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림왕이 천자의 위엄을 갖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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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있는 천추묘: 일부 사람들은 이 묘를 소수림왕의 묘로 비정하고 있다.)

 

지난날 봉건사회에서 나라의 최고통치자는 임금(국왕)이였다. 그러나 나라의 크기나 강약정도에 따라 국왕의 격도 서로 달랐다. 일반적으로 작은 나라의 국왕은 그저 , 또는 제후라고 하였고 여러 작은 나라들을 지배하는 큰 나라의 국왕은 대왕, 천자, 황제라고 불렀다.

 

이렇게 국왕의 칭호에 따라 천자국과 제후국이 갈라지고 해당 나라의 지위와 국력이 평가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아무 나라나 대왕, 천자, 황제를 칭할수 있는것은 아니였다. 아무리 천자의 나라구실을 하고싶어도 그에 상응한 국력이 안받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갖 꿈속의 소원으로밖에 되지 않았다.

 

왕권이 국가권력의 상징으로 되였던 동방나라들에서 국왕의 지위는 국력의 징표로 되였다.

 

중세동방의 강국 고구려의 국왕들은 명실공히 대왕, 천자들이였으며 고구려는 천자의 나라로 자처한 대국이였다.

 

고구려의 임금들은 건국초기부터 여러 임금들우에 선 황제라는 뜻에서 대왕이라고 불렀으며 370년대에 이르러서는 정식으로 제호(황제의 칭호)를 써서 그 권위를 한층 더 높이였다.

 

고구려가 천자의 위엄을 갖춘것은 소수림왕때였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고구려의 소수림왕때의 일이다.

 

37110월 고국원왕이 남방으로 출전하자 태자인 구부가 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맡아보았다.

 

유주지역에로의 대원정과 그에 뒤따른 승전소식으로 하여 당시 고구려의 조정은 환희로 들끓고있었다. 서쪽에서의 침략위험이 일단 가셔지고 고조선의 옛땅이 고구려의 판도에 들어온데다가 대고구려의 위세가 부쩍 올라갔으니 왜 그러지 않았으랴.

 

그런 희열에 떠밀리워 고국원왕은 조정의 일을 태자에게 일임하고 자기는 남방의 전장으로 떠난것이였다.

 

남방전역에서의 승전소식을 이제나저제나하고 기대하며 태자는 자기가 처리할수 있는 정사는 솜씨있게 해치우고 그렇지 않은것은 부왕의 귀환을 기다려 처리하기로 하며 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였다.

 

이날도 태자는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정사를 보고있었다.

 

태자가 여러 신하들과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있을 때 근신 한사람이 조용히 곁으로 다가와 태자의 귀에다 대고 무엇인가 소곤거렸다.

 

, 남쪽에서 소식이 왔단 말이지. 어서 그 전갈을 가지고 온 사람을 이리로 들이라.

 

알았소이다.

 

조금 있더니 갑옷차림을 하고 장검을 허리에 찬 사람이 태자앞에 나타났다. 갑옷잔등에 소금버캐가 허옇게 내배여 있는것으로 보아 먼길을 급하게 달려왔다는것이 첫눈에 알렸다.

 

그래 무슨 소식인고. 물론 희소식이렸다.

 

태자가 그 군사에게 물었다.

 

헌데 그는 주밋주밋하며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웬일인가 하여 자세히 뜯어보니 얼굴에는 침통한 빛이 어리고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있는것이였다. 보매 그 무슨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긴것이 분명했다.

 

(그럼 패전?!)

 

그 순간 태자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였다.

 

어서 사실을 아뢰여라. 도대체 어인 일인고.

 

태자가 재차 다우쳐서야 군사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동궁마마, 이 일을 어쩌면 좋소이까. 글쎄 대왕께옵서, 대왕께옵서 별세하셨소이다.

 

태자는 전혀 뜻밖의 말에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기껏해서 패전소식에 불과하리라고 생각했던것인데 그보다도 더 엄청난 소리가 튀여나오지 않는가.

 

(부왕께서 별세하시다니.)

 

남평양성에서 싸움을 지휘하시던중 날아오는 눈먼 화살에 맞아 그만 중상을 당하셨소이다. 적은 물리쳤지만 대왕께서는 그 어혈로 끝내…》

 

군사가 무엇인가 계속 말을 잇는것 같았으나 태자에게는 그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순간 장내는 울음마당으로 변해버렸다.

 

얼마후 고구려에서는 태자였던 구부가 새 임금으로 올라앉았다. 그가 바로 소수림왕이였다.

 

소수림왕은 부왕의 유언대로 그의 시신을 남평양(황해남도 신원군)에서 멀지 않은 양악(안악군)지방에 안치하였다.

 

장례를 치른 소수림왕은 앞으로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보았다. 시조 동명왕의 창업이래 고구려의 강역은 확대일로를 걸어 비할바없이 넓어졌다. 지금은 유주까지 평정되고 선인왕검(단군)이 개척한 고조선의 땅도 고구려의 지경안에 들어왔다. 이제는 그 누구도 우리 대고구려를 넘겨다보지 못한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고구려를 명실공히 천자의 체모를 갖춘 나라로 만드는것이다. 그렇다면 남들이 하는것, 남들에게 있는것은 우리 고구려도 해야 하고 우리 고구려에도 있어야 마땅하다.

 

이런 생각을 굳힌 소수림왕은 그것을 곧 실천에 옮겼다.

 

그는 첫 사업으로 고국원왕에게 소렬제라는 황제칭호를 추증했다. 이로써 고구려왕은 대내외적으로 그 위세가 종전보다 더 높아졌다. 그렇다고 하여 고구려왕의 지위가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황제의 지위에 올라간것은 아니였다. 고구려는 이미 그 초창기에 고주몽을 동명성왕이라고 하여 출발부터 천자의 나라였고 그후에도 임금들을 황제와 같은 격인 대왕이라고 불렀다. 제호를 붙인것은 고구려가 다름아닌 천자의 나라라는것을 다시한번 내외에 선포한것이나 다름없었다.

 

소수림왕은 372년에 천자(황제)의 나라에만 둔다는 최고유학교육기관인 태학을 설치하였고 373년에는 봉건국가의 법전인 률령을 발표하였으며 374년에는 태녕이라는 년호를 제정하였다.

 

이와 같은 칭제건원(황제를 칭하고 년호를 제정하는것)이라든가 태학의 설치, 률령의 반포 등은 이른바 천자의 나라들에서만 있을수 있는것들이였다. 결국 고구려는 내용에서뿐아니라 형식면에서도 천자의 나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던것이다.

 

이것은 고구려가 중세동방의 강대국으로 위용을 떨치던 근 1 000년의 력사가운데서 극히 단편적인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