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가 성립, 중국보다 빨랐다

[새로 쓰는 고조선 역사](8) 고조선의 국가성격 논쟁, 고대 노예제 국가

 

고조선의 국가 성격에 관한 문제는 우리나라 원시시대와 역사시대의 계선에 관한 문제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첫 국가는 고대국가이다. 각 나라와 민족들은 고대국가를 세우면서 원시시대를 끝내고 문명시대 역사시대로 진입했다. 우리나라가 반만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반만년 전에 고대국가가 성립됐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반만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데, 역사학계에서는 그것을 부정한다. 기껏해야 기원후 3~4세기에 이르러서야 고대국가가 성립했다는 것이다. 역사학계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나라는 기껏해야 180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이 아니라, 중국보다 2000여년 뒤늦게 역사시대로 접어든 역사 지진아일 뿐이다. 과연 우리나라 역사는 1800년인가 반만년인가? 이것이 고조선의 국가 성격의 본질이다. 





초기 국가론을 비판한다 



고대국가 성립 시기 문제가 쟁점으로 되는 것은 그것이 원시시대에서 역사시대로의 역사적 전환의 징표이자 귀결점이기 때문이다. 모든 나라들은 고대국가 성립시점부터 그 나라 역사시대가 시작됐다고 본다. 역사학에서 국가는 원시공동체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원시공동체는 씨족이나 부족 등 혈연적 관계에 의해 사회가 조직되고 운영된다. 반면에 국가는 계급 계층으로 이루어진 지역 공동체에 기초해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권력기구(국가)에 의해 사회가 조직되고 운영된다. 고대국가 성립의 징표는 합법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군대, 법률, 감옥 등 물리적 권력기구와 함께 조세를 징수하고 행정을 집행하는 관료조직, 지배이념, 그리고 최고 통치자(전제군주) 등을 갖추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는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우리나라 고대국가 성립시기를 3~4세기로 못 박아 놓고, 이를 아직까지 고수하고 있다. 그 결과 여러 가지 유적 유물, 역사자료에 의해 그 실체성이 확인되고 있는 고조선을 고대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입각해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국가건설 시기마저도 부인하고 소위 원삼국시대라는 해괴한 개념까지 만들어냈다. 원삼국시대란 아직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기 전의 삼국시대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한국 고대사회 출발점이 되는 고대국가의 형성 문제가 이처럼 복잡하게 된 것은 일제의 단군조선 말살책동 때문이다. 일제는 단군조선을 말살하기 위해 단군조선사를 완전히 부정하고 우리 민족사의 앞머리 부분을 몽땅 잘라버린 왜곡된 조선역사를 조작해냈다. 그 이후로 단군조선은 신화의 영역에 갇혀 버리고 역사의 영역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반갑게도 고조선의 역사적 실체성을 인정하는 추세가 확산되고 있다. 최근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도 고조선을 최초의 국가로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성립시기가 3~4세기경이 아니라 고조선의 성립으로부터 고대국가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인정한 것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존재한다. 고조선을 최초의 국가라고 기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고대국가 성립 시점은 여전히 3~4세기라는 것이다. 요즘 약간 진취적인 역사학자들은 고구려의 고대국가 성립 시점을 3~4세기라 아닌 1세기경에 고대국가체제가 성립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고조선을 최초의 국가라고 할 때 그 국가는 고대국가가 아닌 어떠한 국가란 말인가? 고대국가 이전단계에도 국가가 존재했다는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결론은 이렇다. 우리나라에서 기원전 10~8세기경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성립됐으나, 아직까지 고대국가의 체모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고대국가라고 말할 수 없고, 초기 국가(원시공동체와 고대국가의 과도적 단계의 국가형태)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대국가 성립시기를 3~4세기로 못 박아 놓기 위해 이렇게 초기국가론을 새롭게 고안해냈다. 그렇다면 초기국가는 고대국가인가 아닌가? 이에 대해 매우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초기국가론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력이 행사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단일한 국가체가 형성되기 이전 상태인 초기 국가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봄으로써 고조선의 국가적 실체성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또한 고대국가와 구별되는 초기 국가단계를 설정함으로써 내용적으로는 부족국가론 등 과도기 국가론과 다를 바 없게 돼버린다. 원래 고대국가란 개념 자체가 인류의 최초의 국가 형태로서 국가발전단계에서 초기 국가단계에 해당되는 역사적 개념이다. 따라서 고대국가에서는 관료조직이라든가 전제군주권이라든가, 무장력(군대조직), 법률제도, 조세제도 등 국가의 기본 체제들이 아직 초보적 형태로 매우 불완전하고 엉성하며, 낡은 사회(원시공동체 사회)의 유재들이 많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고대국가라는 개념 자체는 원시시대와 문명시대(역사시대)를 나누는 계선으로서의 가치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고수하고 있는 고대국가의 징표는 국가의 발전단계로 볼 때 초기 단계를 훨씬 뛰어넘어 상당히 발전된 국가 단계 즉 중세사회에서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이다. 그러한 높은 기준을 내세워 고조선의 고대국가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의 유구성을 부정하려는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행위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북한의 역사학계는 삼국 시대를 고대국가단계가 아니라 중세국가단계로 규정하고 있다. 초기 국가론자들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1800년에 불과하며, 기껏해야 2000년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전 우리나라는 고조선과 같이 고대국가로 발전해 나가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해도, 아직까지 고대국가의 체모를 갖추지 못함으로써 원시시대의 단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중세사회로 발전해 나가려는 시점에 우리나라는 비로소 역사가 시작됐다는 것이며, 이는 우리나라 역사의 유구성을 부정하려는 식민사학의 틀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유적 유물과 역사자료로 본 고조선의 고대 국가적 성격



