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에 묻힌 것은 삶의 터전만이 아니라 전북 고대사도 가라앉았다.
– 용담호에 가라앉은 모정리 진그늘 유적, 여의곡 마을, 와정토성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와 안개가 멈춰 있는 듯한 3월 어느 날 진안에 있는 역사박물관을 찾아갔다. 전북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던 사람의 역사를 찾아보고 구석기 시대의 유물과 진안고원의 가야문화를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너무나 허전한 역사박물관을 보면서 안타까움이 다가왔다.
진안은 섬진강의 발원지(데미샘)이자 금강 상류가 있기에 일찍부터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여겨지고. 울창한 숲들이 우거져있었기에 동식물들이 많이 있었던 거로 추정이 된다.
박물관은 용담호로 인해 물에 잠긴 아주 적은 유물뿐이 없었다. 용담댐 수몰 지역 내에서 발굴조사 된 진안 진그늘 유적은 화덕자리에서 나온 숯을 방사성 탄소연대측정(AMS) 결과 B.P 2만 2천850년으로 나왔고, 암갈색 찰흙층의 상부에서 나온 숯은 4만 2천 년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후기보다 앞선 중기 구석기 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이다.
후기 구석기 시대 문화층에서 약 800여 점의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들의 암질은 유문암, 규장암, 응회암 등의 산성 화산암과 석영·비정질 실리카 등이다. 후기 석기 종류에는 돌날 몸돌·돌날 그리고 슴베찌르개·밀개·새기개·긁개·자르개·뚜르개 등이 있다.
수몰 이전 여의곡 마을 남쪽 방면에는 많은 지석묘와 밭 자리가 확인되어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모정리 여의곡 유적은 청동기시대의 대규모 복합 유적으로 청동기시대 주거지 7기·고인돌 43기·돌널무덤 12기·돌뚜껑 움무덤 3기·독널 무덤 1기·전작지·도랑 유구·덮개돌 이동로·집석 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1997년 여의곡 유적에서 확인된 유구 고인돌은 용담댐 망향의 공원에 이전 복원되어 있다. 그러나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아쉬움이 있다.
① 진안 지역은 여러 문헌 등을 통해 삼국시대 백제의 영역에 속했던 곳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1990년 중반 이후 용담댐 수몰 지구에 대한 조사를 통해 황산리 고분군, 와정유적 등이 발굴조사 되면서 가야문화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황산리 고분군에서는 총 17기의 가야계 돌덧널무덤(石槨墓)이 조사되었으며, 다양한 백제계 토기와 가야계토기, 신라계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와정유적은 외곽 부분에 목책 토성이 돌려지고, 내부에 온돌시설을 갖춘 7기의 주거지와 저장공이 조사되었으며, 조성 시기는 5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 대부분은 백제계 토기로 확인되어 유적의 축조세력은 백제로 추정되지만, 소량의 가야계 토기가 함께 출토되고 있어 백제와 가야가 당시에 이 지역을 경유 하는 교통로로 이용하여 교류관계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박물관을 떠나 용담호를 한 반퀴 휘휘 돌아보았다. 용담호는 1992년 착공하여 2001년에 전북동부 금강상류에 용담댐 완공으로 만들어진 인공호수이다. 용담댐 건설로 수몰된 면적은 31,565,000㎡다. 물속에 잠긴 곳은 11개 읍·면 중에 1개 읍 5개 면이다. 길을 따라가면 정천면 모정리 망향의 광장을 시작으로 용담, 상전, 안천 등 4개의 전망대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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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천리 망향의 광장 |
용담댐이 만들어지면서 사라진 마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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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28년인 1752년에 현령 홍석(洪錫)이 창건했다는 태고정(太古亭)이 자리한다. 원래는 용담면 옥거리에 있던 것을 수몰 직전에 이곳으로 옮겼다. 정자는 1911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공매 처분될 뻔한 적이 있다. 그때 수천리 송림마을의 임소환이라는 사람이 250원에 사서 용담현의 공동 소유물로 기증했고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정자 앞쪽에는 충혼탑과 공덕비, 열녀비 등 비석들이 모여 서 있다. 모두 수몰된 마을에서 옮겨온 것들이다. |
지금까지 소개한 유적지는 용담호에 가라앉은 일부지역이다. 사람이 살기 위해 물이 필요하기에 삶의 터전을 지웠지만, 용담호에는 사람의 역사가 있다. 이렇듯 많은 면적이 물속에 잠기면서 오랜 역사도 함께 잠겼다. 사람들은 소중히 간직해온 터전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겪었다. 또 수많은 매장문화재가 물속에 잠겼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물이 물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용담댐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상전면 수동리 외송, 용평리 평은, 갈현리 신전과 원주평, 정천면 모정리 모실 등은 시간이 없어 발굴하지 못했다고 한다.
수몰과 함께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주민들처럼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역시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는 진통을 겪었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더는 유적지가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물은 유적지에 있어야 한다. 최소한 용담호 근처에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곳에 환경친화적으로 새롭게 유물을 전시해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고 용담호의 화려함도 중요하지만, 인류가 살아왔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터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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