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과 분노 그리고 외세에 맞선 항쟁의 교룡산성과 선국사

 

교룡산성은 백제 시대에 처음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교룡산성은 518m의 교룡산 중턱을 둘러싼 약 3km의 규모로 높이 4.5m, 동, 서, 남, 북 4대 문이 있었고 성안에는 우물 99개, 치첩 1016개, 별장청, 장대, 곡성창, 구례창, 염고, 장고, 군기, 산창 등 군사시설과 전쟁에 대비한 각종 저장고 등이 있어 정유재란 시 남원도호부 관내 운봉, 장수, 임실, 구례, 곡성, 담양, 옥과 등의 양곡을 거두어 교룡산성에 보관하였다 한다.

 

현재 동문(홍예문)과 동서 간 남벽이 남아 있고. 가운데 계곡 부분에는 끊어져 있다. 그 길이는 고작 200m 정도일 뿐이다. 성문으로 다가가면 반월형으로 조성한 바깥문이 나타난다. 이렇게 바깥문을 달아냈던 흔적이나, 성문의 규모로 보아 아마도 암문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무지개 모양의 성문은 모두 장대석을 이용해 아치형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한 장의 장대석을 서로 맞물려 틀을 만들었다.

 

1만명의 죽음을 눈앞에서 바라본 교룡산성

남원은 임진왜란 때나 정유재란 때 왜군과 심하게 격전을 벌인 곳이다. 왜군이 한양으로 올라가거나 호남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지나가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장 처영이 산성을 수축하고 왜군에 맞서기 위해 승군을 모아 훈련을 하던 곳이다.

 

특히, 정유재란에서는 호남을 장악하기 위해 육군 5만 명과 수군 8000명이 진격해오자 조선 장수들과 승병들은 평지성인 남원성보다는 산성인 교룡산성에서 왜군과 싸우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조선군 1000명, 조선 백성 6000명, 양원이 이끄는 3000명 수준이었다. 당시 요동군은 왜군과의 전투 경험도 없었고, 단검과 곤봉(몽둥이) 등 육박전 부대였다. 이러하기에 적이 점령지에서 군량, 무기, 식수, 시설물 등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미리 없애버려 적을 지치게 하는 청야전법(淸野戰法)이었다. 적은 수로 많은 적이 상대하기 위해서도 산성이 평지성보다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명나라 장수는 영원은 조선 장수들을 무시하고 평지전투를 진행했다. 교룡산성에 비축해둔 무기와 식량 등을 모두 남원성으로 옮기도록 지시했다. 선조가 자기 나라의 군권을 넘겨주었기에 조선 장수와 백성들은 군권이 없기에 명나라 장수의 무모함에 장렬히 전사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1만 명의 죽음은 바로 조선의 무능함과는 다르게 조선 백성은 나라 지키는 의로운 항쟁과 외세에 맞서 항쟁으로 기록되었다. 교룡산성은 이후 왜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양원은 남원성 서문을 공략하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밀약을 맺어 성을 비워주는 대신 자기 죽음만은 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류성룡도 “왜적들이 양원인 줄 알면서 짐짓 달아나게 했다”라는 전언(傳言)을‘징비록’에 남겼다. 그 때문인지 명나라 조정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그를 참수한 뒤 머리를 조선에 보냈다.

 

 

갑오농민군 지도자 김개남의 주둔지 교룡산성

 

김개남(1853년~1894년)은 조선 말기의 전라북도 태인의 동학 대접주이며 갑오농민군의 장군이였다. 갑오 농민 전쟁 당시 남원을 기반으로 삼고 교룡산성을 주둔지로 하여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일대에서 활동을 하였다.

 

농민 전쟁 지도자들 가운데 김개남이 가장 비타협의 반봉건 강경노선을 폈다. 직접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농민군 동원력도 뛰어났다. 제1차 농민 전쟁으로 전주성을 점령한 뒤 집강소 시기에 남원은 요즘으로 말하면 민중 권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김개남의 농민군이 틀어쥐고 있었다.

 

김개남 농민군에는 도망 나온 노비, 백정, 승려, 장인, 재인을 중심으로 한 천민부대가 있었다. 백두대간의 중심 산인 지리산 자락을 생활 터전으로 삼았던 농민, 전쟁 기간 천민부대는 양반 사족의 갓을 찢어버리고,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 신분제와 지주제에 대한 반봉건의 기치를 명확하게 보여 주었다.

 

김개남은 1894년 12월 2일 옛 친구 임병찬의 밀고로 체포되어 전주로 끌려왔다. ‘대역무도죄인’은 서울로 압송해 정식 재판 절차를 거쳐야 했으나 그는 원한 많은 자의 압력으로 전주 서교장에서 바로 처형당했다. 처형을 당한 김개남의 수급은 한성부로 이송, 1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3일간 효수된 뒤 다시 전주로 보내졌다. 그가 잡혀갈 때 백성들은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그 많던 군대 어데 두고 짚둥우리가 웬말이냐”는 노랫가락으로 안타까움을 전했다.

 

교룡산성을 품은 선국사

산성 입구에서 300m 오르면 교룡산성을 지키는 수비대의 본부 역할을 했던 선국사가 있다. 선국사는 교룡산성 안에 있는 절로 산성 내에 있다고 산성절이라 부르기도 했다. 신문왕 5년(685)에 세워졌으며, 이곳에 용천이 있다고 하여 용천사라 하였다. 선국사로 이름이 바뀐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절의 건물은 교룡산성을 지키는 군 본부로 사용되었으며, 전성기에는 3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한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공포 사이의 공간에는 불상을 그려 넣어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내부에는 보제류에서 발견된‘교룡산성승장인’이란 도장과 민속자료 제5호인 큰 북이 보존되어 있어 역대 승병장의 본거지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선국사에는 선국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은 1.32m 크기의 불상으로 복장에서 나온 인본다라니 등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건칠로 된 불상은 대부분 보살상인 데 반하여 선국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은 흔치 않은 여래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33인 중 한 분인 백용성 대종사 첫 출가 지이기도 하고 이 사찰의 방 하나에 은덕암의 당호를 붙이고 8개월 동안 최제우가 피신 수양한 곳이다.

 

나가며.

 

교룡산성은 남원 지역 20여 개의 산성중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된 성으로, 백제 때 신라와 대적하여 처음 쌓았다고 전한다. 또한, 고려 말 이성계는 왜구를 맞아 싸웠고, 임진왜란 당시 승장 처영이 크게 수축한 곳이다. 그런가 하면 갑오농민전쟁 때는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이 관군과 큰 접전을 벌인 역사적인 유적지이다.

 

외세에 맞서 싸웠던 승병장 처영과 남원 백성, 갑오농민전쟁의 김개남과 농민군, 3.1운동과 대한의사군 무장진격 작전을 하고자 했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백용성은 외세에 당당히 맞섰고, 백성을 중시하며 백성과 함께 민족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던 호남의 반외세 정신과 맞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