고조선은 원시공동체 사회와 고대국가 사이에 있는 과도적인 국가체제가 아니라, 역사시대 문명시대를 열어나간 고대노예제 국가체제이며, 사회발전단계로 볼 때 원시공동체 사회단계를 뛰어넘어 고대 노예제 사회 단계에 속한다. 고조선이 고대국가인 까닭은 첫째 사회발전단계로 볼 때 원시공동체 사회관계가 붕괴된 후 새롭게 등장한 고대 노예제적 사회관계에 기초해서 국가가 세워졌으며, 둘째 노예 소유를 합법화하는 성문법 체계를 갖고 있으며, 셋째 세습군주제도와 중앙관료기구 및 지방 행정조직을 갖춘 관료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넷째 국왕이 통솔하는 군대와 국가적 방어체계인 성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고조선이 고대국가인 까닭은 사회발전단계가 공동소유와 공동노동에 기초한 원시공동체 사회관계에서 벗어나,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와 계급이 발생해 사회가 지배하는 자와 지배를 받는 자,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로 나뉘어 끊임없는 갈등과 혼란이 발생했던 노예제 사회 발전단계에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고조선이 노예제 국가였다는 것은 지금 남아 있는 유적 유물들로 입증된다. 고조선이 노예제 국가였다는 것은 고조선시기의 고인돌 유적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는 수만개의 고인돌 무덤이 존재하는데, 고인돌 무덤은 그 조성규모와 수법으로 볼 때 원시공동체 사회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으며, 일정한 권력이나 재물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노예 노동을 동원해서 건축한 것이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인 것은 순장무덤이다. 순장무덤은 노예주가 죽었을 때 노예주의 무덤에 산 노예를 강제로 생매장한 무덤인데, 지금까지 평양근처의 용산무덤(기원전 31세기), 중국 요녕성 대련시 감정자구에 있는 강상무덤(기원전 16~15세기), 누상무덤(기원전 10세기 전후) 등이 발굴되어 고조선 사회의 노예제적 성격을 증명해 주고 있다. 





▲ 강상무덤


 

후조선 시기의 성문법인 범금 8조 역시 고조선의 고대국가적 성격을 증명해주고 있다. 법은 지배계급의 의사의 표현이며 중요한 통치수단으로써 국가와 함께 발생해 지배계급의 이익을 반영하고 옹호하면서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그러므로 법의 존재 유무는 곧 국가의 존재 유무의 핵심적 징표 중의 하나로 된다. 고조선에도 법이 있었다는 것은 후조선 시기의 성문법으로 제정된 것으로 인정되는 범금 8조가 증명해 준다. 범금 8조는 후조선 초기에 제정된 것으로 지금 전해지는 것은 그중 3개 조항뿐이다. 중국 역사서인 한서지리지에 실려 전해져 온 범금 8조 중 3개 조항은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남에게 부상을 입힌 자는 곡식으로서 보상해야 한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남자의 경우에는 도적을 맞은 자의 노로 만들고 여자의 경우에는 비로 만든다. 만일 훔친 자가 죄를 벗으려면 50만의 돈을 내야 한다”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범금 8조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문법 체계로서, 그 내용을 볼 때 사적 소유와 노예제 사회에서 지배계급(노예소유주)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법체계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법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후조선 초기에 이처럼 발전된 성문법이 존재했다는 것은 단군조선 초기부터 법이 제정되어 부단히 발전되어 왔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 고조선의 무기: 비파형 단검


