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과 갑신정변

안광획

(김옥균과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에서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순이다.)

12월 4일은 조선 말기(구한말)이던 1888년에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난 날(음력 10월 17일)이다. 일반적으로,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등을 위시한 개화파 세력이 조선을 근대적으로 개혁시키고자 일으킨 정변으로 알려져 있다.


(189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갑신정변의 시초가 된 개국 축하연 사건이 벌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 우정총국(郵政總局) 건물. 서울 종로구 견지동 소재.)

1884년 12월 4일 우정총국(郵政總局)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일어난 개화파들은 민씨 일가를 위시한 수구세력을 축출하고 개화정권을 세워 근대적 개혁 방안을 담은 『혁신 정강』*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지원을 받은 수구세력이 반격에 나서면서 결국 개화정권은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고, 개화파의 개화 시도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의 내정간섭은 더욱 심화되고, 일제와 굴욕적 「제물포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외세 침략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김옥균의 경우 일본 망명을 거쳐 해외에서 체류하다가 결국 중국 상해(上海)에서 수구세력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리고 김옥균의 시신은 국내로 압송되어 수구세력에 의해 대역죄인으로 매도되며 부관참시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것이 갑신정변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다.

*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가 내놓은 『혁신 정강』은 총 80여 개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갑신일록』에 전해져 오는 것은 14개 조항뿐이다. 다음은 『혁신 정강』의 14개 조항 중 중심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 대원군 즉각 환송, 청에 대한 조공 및 사대 철폐.
– 봉건적 관료등용제도인 과거제의 폐지, 실력과 재능에 따른 인재등용.
– 토지개혁(지조법) 단행, 탐관오리 척결 및 빈민구제, 국가재정 건실화.
– 조세개혁 및 조정 부처 통폐합(혜상공국, 규장각 등 철폐, 의정부-6조만 남김) 단행.
– 국내 치안 강화, 봉건적 사법제도로 억울하게 구금되거나 유배당한 죄인들의 석방.
– 군대 개혁 및 군사력 강화를 통한 국방 기반 구축.

갑신정변에 대한 남측에서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먼저, ‘위로부터의 자주적 근대화 개혁 시도이자 근대 개화운동 및 반일독립투쟁에 일정한 방향과 노선을 제시한 사건’으로 평가하면서도, ‘준비 부족으로 외세(일제)의 힘을 빌린 실패한 정변’이라 본다.(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38: 개화와 수구의 갈등, 2002) 그리고 대중사회에서는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을 위시한 개화파가 일제의 힘을 빌린 것이나, 실패 이후 정변을 주도한 몇몇 개화파 인사(박영효, 서재필 등)의 이후 외세부역 및 반민족 행적을 들어 ‘친일파’, ‘매국노’ 등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북에서는 김옥균과 갑신정변에 대해서 어떻게 볼까? 북에서는 갑신정변을 ‘1884년 부르죠아개혁운동’으로 부르며 우리나라의 첫 근대 부르주아 개혁운동으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갑신정변은 실패하였으나 그것은 우리 나라 력사발전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사변이였다.

첫째로, 갑신정변은 우리 나라에서의 첫 부르죠아혁명으로서 부르죠아민족운동사에서와 근대력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갑신정변은 우리 나라에서 자본주의적관계가 발생발전한데 기초하여 합법칙적으로 일어난 근대초기의 가장 큰 정치적사변이었으며 부르죠아혁명투쟁이였다. 이 투쟁은 우리 나라의 선각자들이 자본주의침략이 강화되고 봉건통치제도가 썩어가고있던 시기에 력사발전의 합법칙적요구를 반영하여 나라의 자본주의적발전의 길을 열어놓기 위하여 벌린 심각한 투쟁이였다. 따라서 갑신정변은 민족적독립과 사회적진보를 위한 개화파의 진취적인 기상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또한 갑신정변을 계기로 우리 나라 부르조아민족운동은 새로운 단계에로 발전하게 되였다. 갑신정변은 우리 나라가 자제발전의 합법척성에 기초하여 부르죠아혁명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될수 있는 새로운 력사적 시기에 들어섰다는것을 보여주었다.

둘째로, 갑신정변과 그 지도사상으로 된 개화사상은 그후 부르죠아민족운동시기의 반침략반봉건투쟁을 발전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치였다.
갑신정변은 실패하였으나 개화파가 시작한 사업은 그것이 사회발전의 합법칙성에 의거하고있는것으로 하여 부르죠아민족운동시기와 그후 운동들에 계승발전되였다. 개화사상의 영향은 1894년 농민전쟁때 농민군이 제기한 혁명적 요구들속에 반영되였으며 1894년(갑오) 부르죠아개혁, 자유민권운동, 에국문화운동 등 19세기말 20세기초의 반봉건반침략운동들은 모두 개화사상과 부르죠아혁명운동으로서의 갑신정변과의 일정한 계승발전관계에서 진행되였다.”(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조선전사』 13 근대편 1,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0)

