞섰던 호벌치전적지와 나라를 빼앗긴 백제가 다시 나라를 찾기 위한 백제 부흥 운동의 항쟁지 개암사 일대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외세에 죽음으로 항거한 호벌치전투 – 호벌치전적비
1597년 정유재란은 부안현을 비켜 가지 않았다. 당시 부안 현감, 아전, 군졸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목숨을 바쳐 백성을 지켰던 사람들은 의병이었다.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왜군은 주력부대를 전라도에 투입하여 곳곳을 짓밟았고, 전라도 각처에서는 지역별 의병항쟁이 계속되었다.
1597년 3월 하순부터 4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해로를 이용해 줄포에 상륙한 왜병에 맞서 흥덕과 부안의 호벌치에서는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흥덕에서 의병을 일으킨 채홍국은 그들의 인척과 가동을 총동원하여 전라도 순천지방까지 진출, 의병 활동을 전개한 바 있었다. 그 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지난날의 조직을 재정비하여 향리를 거점으로 한 의병 활동을 재개하였다.
의병조직에는 고부 만일사 주지를 중심으로 많은 사찰에서 승려가 가담하였고, 농민, 천민, 유생 등 3천여 명이 하나로 결합하였다고 한다. 4월 중순 이후 약 1주간에 걸쳐 계속된 호벌치 전투에서는 의병장 채홍국 삼부자는 물론, 흥덕 의병 대부분이 전사하는 일대 혈전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부안·흥덕 일대는 결국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최후까지 침략군에 대항하여 그 누구도 지원 없이 의병들의 자체의 힘으로 싸웠다. 민족의 자존감과 불굴의 민중의 힘을 보여준 자랑스러운 의병항쟁이었다.
호벌치 명칭을 바꿔야 한다.- 호벌치란 지명은 7세기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이곳에 상륙하여 유진치와 주류성 일대에 통수부를 설치하였던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
호벌지 전적비 옆에는 아무 표식도 없이 왜군의 잔혹함이 보여주는 코 무덤이 있다.
정유재란 때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부하 장수들에게 전공을 확인하기 위해 조선인 코를 베어오도록 했고, 전쟁 중에 그가 죽어 포상을 받지 못하게 되자 전리품으로 가져간 코를 오카야마현 비젠시 성주 로고스게가 자신의 뒷산에 묻었다.
코 무덤이 호벌치전적지로 옮겨 안장된 것은 400여 년만인 1993년 11월이었다. 환국 직후 동래 자비사(삼중스님)에 임시 봉안되었다가 정유재란 때 3천의병이 산화하는 등 희생이 가장 컸던 전적지라 해서 이곳에 잠들게 한 것이다.
백제의 최후의 항쟁지 – 개암사와 주류성
개암사의 유래를 살펴보면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공격을 피해 이곳에 성을 쌓을 때, 우장군과 진의 두 장군이 좌우 계곡에 왕궁의 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 서쪽을 개암이라고 한 데서 비롯하였다고 전한다.
개암사는 634년(백제 무왕 35)에 묘련 왕사가 개창 하였고 신라의 문무왕 때인 676년에 백제의 유민을 다독거리는 뜻으로 원효와 의상 두 대사가 이곳에 들어와서 개암사를 재건하였다. 1314년(고려 충숙왕 1)에는 원감국사가 순천 송광사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중창하면서 황금전, 청련각 등 30여 동의 건물을 지어 대규모의 사찰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러 1414년에 다시 사찰을 중창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대웅전 등 일부분만을 중건하였다.
개암사 내부에는 대웅전 내부 천장 여러 마리의 용, 석조지장보살좌상, 동종, 16나한상, 이 등이 있다. 이 건물의 외부는 공포의 짜임과 그 부재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이다. 또한, 초석은 자연석 주초를 사용하였고 기둥은 두리기둥이다. 기둥 간에는 창방을 결구하고 그 위에 주간포를 배치하기 위한 평방을 짜 올렸는데 평방을 통부재로 쓰지 않고 두 개의 부재를 맞대고 촉을 끼워 단일 재처럼 사용한 그것이 특이하다.
개암사는 신라 문무왕이 백제 유민을 다독거리기 위해 공을 들인 절이지만, 백제 멸망 당시 백제 최후의 항쟁지인 주류성이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과 태자가 당에 투항하였으나, 나당연합군에 대한 백제 광복군의 저항은 660∼663년에 걸쳐 완강히 펼쳐진다. 주류성 근처의 백제인들은 나당연합군에 맞서 싸우면서, 귀실 복신 장군, 승려 도침(개암사 창건 묘련왕사의 제자)과 함께 661년 1월 일본에 머물던 왕자 풍을 데려오고, 백제의 이름으로 나라를 되찾는 싸움을 시작한 곳이다. 또한, 백제 최후의 항쟁지로 기록되어 진다.
한 바퀴 돌고 나니…
가을 하늘은 안개가 걷혔다. 안개가 걷힌 하늘은 무척이나 밝다. 어둠이 있으면 밝음이 있고, 역사는 어둠을 뚫고 한발씩 전진한다. 외세에 맞서 싸운 호벌치와 민중의 한이 서린 코 무덤, 그리고 망국의 한을 이겨 내고자 했던 주류성 백성들은 어둠 속에서도 밝음을 향해 한발 두발 전진했을 것이다. 어두운 시대에 그렇게 발걸음을 내디뎠을 것이다.
가진 자들은 도망가고, 위정자가 나라를 망칠 때에도 삶을 지키고자 했고 뜨거운 마음으로 민초의 힘을 보여주었다. 비록 패했던 역사지만, 그 역사는 산하에 남아 기록되어 지고 있다.
코무덤이 있는 호벌치 전적비 안에는 코 무덤의 기록조차 없다. 코 무덤이 있는 조차도 모를 정도다. 그리고 호벌치 전투에 대한 기록조차 성의가 없다. 부조에 그려진 의병의 모습은 싸우는 의병의 모습이 아니다. 야만적 일본 침략에 대한 기록과 침략군에 맞섰던 의병 정신을 되찾기 위해 호벌치 전적비는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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