 

고조선의 고대국가적 성격은 또한 정연한 국가 통치기구와 관료조직, 군대를 갖추고 있다는 점으로도 입증된다. 고조선은 국왕 중심의 세습 전제군주제 체제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고조선 사회에서 기원전 4~3세기경부터 왕 칭호가 쓰였기 때문에 그때부터 전제군주제 국가로 발전했다고 본다. 전제군주의 칭호는 나라와 민족마다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임금(단군: 밝은 임금)이라 했고, 중국에서는 왕(王)이라 했고, 서양에서는 킹(king)라고 불렀다. 기원전 3~4세기에 왕의 칭호가 쓰인 것은 그 때부터 전제군주 권력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왕에 해당되는 우리의 고유 칭호(단군, 밝은 임금)를 쓰다가 왕이라는 중국식 칭호도 같이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나라는 단군조선 시기부터 전제군주제 국가형태를 갖추었다. 단군은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이자 전제군주로서 세습됐다. 이는 단군의 아들 부루에게 왕위를 물려줬다는 역사기록과 함께 후조선 말기 왕들인 부와 준이 부자 세습했다는 역사기록, 그리고 만조선의 삼대에 걸친 왕들이 모두 부자 세습의 형태로 왕위가 계승됐다는 역사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고조선에서 군주는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정치 경제 문화 대외관계 등 모든 분야의 일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처리했다. 또한 중앙통치기구뿐만 아니라 지방통치기구도 장악하고 전국에 대한 지배와 통치를 실현했다. 군주(단군) 밑에는 비교적 정연한 중앙관료기구와 통치기구가 있었다. 중앙관료기구에서 기본은 8가 또는 9가 제도였다. 가라는 말은 고대 우리말에서 귀한 사람, 큰 어른을 가리키는 존칭어로서 귀족층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는데, 고조선에서는 원시사회의 동물신앙의 유제를 외피로 해 범 말 소 개 곰 등 동물 이름을 가와 결합시켜 해당 동물의 특성과 관리들의 직분에 어울리게 최고 관료의 관직명을 삼았다. 호가, 마가, 우가, 웅가, 학가, 로가, 구가 등이 그것이다. 후조선 말기에 이르면 비왕, 상, 장군, 대부등의 관직명 등이 나타난다. 고조선의 지방통치체계는 당시의 발전정도에 맞게 임금의 직접통치와 간접통치로 나뉜다. 직접통치 지역을 직할지라고 부르며, 간접통치지역은 후국 속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밑에 말단 행정단위로서 각이한 규모의 고을과 마을들이 층위를 이루고 종속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이와 함께 고조선에서는 상설적인 군대를 갖추고 있었다. 이는 별도끼, 비파형동검 등의 단군조선 시기 유물들에 의해 확인되며, 또한 후조선 말기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공시 10만의 연나라 군대가 동원됐다는 것으로도 그에 맞설만한 고조선의 상설 군대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고조선-한 전쟁 당시 동원된 한나라의 군대가 10만에 이르는데, 이에 맞서 1년 이상 싸웠다는 것은 그에 견줄만한 고조선의 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반 사례로써 고조선에는 상설적인 군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고조선의 무기: 좁은 놋 단검


 

우리나라 역사는 1800년이 아니라 5천년이다



흔히 우리들은 관습적으로 삼국시대 이전의 우리나라 역사를 상고시대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상고시대라는 말은 고대 이전의 과도적 시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상고시대라는 용어는 고조선의 고대국가적 성격을 부정하는 견해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상과 같이 발굴된 유적유물들과 역사자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평가해 볼 때 고조선은 고대국가 이전 단계(원시시대)의 초기 국가가 아니다. 이와 달리 고조선은 고대국가의 징표를 제대로 갖춘 명실상부한 고대국가이다. 고조선의 개국시조는 단군으로, 단군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고대국가 고조선을 건국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시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로부터 우리나라는 선사시대로부터 역사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 문명시대로 접어들었다.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할 당시 동아시아 이웃나라들에서는 아직까지 고대국가를 세우지 못한 채 원시시대의 낙후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출처 : 현장언론 민플러스(http://www.minplu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