비록 개화파의 전술적 착오(사전준비 부족 및 외래침략자의 파괴모략 책동 분쇄 실패)와 일제 및 청을 위시한 외세의 무력간섭, 고종을 위시한 왕실의 미온적 태도 등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지만, 역사의 합법칙성에 기초하여 부르주아혁명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역사적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본다. 또한, 갑신정변에서 제시한 각종 근대적 개혁 방안과 개화사상은 이후 우리민족의 반외세·반봉건 투쟁을 발전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김형직 선생)가 조선의 부르죠아개혁운동에 대해서 말씀하는것도 여러번 들었다. 아버지는 김옥균이 지도한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난데 대하여 매우 아쉬워하면서 개화당이 내놓은 혁신정강중 인권평등, 문벌페지(문벌폐지), 인재등용, 청나라에 대한 종속관계의 페절(폐절)을 암시한 독립사상 등은 모두 진보적인것이라고 하였다. (중략) 우리에게 조선력사를 배워주던 선생들은 대체로 김옥균을 친일파로 규정하였다. 해방후 우리 나라 학계에서도 오래동안 김옥균에게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이였다. 그가 정변준비과정에 일본사람들의 도움을 받은것이 친일의 표적으로 되였다. 우리는 이것을 공정한 평가라고 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력사학자들에게 김옥균의 개혁운동에서 인민대중과의 결합에 주의를 돌리지 않은것은 물론 잘못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힘에 의거하였다고 그것을 친일로 평가하면 허무주의에 떨어진다. 그가 일본의 힘을 리용한것은 친일적인 개혁을 단행하자는데 목적이 있은것이 아니고 당시의 력량관계를 면밀히 타산한데 기초하여 그것을 개화당의 편에 유리하게 전환시키자는데 있은것이다,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전술이였다고 말해주었다.”(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1,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또한, 북에서는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에 대해서도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김옥균이 표방했던 부르주아 개혁정강과 자주독립정신은 애국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이었다고 보며, 정변 과정에서의 한계와 전술적 오류, 그리고 그로 인한 실패를 근거로 들어 단순하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다. 비록 계급적·정치사상적 한계성으로 개혁운동과 인민대중의 결합에는 실패했지만, 김옥균은 당대의 역량관계를 정확히 타산하여 일본의 힘을 빌려 개화당에 유리하게 전환시키고자 하였다고 보며, 이는 불가피한 전술이었다고 본다. 또한, 정변 과정에서 김옥균이 표방한 자주독립정신과 군사협력 외의 일제 간섭 거부는 오히려 일제침략자들로 하여금 김옥균을 배신하고 청나라 군대의 무력개입을 묵인·방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부르죠아개혁이 실패한 후 일본반동들은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를 정치적으로 박해하였으며 그들의 신변을 위협하였다. (중략) 이러한 일본정부의 배신적행위는 일본국내에서 반정부여론을 야기시켰고 서울주재 각국 외교관들의 비난을 초래하였다.

일본외무성은 마지못해 조선정부에 김옥균의 시체에 참형을 가하지 말것과 홍종우를 높은 벼슬에 등용하는것은 곤난하다는 의견을 제기하면서 이들의 범행을 감추어보려고 하였다. 또한 수구파정부가 김옥균의 시체에 참형을 가하자 교활한 일본침략자들은 그것을 기회로 반청, 반조선깜빠니야(=반(反)조선 캠페인)를 대대적으로 벌리면서 청일전쟁을 도발하기 위한 전쟁기운을 환기시키는데 악용하였다.”(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조선단대사』 리조사 11,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11)

그리고 북에서는 정변 실패 후 10년간 해외 체류 동안에도 김옥균은 지속적으로 조선의 부르주아적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다는 점을 높게 평가한다. 결국, 정변 이후 김옥균의 개혁 노력은 조선침략에 방해가 될 것임을 파악한 일제로부터 끊임없이 음해와 박해를 받았고, 살해과정 역시 일제의 묵인방조로 인해 벌어졌음을 폭로한다. 이후로도 일제는 김옥균 암살사건과 수구세력의 부관참시를 들어 반조선·반청 음해공작에 악용하며 제국주의 침략책동을 벌렸다고 비판한다.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은 비록 3일천하로 실패하였지만,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정변 과정에서 제시된 근대 부르주아 개혁사상과 자주독립사상은 이후 갑오농민전쟁**과 갑오개혁, 그리고 반일의병투쟁 및 애국계몽운동과 항일독립투쟁으로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과연 갑신정변을 단순히 ‘실패한 개혁’ 내지는 ‘친일파’ 등으로만 평가할 수 있을까. 12월 4일을 앞두고 김옥균과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본다.

** 지난 호에서도 지적했듯이, “당시 ‘희생된 김옥균의 넋이 폭동자들가운데 나타났고 또한 지금까지 무적의 대군을 지휘하고있다.’는 말이 국외에까지 퍼진것은 농민군의 페정(폐정)개혁의 요구와 그 실현을 위한 활동이 단순히 반봉건적반침략투쟁에 국한된것이 아니라 부르죠아개혁운동을 추동한 요인이였다는것을 말해준다.”(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조선단대사』 리조사 11,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11)는 북의 평가는 결코 지나치지 않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