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 바람길을 걷다

– 항일무장 곽경림 선생 추모비, 망해사, 두곡서원, 길곶봉수대

자연을 만나다 보면 인간의 욕망 끝은 무엇일까? 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욕망(무엇을 가지거나 하고자 간절하게 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욕망은 욕구이기도 하고 변화하기 위한 실천의 출발이기도 하다. 그러나 욕망이 통제되지 않으면 탐욕으로 변해 버린다. 이번 유적지는 망해사와 봉화산의 봉화대, 그리고 심포항 일대다. 심포항 일대에서 우리의 탐욕이 결국 미래의 사람들에게 인간이 만든 역사를 지울 수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독립무장항쟁 아나키스트 고 곽경렬 선생 추모비

전북권 정읍 무성서원 일대 향교에서 면암 최익현의 강연에 유장렬 등과 함께 참여하는 등 인연을 맺고 1913년 풍기광복당 (조선 최초의 아나키스트인 항일무장항쟁 결사체)과 연루되었다,

1915년 항일비밀결사인 광복단에 입단하여 한훈(韓焄)·유장렬(柳章烈) 등과 함께 박곡(朴谷)·벌교(筏橋) 등지의 친일파 부호를 숙청하였으며, 오성(烏城)의 일본 헌병분견대를 습격하는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6년 일본 경찰의 체포망을 피하여 한때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계속 활동하였다. 1918년 친일파 이종국(李鍾國)이 광복단조직을 밀고함으로써 재차 체포망이 압축되자 지하로 은신하였다. 결국 1924년에 체포되어 2년여의 모진 고문 끝에 1929년 4월 1일 전주 형무소에서 출옥 후 유장렬 의병대장과 암약하였다가 1968년 향년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망해사

바다를 볼 수 없는 절이 되어버렸다. 백제 의자왕 2년 (642)에 부설거사가 새로 세웠고, 경덕왕 13년에 당나라 중도법사가 중장 했으며, 조선시대 22년(1589)에 진묵대사가 낙서전을 세웠다고 한다.

망해사 경내에는 보광명전, 낙서전, 칠성각, 요사 그리고 4개의 부도가 있다 낙서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8호 망해사 편액은 낙서전에 걸쳐있으며, 낙서전은 비록 규모가 작으나 이익공집(살미의 끝 모양이 새 날개처럼 뾰족하게 생겨서 부르는 명칭)으로 초가지가 화려하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고 구식 한와로 지붕을 덮고 있다.

낙서전은 1589년(조선 선조 22년)에 진묵대사가 처음으로 세웠고 그 후 1933년과 1977년에 중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화조대위에 안치된 아미타불좌상(주불), 관세음보살상을 모셔놓고 있다. 건물의 외형은 팔작지붕의 ㄱ자형으로써 앞으로 한 칸 나온 부분에는 마루가 놓여있고 그 위에 근래에 만든 종이 걸려있다. 또한, 건물의 오른쪽에는 방과 부엌이 딸려 있어서 원래 이 낙서전은 법당 겸 요사로 사용되었음을 짐작게 하고 있다. 낙서전 맞은 쪽에는 노거수가 2그루 있어 망해사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두곡서원

1634년(인조 12)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몽주(鄭夢周)·강원기(康元紀)·함부림(咸傅霖)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2년(고종 9)에 훼철되었다. 1901년 유림에 의하여 제단을 마련하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1970년에 복원하였다. 복원, 중건할 때 함부림은 봉안에서 제외되었고 별도의 서원건립이 추진 중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4칸의 영모재(永慕齋), 숭의문(崇義門) 등이 있으며, 사우에는 정몽주와 강원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심포항
심포항은 만경강과 동진강이 서해에서 만나는 지점이어서 대한민국 내 백합 생산의 60%를 차지하던 어항이었으나, 심포항은 포구의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심포항 일대는 죽합과 임금님 수라상에 진상되었던 자연산 대합의 주 생산지였고, 남상·남하 마을은 매년 300여 필의 군마, 석소마을은 칼과 창을 가는 데 쓰이는 숫돌 5,000편씩을 만들어 나라에 헌납한 유적지로 알려져 있다.

현재 심포항은 새만금 사업으로 어업이 거의 중단되었다. 새만금 사업으로 갯벌이 사라졌고, 바다가 사라졌다. 서해안의 가장 아름다운 낙조 항인 심포항은 새만금의 땅과 맞바꾼 채로 모든 것이 잊혀 가고 있다.

봉화산 봉수대

봉화는 ‘봉수’라고도 하며 봉(횃불)과 수(연기)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연락 방식이다. 주로 전략적 요충지이면서 접근이 어려운 곳에 설치됐다. 김제의 봉화산(烽火山)은 정상에 봉화대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주춧돌과 자연석으로 쌓았던 담장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새만금 개발에 집중한 탓인지 이를 본체만체하고 있다.

글을 마치며..

새만금이라는 이름은 김제 땅 만경과 금만평야에서 유래되었다. 금만평야는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이는 너른 들녘이었으나 자동차 전용도로, 서해안 고속도로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바닷길은 새만금 사업으로 망망대해는 사라지고 담수호가 되어버렸다. 망해사는 조개만 사라진 게 아니라 검붉은 태양이 비치는 낙조가 사라졌고, 바닷바람조차 냄새가 달라졌다. 또한, 망해사에서 느껴지던 자기에 대한 연민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수백 년 동안 바닷길을 열었던 심포항은 뱃사람들의 출항을 준비하던 굶은 힘줄과 해루질하던 여인네들의 땀 흘림은 사라졌다. 지금은 안쓰러운 배 몇 척과 카라반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