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진 《점제비》
 

《점제비》(점제신사비)는 낙랑군 속현 25현중의 하나인 점제현에서 풍년들기를 기원하여 산신에게 제사지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점제현은 요하하류의 해성 근방에 위치하였던 한나라의 지방행정단위였다. 따라서 이 비석은 해성 건너편 언덕에 1 800여년 동안 세워져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13년에 조선경내의 당시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운평동(오늘의 온천군 성현리)에서 갑자기 발견되었다.

요하지역에 있던 《점제비》가 한반도 경내의 용강땅에 옮겨오게 된 실재한 사실은 조선민족의 역사를 왜곡말 살하기 위해 일제가《낙랑군-평양설》을 조작하면서까지 얼마나 악랄하게 책동하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나라 침략자들은 B.C. 108년에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대릉하 동쪽 오늘의 요동반도일대에 낙랑, 임둔, 진반, 현도의 4군을 두려고 하였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한4군》이라고 한다.

《한4군》에서 낙랑군은 대체적으로 패수(대릉하)하구 동쪽, 열수(료하)하구 좌우, 천산산줄기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요동군이 지금의 요동지방으로 옮겨온 이후에 낙랑군은 해성 남쪽 요동반도지역을 차지하였다.

우리 나라를 침략한 일제는 당시 해성근방에 있던 《점제비》를 용강쪽에다 옮겨놓고 거기를 점제현이라고 우겨대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한서》지리지에 점제현이 열수하구부근에 있었다고 하였으니 대동강을 열수로 정하기 좋고 나아가서는 열수가 낙랑군안에 있던것으로 되어있으니 한나라가 함락시킨 왕검성이 평양에 있었고 낙랑군 소재지도 거기였던 것으로 만들어버리려고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일제침략자들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악용하였다.

B.C. 82년에 한나라 통치배들은 고조선, 고구려 인민들의 반침략투쟁으로 하여 맥을 추지 못하는 진반, 림둔 2개군을 페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통합한다고 선포하는 동시에 새로 꾸린 군, 현들에 고조선중심부의 일부 지명을 붙여놓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구체적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하여 낙랑군의 위치는 오래동안 역사가들의 논쟁거리로 되여왔다. 그래서 《수경주》의 저자 역도원(5세기 중엽~6세기 초엽)이 고구려 사신의 말을 잘못 이해하여 낙랑군이 평양일대에 있었다는 주장을 한이래 그것이 정설처럼 되였고 우리 나라의 일부 양반사대부들도 그에 추종하였다.

근대에 와서는 간악한 일제가 낙랑군의 위치문제를 두고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역사적 근거》로 삼으려고 악랄하게 책동한 것으로 하여 더욱 첨예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점제비》를 악용한 모략책동은 그 중 하나의 사건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옮겨진 《점제비》에 대한 이야기도 일제가 《낙랑군》-《평양설》을 조작하려고 얼마나 발악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이다.

1913년 여름 어느날 일본 교또제국대학의 조교수로 있던 이니마시 류에게 두명의 사나이가 찾아왔다. 한명은 일본 육군참모본부 요원이고 한명은 《조선총독부》의 직원이라고 하였다.

용건을 묻는 이마니시에게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점제비》에 대해 알고있느냐고 물었다.

이마니시는 몇년전부터 사학계에서 술렁거리던 이야기인데 그때에는 요동(해성근방)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였는데 터무니없이 용강에서 발견되였다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고 속구구를 하고있었다.

참모본부의 사나이는 당시 사학계에서 명망이 높았던 이마니시에게 이 《점제비》의 진가를 《판별》해주는 논문을 하나 써냈으면 하는 의향을 내비치였다.

이니마시가 사학계에 명망이 높은 많은 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건의해 보라고 말을 하자 그 사나이는 그들이 《천황》의 《적자》답지 않게 거절하고있다고 하였다.

이마니시를 매섭게 바라보며 《총독부》사나이가 이번 발견을 솜씨있게 발표하면 학계를 떠들썩하게 하고 《조선사》의 대가로 나설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고 회유하였다. 그렇게 되기를 장님 해보기만큼이나 바라는 이마니시였지만 사학계의 유력인물로 알려진 시라도리가 움츠렸다는 것을 보면 문제가 간단치 않은 모양인데 자기가 나섰다가 어떤 공격을 받겠는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러면서도 《미개척지》인 조선사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위원자리이고 또 머지않아 책임관으로까지 승진된다니 머리에 어지럼증이 일 정도였다.

《점제비》의 고증을 통하여 일제는 낙랑군을 조선반도 서북부에 한정해놓고 조선은 예로부터 남의 나라 식민지로 있었다는 식민지사관을 부식시키자는 저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그후 이마니시는 룡강에 한번 얼핏 갔다와서 《점제비발견기》를 요란스레 공포하여 용강이 점제현이며 따라서 평양부근이 낙랑군지역이였다고 나발을 불어댔다.

어용사가로서의 임무를 어렵지 않게 해낸 대가로 교또제국대학의 조교수에 불과하던 이마니시는 1916년에 조작된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고대사부분을 맡은 주요집필자로서 《동양사학의 거장》이라는 시라도리와 어깨를 겨루게 되였다. 이어 1921년에는 《단군고》라는 악랄한 단군말살을 주장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절취하고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 겸 총탁으로 승진일로를 걷게 되였다.

가관은 이때에 잔꾀많기로 유명한 일제놈들도 《점제비》이동조작에서는 실수가 많았는지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백색기와쪼각까지 나온 지면우에 이 비석을 올려세웠던것이다. 또 세월이 흘러 오늘에 와서 현대과학적 방법으로 비돌을 조사해본 데 의하면 그 지방의 화강암의 화학조성과 생성년대와는 다른 료동반도 해성부근의 것이라는것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일제놈들의 역사위조에는 종지부가 찍혔다.

일제의 역사왜곡책동은 나라 잃은 민족은 제 민족의 참력사도 지켜낼 수 없다는 심각한 교훈을 우리들에게 새겨주고 있다.

 

2019-12-02 19.46.25.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